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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포트 평전> 겉표지
 <폴 포트 평전> 겉표지
ⓒ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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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걱정이 되는 젊은이가 있었다. 어렵게 국비장학생으로 유학을 왔지만 공부엔 흥미를 잃고 학년말 시험에서도 떨어졌다. 그러다 인생을 걸고 추구할 이상을 발견했다. 함께 할 동료들과 조직을 꾸리고 목숨의 위협도 감수하며 이상의 실현을 위해 헌신했다. 마침내 그 노력과 시대의 도움으로 이상을 현실화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상은 끔직한 재앙이 됐다. 이상의 실현 과정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죽음과 고통으로 내몰렸다.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대참사의 기획자로 기억되는 캄보디아 크메르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1925~1998)의 이야기다.

'킬링필드'라는 반공 선전물로 과거 한 때 널리 애용됐던 대상이기도 하다. 뒤늦게 그 책임자인 폴 포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상이 꼭 긍정적인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폴 포트의 무장단체 크메르루즈는 캄보디아를 3년 9개월간 통치했다. 개인의 야욕을 위해 부패한 독재정권으로만 보기엔 짧은 기간이다. 캄보디아를 피로 물들인 비극의 씨앗은 분명 평등사회의 구현이라는 숭고한 이상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집어든 책이 필립 쇼트가 쓴 '대참사의 해부'라는 부제를 단 <폴 포트 평전>이었다.

프랑스 유학을 통해 얻은 비타협적인 평등사회의 이상

본명이 살로트 소르였던 폴 포트가 평등사회의 실현이라는 이상을 갖게 된 것은 파리 유학시절이었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캄보디아 유학생들에게 식민주의를 반대했던 프랑스 공산당은 친구로 여겨졌다.

폴 포트는 1951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면서 훗날 캄보디아를 통치할 크메르루주의 이념적 토대를 얻는다. 그건 마르크스주의라기 보다는 당시 프랑스 공산당의 공식이념인 스탈린주의였다.

뒷날 폴 포트는 "두꺼운 마르크스의 책들을 읽기는 했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실토했다.(p.133) 그보다 스탈린이 쓴 <소련 공산당의 역사>가 이해하기 훨씬 쉬었고 영향도 컸다. 스탈린 이 책에서 "승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탈당자들, 범죄자들, 반역자들의 최후의 거점과 지도부를 숙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보다 더 큰 영향을 받았던 것은 폴이 50년 뒤에도 유학시절 읽은 책으로 유일하게 기억한 크로프트킨의 <프랑스대혁명>이었다(p.144). 거기서 그는 세 가지 핵심내용을 얻었다. 혁명을 위해서는 지식인과 농민이 연대해야 하고, 혁명은 타협이나 중단 없이 끝까지 진행되어야 하며, 평등주의가 공산주의의 원칙이라는 것이었다.

아마 크로프트킨이 쓴 이 구절도 큰 영향을 줬을 것이다.

"혁명은 중도에 멈추면 안 된다.  멈추면 분명 실패한다. 일어난 혁명은 극한까지 진행되어야 한다."

폭력혁명과 불교식 금욕이 바탕된 크메르루즈

혁명의 이상으로 무장한 폴 포트는 1953년 조국으로 돌아와 무장 저항조직 활동을 하며, 1960년대부터 캄푸치아 노동당을 이끈다. 캄푸치아 노동당은 강령에 노동자 계급의 정당이라고 했지만, 후진농업국가에서 영세농민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지도세력 자체가 노동자의 삶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농민이거나 농민 출신 학생이었다.

마르크스에게 농민은 봉건적인 존재였다. 농민이 진보된 프롤레타리아의 특성을 가지려면 경제적 역할이 바뀌어야 했다. 폴 포트는 이러한 난제를 마오쩌둥이 마르크스주의를 중국 유교식으로 변형한 것과 비슷하게 불교식으로 변형해 해결했다. 의식(意識)을 중요시하는 소승불교의 전통에서 영감을 얻어, 농민을 프롤레타리아화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의식이 필요하다고 봤다. 이로써 개인은 출신성분과 경제적 지위에 상관없이 "프롤레타리아 의식"이 만들진다는 개념이 캄보디아 공산주의의 요체가 됐다.(p.289)

불교국가였던 캄보디아에서 폴도 어려서 사미승 수도생활을 했었고, 평당원들도 소승불교에 익숙해서 불교식 개념은 받아들이기에 쉬웠다. 또한, 노동당의 활동자체가 승려의 수도 생활처럼 기율과 금욕을 중시했다. 이렇게 프랑스대혁명과 스탈린과 불교가 어우러져 폭력혁명을 통해 순수한 평등을 꿈꾸는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가 형성됐다.

