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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마치 가축을 도살하듯 뼈만…" - <조선일보>
"시신을 자신의 집 화장실에서 토막 냈고 살점을 280여점으로 도려내..." - <중앙일보>
"나랑 성관계해주면 돈을 주겠다고 했는데 계속 반항... 살려서 보낼 수..." - <동아일보>

4·11 총선을 불과 며칠 앞두고 발생한 끔찍한 살해사건을 마치 소설 쓰듯 잔인하게 묘사한 보수신문들의 과열 경쟁보도가 도를 넘어섰다. 특히 수사과정에서 국과수 직원 또는 경찰청 프로파일러 등이 흘린 말을 인용해 단독보도임을 강조하며 대서특필하고 있는 보도행태가 점입가경이다. 이 과정에서 사건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며 왜곡·과장보도를 일삼는 일부 언론들의 꼴불견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언론이 수행해야 할 기능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도 환경감시 기능은 매우 중요하다.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하고, 고발해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중요한 기능을 말한다.

그런데 이를 악용하면 문제는 매우 복잡하고 커진다. 더욱이 사건을 자사의 이념적 프레임에 맞추어 재설정할 경우 환경감시의 역기능은 금세 작동하기 마련. 독자와 시청자들에게 과다한 심리적 긴장감이나 공포를 유발하는 것이 바로 언론의 '환경감시 역기능'이다.

수원 납치 살해사건 보도, 환경감시 순기능보다 역기능 더해 

<조선일보> 자사 인터넷신문인 <조선닷컴>의 4월 11일(오후 4시 15분) 초기화면 모습 캡쳐.
 <조선일보> 자사 인터넷신문인 <조선닷컴>의 4월 11일(오후 4시 15분) 초기화면 모습 캡쳐.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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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협적 사건에 관한 확인과정을 거치지 않고 별 해설도 없이 갑작스럽게 국민들에게 정보를 전달했을 때 이를 접한 국민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지나칠 정도로 과민반응을 보일 수 있다. 언론의 환경감시 기능은 매우 중요하지만 이러한 역기능이 늘 문제가 되기 때문에 신중한 보도 태도가 요구된다.

그런데 최근 수원 20대 여성 납치살해사건을 보도하는 보수신문들의 보도행태에선 환경감시의 순기능 대신 역기능이 더욱 심하게 노출되고 있다. 이들 신문을 접한 사람들로 하여금 불안과 공포를 더하게 하고 있다. 환경감시의 역기능적 보도가 선거과정에서 보여준 편파보도와 색깔저널리즘보다 한 수 위임을 실감케 했다. 사건발생 이후부터 선거 당일에까지 이러한 현상이 지속됨으로써 물타기보도 차원을 넘어 또 다른 의도성을 짙게 드러냈다.     

<한겨레> 자사 인터넷신문의 4월 11일(오후 4시 17분) 초기화면 모습 캡쳐.
 <한겨레> 자사 인터넷신문의 4월 11일(오후 4시 17분) 초기화면 모습 캡쳐.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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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자사 인터넷신문의 4월 11일(오후 4시 17분) 초기화면 모습 캡쳐.
 <경향신문> 자사 인터넷신문의 4월 11일(오후 4시 17분) 초기화면 모습 캡쳐.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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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는 선거 당일인 11일 오후까지도 자사의 인터넷판에 이 사건의 속보와 사진 등을 크게 다뤄 의구심을 자아냈다. 그 시각 다른 매체들은 투표율과 전국 각 투표소 상황을 앞다투어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사건을 뒤 늦게 보도하기 시작했으면서도 마치 수사하듯 전 과정을 과장보도 해 온 <조선일보>는 지난 9일 국과수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사회면 기사에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엽기적인 표현들을 써 오싹하게 했다. 리드에서부터 공포분위기를 자아내기 시작한 기사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마치 가축을 도살하듯 뼈만 앙상하게 남겨 놓았다"며 피해자 시신을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말임을 강조해 보도했다.

