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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치는 동해바다를 가로질러 달려가는 작은 어선에서 삶의 치열함이 엿보인다.
 파도치는 동해바다를 가로질러 달려가는 작은 어선에서 삶의 치열함이 엿보인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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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가 잠시 들른 경유지가 왠지 마음에 들어오는 곳이 있다. 얼마 전 속초를 향해 자전거 여행을 하다가 중간에 마주친 강릉 주문진이 그런 곳 중의 하나. 다음번에 꼭 와서 여유롭게 돌아봐야지 하고 마음먹게 하는 동네다.

주문진 하면 동해 바닷가에 있는 어촌마을로 자연스럽게 항구와 어시장을 떠올리지만, 내 마음속에 들어온 것은 주문진읍이었다. 언덕 위 등대지기님이 사는 아담한 관사 옆의 하얀 주문진 등대에 오르면 장쾌한 동해 바다와 함께 펼쳐진 주문진읍의 풋풋한 언덕 동네가 자꾸만 어른거려 지난 주말(10일) 주문진을 찾아가보았다. 

강릉 기차역에서 내려 애마 자전거를 타고 동해바다 특유의 호쾌한 파도 소리를 응원 삼아 해변 길과 해송 숲 사이 길을 달려 마침내 주문진에 도착했다(고속, 시외버스를 타고 주문진 버스터미널에 내려도 된다). 역시 처음 여행자를 맞아 주는 건 크고 작은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는 항구와 상인들과 손님들로 북적이는 어시장이 있는 강원도의 제1항구 주문진항이다.

빨간 홍게들로 주문진 항구가 더욱 활기차게 느껴진다.
 빨간 홍게들로 주문진 항구가 더욱 활기차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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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제1항구, 주문진항

시장통 어디에선가 배고픈 자전거 여행자를 참을 수 없이 유혹하는 생선구이 냄새가 피어오르고, 게가 제철인지 항구로 들어오는 어선마다 다리가 길고 빨간 게를 담은 통을 어시장으로 부지런히 나른다. 빨강이 홍게들 덕분에 주문진 항구가 더욱 활기차게 느껴진다. 귀항하는 어선들, 수산물 중개인, 도매상,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부산한 풍경이 동해안 어업의 전진 기지답다.

예전엔 커다란 오징어 동상이 있을 정도로 오징어가 많이 잡혔지만 요즘 주문진항에는 오징어보다 홍게와 문어 천지다. 농촌에 농한기가 있다면 어촌에는 어한기가 있다며, 꽁치와 오징어가 올라오는 4월 말부터 항구는 더욱 활기가 넘칠 것이라고 어느 상인분이 말해준다. 

항구 곳곳에는 봄 햇살을 받으며 어망 손질이나 어선 정비를 하는 중장년의 남녀 어민들이 보인다. 햇살에 그을린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파여 있다. 여행자의 눈엔 푸르고 낭만적으로 보이는 동해 바다지만, 그곳에 삶을 의탁하는 사람들에겐 전혀 다른 바다임을 깨닫게 된다. 대야에 담긴 갖가지 물고기들이며 작은 눈에 입 벌린 얼굴이 볼수록 놀라운 가오리…. 촘촘히 이어진 시장 골목길을 돌아다니다 보면, 제법 길어진 하루 해도 짧다.

틈만 나면 탈출하려는 문어의 몸부림이 측은하다.
 틈만 나면 탈출하려는 문어의 몸부림이 측은하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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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운도 없이 인간의 낚시줄에 걸려 잡혀온 범상치 않은 얼굴을 한 문어들이 빨간 대야에서 틈만 나면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홍게, 문어, 광어, 가자미 등 살아 있는 생물들이 이렇게 꿈틀거리는 어시장에 오면 복잡한 심정이 들기도 한다. 잡식동물 인간의 먹거리를 위해 잡혀와 죽음을 맞는 물고기들이 가여워서다.

꼬리 달린 커다란 가오리들이 입을 크게 벌리고 죽어 있는 모습을 대할 땐 더욱 그랬다. 단말마의 표정이 너무도 생생하여 한참을 쳐다보고 있으니 가게의 상인 아주머니가 "앗싸, 가오리" 하고 농치며 웃으시는데 아직 그 뜻을 모르는 난 멋쩍게 "네~" 한다. 여행 중 만나는 여러 시장에서 질펀한 인간의 삶도 배우고 불쌍한 동물들에 대한 '측은지심'도 배우게 된다.

"뭐 드릴까? 싱싱한 회 드시고 가시래요."

그냥 기웃거리는 기색만 비춰도 어김없이 쏟아지는 상인들의 강원도 사투리가 정겹다. 주문진은 어시장만 둘러봐도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곳이다.        