순수한 이상사회를 꿈꾸었던 폴 포트

크메르루즈는 1975년 4월 17일 수도 프놈펜을 장악하며 통치권을 확보한다. 이 과정엔 미국의 기여(?)도 컸다. 1970년 캄보디아에서는 국방장관이던 론 놀이 미국에 기대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베트남 공산세력과 싸우고 있던 미국은 론 놀 정권을 지지했고, 공산세력을 내몰기 위해 캄보디아 전역을 B-52로 폭격했다. 사람들은 폭격을 피해 도시로 몰려들거나 밀림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B-52의 폭격으로 가족과 집을 잃은 농민들은 자연스레 크메르루즈 편이 됐다.(p.422)

초기의 크메르루즈는 '과일을 따면 과일값을 나무 둥치에 남겨 놓았어요'라는 진술처럼 관대하고 친절했으며, 온건한 정책으로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세력을 확장해왔다. 그러나 캄보디아를 장악해 나가면서 점점 더 과격해졌다.

그 배경엔 도시민은 타락했고 농민은 순결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폴과 그의 동료들은 이미 1971년 '해방구역' 내 도심지에서 술집, 매음굴, 도박장 같은 예전의 자본주의적 악습이 빠르게 되살아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폴은 "그토록 많은 희생을 치렀는데도 자본가들이 여전히 득세한다면, 혁명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라며 "상인들을 들판에서 일하게 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결론 내렸다.

크메르루즈 간부들도 프놈펜의 사치스러운 모습에 분노하며 "프놈펜은 돈이 있기 때문에 망가졌습니다. 도시는 개조될 수 없지만 인간은 개조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지어봐야 농사일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됩니다"라고 말했다.(p.517)

1972년 이후 크메르루즈 정책의 최우선 목표는 캄보디아 사회 전체를 외부세계에 오염되지 않은 토착농민들처럼 개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974년 당 중앙위원회가 프놈펜을 비롯한 캄보디아 내 모든 도시는 해방시키는 즉시 소개하고, 도시민은 시골로 보내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기도 했지만 대참사의 시작점이기도 했다.(p.491)

250만 명이 넘는 프놈펜 시민을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의료 시설이나 교통수단, 식량지원에 대한 계획도 없이 단시간에 혼잡한 도시 밖으로 소개하는 일은 엄청난 고통을 초래하는 일이었다. 프놈펜의 병원도 소개됐고, 2만 명의 환자도 마찬가지로 병든 몸을 이끌고 이주 행렬에 나서야 했다. 더구나 4월은 캄보디아에서 가장 무더운 달이다. 도시 소개는 그 자체로 참극이었다. 수만명이 이동중에 죽었고, 도시 이주민들은 낯선 농촌에서 오염된 주민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전쟁을 하듯 이상사회 건설을 몰아붙이다

미군의 폭격이 예상된다는 이유로 프놈펜 소개는 급작스레 진행됐지만, 이는 핑계였다. 도시소개의 또 다른 목적은 구 정권세력의 지지기반을 확실히 제거하고, 도시민을 농업 생산에 끌어들이려는 것이었다.(p.549)

폴 포트는 새로운 캄보디아를 건설할 기반으로 농업을 중요시했고, 외부의 원조에 의지하기보다는 국내자원을 이용하는 자급자족적인 경제정책을 계획했다.

1976년 서구의 우파 사회과학자들은 태국으로부터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고서, 당시에 캄보디아에서 시행하고 있던 급진적인 조치와 다름없는 정책을 제안했다. 도시민들을 지방으로 재배치하고, 부유층에게서 비생산적인 재산을 압수하며, 농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라고 한 것이다.(p.554)

캄보디아의 문제는 정책이 아니라 이행방식에 있었다. 불합리하고 공상적이며 그저 잔혹하고 몰인정했다. 캄보디아 공산지도자들은 모법적인 혁명을 꿈꾸면서도 단 한번도 혁명이 가능한 사회적 조건에 대해 연구하지 않았다.(p.285) 폴은 전쟁을 수행한 것과 똑같이 "사회주의를 건설"하자고 했다.(p.561)

물질적, 정신적 사유재산을 모두 없애면 인민이 평등해진다는 믿음아래 모든 국민을 집단농장으로 내몰았다. 폴 포트는 "뛰어난 정치의식을 지니면 모든 것을 빠르게 배울 수 있다"며 기존의 전문 기술도 무시하고, 의사, 교사, 전기기사, 상선 선원, 심지어 공장노동자까지 집단 농장으로 보냈다. 그렇기에 농업을 위해 전국적인 관개사업에 몰두했지만, 대부분의 댐은 개울에 만든 작은 댐과 똑같은 원리로 지을 수밖에 없었고 붕괴하기 일쑤였다.

획일화 된 캄보디아 인민의 삶

도시소개로 농촌의 노동력은 어느 때보다 많았지만 백만명이 기근에 시달렸다. 이전엔 연간 2백만 톤의 쌀을 수출하는 국가였지만, 1975~76년에는 여분의 쌀이 전혀 없었고, 1977년에야 쌀 수만 톤을 수출할 뿐이었다. 굶주림에 시달리거나 일할 동기가 부족했기에 집단농장의 수확량이 예전보다 떨어졌기 때문이다.(p.668)

캄보디아 국민의 삶도 무섭게 획일화되었다. 모두가 검정색 옷만을 입어야 했고 무엇을 먹고, 언제 잠을 자며, 어디에서 살고, 심지어 누구와 결혼할지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다. 결혼식은 최소 10쌍을 모아 합동결혼식으로 정부기관 주관으로 치러졌다.