기사는 "봉지 하나당 20여점씩 살점 덩어리가 총 280여점이 담겨 있었다"며 "오씨가 A씨의 온몸을 난도질한 상태였다" 등의 표현으로 공포와 충격을 부추겼다. 유가족들에겐 씻지 못할 아픔과 슬픔을 주는 표현들로 가득했다. "너무 엽기적이어서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는 기자의 표현보다 더 엽기적인 기사를 보여줬다.

총선 당일까지 살인사건 속보 부각시킨 이유는?

<조선>은 이 사건을 선거 당일에도 오후 4시가 지나도록 인터넷판 톱기사로 다룰 정도로 독자들의 관심을 유도했다. 이날 <경향신문> <한겨레> 등 다른 매체들이 투표율 속보와 선거 이모저모를 인터넷 판에서 톱으로 계속 다뤘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조선>은 이날 경찰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오씨는 노동으로 막 벌어들인 700만 원을 빼앗길까 봐 시신을 잔인하게 훼손했다고 자백했다"며 "집에서는 혼자 독주를 마시고 한 달에 한두 번은 2만~3만 원을 주고 성매매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고 애매하게 전했다.

<동아일보> 자사 인터넷신문에 4월 11일(오후 4시 15분) 노출된 단독보도 기사 캡쳐.
 <동아일보> 자사 인터넷신문에 4월 11일(오후 4시 15분) 노출된 단독보도 기사 캡쳐.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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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도 이 사건에서 잠시 눈을 뗄 수 없다는 듯 연일 속도경쟁에 합류하고 있다. 마치 추리소설과 같은 제목들도 등장했다. 선거 당일에는 '단독보도'임을 전제하고 '"돈 줄테니 성관계" 제안, 피해자가 거부하자…'란 제목과 함께 잔혹한 장면들을 묘사했다.

"7일부터 사흘간 오씨를 심층 면접 한 국내 1호 프로파일러 권 경감은 오씨가 극단적인 범행을 저지른 과정을 10일 <동아일보> 기자에게 상세히 전했다"는 기사는 '돈을 줄 테니 성관계를 맺자고 요구했다', '신고할 것 같아 방 안에 있던 스패너로 머리를 내리친 뒤 목을 졸라 살해했다', '시신이 여행가방에 잘 들어가지 않자 시신을 훼손했는데 그 방식이 여느 흉악범들과는 달랐다', '오씨는 부엌용 식칼을 썼는데 몇 시간에 걸쳐 살점을 발라내는 식으로 시신 부피를 줄이려 했다' 등의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표현을 거침없이 담았다.

또 <동아>는 기사를 통해 이번 사건을 재구성하며 "운이 없어 걸렸다",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등의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표현들까지 사용해 환경감시의 역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중앙일보> 자사 인터넷신문의 4월 11일(오후 4시 15분) 초기화면 모습 캡쳐.
 <중앙일보> 자사 인터넷신문의 4월 11일(오후 4시 15분) 초기화면 모습 캡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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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도 선거 당일 오후 4시 이후까지 이 사건을 인터넷판 톱뉴스로 부각시켰다. 신문은 '토막 살인범, 시신 잔인하게 훼손한 이유는…', '토막 살인범 오씨 두손 묶이고 고개 숙인 채…' 등의 기사에서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속보로 내보냈다.

이 과정에서 "국내 프로파일러 1호인 그는 지난 7일 오후 수원 토막 살인 사건 용의자와 4시간 동안 독대했다"는 내용까지 상세히 설명했다. 기사는 "피해자가 운 없이 골목에 나타나 당한 것"이라는 범인의 주장까지 여과 없이 내보내 경악케 했다.

<중앙>은 또 "오씨는 이날 유치장이 있는 수원남부서를 떠나 수원지검으로 신병이 인계됐다. 경찰은 그의 얼굴과 수갑을 가리지 않았으며, 그는 검거 당시 차림인 쑥색점퍼와 검정색바지, 슬리퍼 차림으로 입을 꾹 다문 채 호송차량에 올라탔다"고 보도한 기사와 함께 오씨의 얼굴이 노출된 사진을 여러 장 소개하기도 했다. 평소 피의자 진술과 수사 관계자의 말을 지나치게 신뢰하고 의존하는 보도행태를 드러낸 장면들이다.