어느 이발소의 간판이 주문진 언덕 동네를 상징하는 듯 하다.
 어느 이발소의 간판이 주문진 언덕 동네를 상징하는 듯 하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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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진은 미용실과 이용소가 공존하는 동네다.
 주문진은 미용실과 이용소가 공존하는 동네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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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운 등대 그리고 해동네 

어시장 안쪽 동네로 들어서면 이젠 주문진항이 아닌 주문진읍의 정경이 펼쳐진다. 관광객이 아닌 주로 주민들이 이용하는 일반 시장이 나타난다. 매 1일과 6일 날 오일장도 열리는데 시장 자체가 커놔서 오일장은 큰 의미가 없단다. '부두떡방앗간'에서 모락모락 나는 떡 냄새가 구수하고 달달하다. 이곳에도 다른 동네처럼 대기업의 계열사 편의점들이 들어서 있지만 아직도 미용실과 이용소가 공존하고 있는 곳이 주문진읍이다.     

'월화이용소', '달동네이용소', '새시대이용소' 등 동네 거리에 재미있고 정겨운 이름의 간판을 단 이용소들이 나타난다. 머리 깎을 일은 없지만 호기심을 못 이기고 여닫이 문을 빼꼼히 열어본다.

언덕위에 서있는 아담한 주문진 등대, 푸른 바다와 언덕 동네를 비추고 있다.
 언덕위에 서있는 아담한 주문진 등대, 푸른 바다와 언덕 동네를 비추고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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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이용소엘 들어가도 초로의 이발사 아저씨가 외지인을 반긴다. 소파에 앉으면 곧 졸음이 몰려올 것 같은 따스한 분위기도 좋았고, 무엇보다 눈에 띈 건 키가 작은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 놓은 작은 판대기. 어릴적 저 위에 올라 앉아 머릴 깎았던 기억이 문득 떠오라 웃음 짓게 한다. 동네 아저씨에서 할아버까지 수십 년 된 단골손님들이 있어 아직도 이런 이용소들이 존재하고 있다.        

항구와 읍에서 멀지 않은 오르막 언덕 위에 주문진 등대가 있다. 옆에 등대지기님의 아담한 사택과 함께 몸통 전체가 하얀색으로 칠해져 정갈해 보이는 이 등대는 1918년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등대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툭 트인 하늘빛 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망망대해 너머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리면 등대는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바로 주문진읍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언덕동네. 보통 이런 곳을 달동네라고 부르지만 바다가 보이는 이 언덕동네는 '해동네'가 아닐지 싶다. 아침마다 집들의 지붕 위로, 마당 안으로 바다에서 떠오른 붉은 태양이 비쳐줄 것을 상상하니 숙소를 찾아 하루 묵어가게 되기도 한다.

민물과 바닷물이 공존하는 호수 향호

주문진 주민들이 산책하러 오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향호'
 주문진 주민들이 산책하러 오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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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진 언덕동네 골목을 구불구불 내려와 다시 바닷가로 들어서 북쪽을 향해 가본다. 주문진 주민들의 산책 코스로 사랑을 받고 있는 향호라는 호수를 보러 가는 길. 해변에 서 있는 묘한 생김새의 아들바위를 지나면 파도가 조각해 놓은 작은 돌들이 무성히 솟아난 소돌해변이 나타나 심심하지 않은 바닷길이다. 정말 봄이 코앞에 왔는지 바람을 타고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의 하얀 포말이 솜사탕처럼 포근하게 느껴진다.

주문진읍 향호리에 있는 향호는 고려 충선왕 때 동해사면을 흐르는 계곡의 하류와 동해안의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에 향나무를 묻는 매향의 풍습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강변에 피어난 갈대숲 사이 산책로로 몇 몇 주민들이 여유로이 걷고 있는 풍경이 아지랑이처럼 나른하게 느껴진다. 방금까지 지나온 바다 바로 옆에 이런 호수가 있다는 게 영 실감이 나질 않는다.  

호수 주변 나무 팻말에 '바우길 13구간 - 향호 바람의 길(14km)'이라고 써 있다. 어쩐지 계절을 느끼며 걷기 참 좋은 길이다 싶었다. 인적이 드물긴 저 앞의 바다도 마찬가지지만 향호에서는 파도마저 치지 않으니 철새들의 날개짓 소리만 들려올 뿐 참으로 고요하다. 겨울을 걷어 내려는 부드러운 바람이 바다에서 불어오면 응대라도 하듯이 호숫가의 드넓은 갈대숲이 합창을 한다. 한동안 주문진의 매력속에 푹 빠져 지낼 것 같다.


태그:#주문진, #향호, #동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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