보통 일주일에 두 번 열리는 생활모임 시간엔 자아비판이 강요됐다. 고참 지도부의 지휘하에 각자 자신이 잘못한 일과 최근에 한 활동을 공개적으로 자백했다.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크메르루즈의 모든 간부들이 참여했다. 이 과정의 핵심요소는 상호 감시와 고발이기 때문에 서로 계속 경계하고 의심해야 했다.(p.448)
 
폴은 자신이 공익을 위해 일하면, 조만간 모두가 자신의 뜻을 알아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1978년이 되자 크메르루즈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국민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가족끼리 개별적인 식사를 허용하고, 다양한 색상의 옷을 입어도 좋다는 조치가 시행됐다. 동시에 집권이래 최대의 숙청 작업도 진행해 수만 명이 처형당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이듬해인 1979년 1월 중국과 분쟁 중이던 베트남이 중국의 영향아래 있던 캄보디아를 공격 프놈펜을 함락시켰다. 폴포트는 다시 지방으로 쫓겨 가 저항을 했지만 예전의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1997년 7월 종신형을 선고받고 9개월 뒤 잠을 자던 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선전용도로 과장된 크메르루주의 참극

저자 필립쇼트는 1975년 4월부터 1979년 1월까지 약 3년여의 폴 포트 집권기간 동안 캄보디아 인구 7백만 명 가운데 1백5십만 명이 희생당했다고 추정한다. 이중 상당 수는 숙청이었고, 나머지는 강제노동 속에 질병과 기아 등으로 사망했다.

그런데 이건 글자 그대로 추정이다. 당시의 희생자 수는 적게는 2십5만에서 많게는 3백만 명으로 편차가 매우 크다. 당연히 제대로 된 통계가 있을 리 없고, 저자도 그냥 그 중간으로 1백5십만 명으로 추정하면서 이보다 적으리라고 말한다. 크메르루즈는 공산주의의 참상을 알리는 가장 좋은 선전 대상이었기에 그 피해도 과장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미군의 폭격과 정부군에 의한 희생도 매우 컸을 것이다.

게다가, 1972년 후반까지 극악무도한 행동의 주체는 거의 친미 정부군이었다. 정부군은 공산군의 머리를 잘라오면 보상을 받았기에 일반주민까지 죽이곤 했다. 그래서 나중엔 잘린 머리와 함께 소총도 가져오는 것으로 정책이 바뀌었다. 이에 맞서 크메르루즈군도 1973년부터 정부군 포로를 살해하는 행동을 체계적으로 벌인다. 전쟁은 그렇게 서로를 야만적으로 만들어 갔기에 크메르루즈만 더 잔혹했다고 할 수는 없다.

크메르루즈가 보인 비극은 잔인성이라기보다는 이상의 과격한 추진이었고, 또 그 이상 때문에 잔혹했다는 점이다. 한참이나 철지난 폴 포트 평전을 손에 든 것도 때늦은 이념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이상이 고결할수록 오히려 치명적일 수도 있음을 알고 싶어서였다.

이상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폴 포트는 어떤 면에서 행운아다. 결과야 어떻든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가졌기에 말이다. 요즘 현실에선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갖기란 '1%'가 되는 것만큼 힘든 일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상을 포기할건가. 삶이 힘들다고, 아니 힘들기에 이상은 소중하다. 우리가 사회적 활동을 하는 동기는 이상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상이 있기에 동료와 함께 하고 모임을 만들고 조직과 일에 헌신한다.

그 과정에서 이상에 대한 열망이 클수록 실현을 위한 강박관념이 자리 잡는다. 이상이라는 목표로 가기 위해선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강박이 강해지고 태도도 경직된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동료의 행동도 이 틀에서 간섭하고 통제하려 든다.

우린 과거에 이런 교조적이고 관념적이라고 비판받는 조직들을 봐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이상때문에 혼탁한(?) 사회로부터 고립돼 갔다.

내가 가진 이상이 의무에 대한 강박으로 경직되고 순수하지 못해 보이는 주변과 고립되기만 한다면, 이상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상은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함이지 경직되고 고립되기 위함이 아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나는 이상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강박관념만 남은 것이다.

나의 이상이 그런 것이라면 폴 포트는 주변에 재앙을 줬지만, 요즘 시대에는 나에게 재앙이 될 뿐이다. 그래서 삶엔 성찰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 참고 : 괄호 안의 p는 책의 관련 페이지
<폴 포트 평전> (필립 쇼트 씀 | 이혜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8.11 | 2만3900원)



폴 포트 평전 - 대참사의 해부

필립 쇼트 지음, 이혜선 옮김, 실천문학사(2008)


태그:#폴 포트, #크메르루즈, #이상주의, #강박관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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