KBS "이웃의 무관심과 추락한 시민정신이 문제?"... 절묘한 '물타기'  

한편 KBS는 경찰의 무책임과 무능함이 드러난 이번 수원 살인사건에 대해 돌연 "이웃의 무관심과 추락한 시민정신이 문제"라며 시민 탓을 하고 나서 또 한 차례 빈축을 샀다. 총선을 코앞에 두고 막판 여권의 악재로 불거지고 있던 경찰 책임론을 희석시키기 위한 책임전가, 물타기 전형이라는 따가운 비판의 목소리가 안팎에서 흘러나올 법도 하다.

KBS는 10일 <뉴스9> '무관심한 이웃들'이란 제목의 리포트 기사를 통해 "수원 20대 여성 살인사건은 경찰의 부실한 대응도 문제였지만 이웃 주민의 무관심도 큰 문제였다"며 "사건 당시 주변에 차량이 지나 다녔고, 일부 주민들은 범행 현장까지 목격했지만 그냥 지나쳤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기사는 이어 "사건 당일(1일 밤) 현장 주변에 차량이 지나고 행인들도 눈에 띈다"며 "일부 주민들은 여성이 폭행당하는 장면을 직접 봤지만, 그냥 지나쳤다"고 보도했다. 또한 "바로 앞에 있는 술집이 문을 열어놓고 있었지만 무관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며 "심지어 피해 여성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전하면서 인근주민의 인터뷰까지 내보냈다.

<경기일보> "처참한 살해현장, 시민의식도 죽었다?"... 덩달아 '물타기'

<경기일보> 자사 인터넷신문의 4월 11일(오후 4시 20분) 초기화면 모습 캡쳐.
 <경기일보> 자사 인터넷신문의 4월 11일(오후 4시 20분) 초기화면 모습 캡쳐.
ⓒ 경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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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총선 당일 <경기일보>도 인터넷판에 '처참한 살해현장 '시민의식도 죽었다''란 큼지막한 제목과 '눈앞서 사건 벌어져도 남의 일 '방관' 사소한 폭력도 신고… 시민정신 절실해'란 부제를 함께 실어 눈길을 끌었다.

이처럼 끔찍한 20대 여성 살해 사건과 관련해 신고전화가 1분 20초라던 경찰 주장과 달리 7분 동안이나 자세히 위치를 설명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경찰이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했다는 비판은 온데간데 없고 오히려 시민 탓으로 내몰거나 사건의 잔혹상을 지나치게 과장·왜곡해 보도하는 보수언론의 속셈은 과연 뭘까. 

공개된 녹취록에 따르면, 당시 긴급공청이 진행돼 A씨의 목소리와 비명은 112신고센터 근무자 20여 명에게 전파됐지만 경찰은 연결시간 내내 "주소가 어디입니까"라고 묻기만 했다. 경찰이 피해자의 비명소리를 들었으나 범행을 막지 못했다는 데 따른 국민 비난 여론을 의식해 통화시간을 경기경찰청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축소해 언론에 공개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사는 이유다.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중대 선거를 앞두고 민간인사찰도 은폐하던 정권이 이제는 살인사건조차 경찰을 통해 은폐했다"며 당장 경찰청장을 해임하고 대통령이 국민에 사죄해야 한다고 촉구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총선 당일까지 보수언론들이 앞장서 사건을 재구성하며 확대보도하고 심지어는 엽기적 분위기를 선거일 내내 조장한 것은 전형적인 물타기 저널리즘과 함께 환경감시 역기능까지 선보여 준 한심한 행태다. 의도성이 다분한 뉴스에 많은 유권자들의 눈과 귀가 흐려질 수 있었던 4·11 총선 하루였다.


태그:#수원살인사건, #총선 당일, #조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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