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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현실에 대한 외면 

2010년 10월, 나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칼럼난에 <사회적 관심이 거세된 교회언론>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에도 구체적으로 적시되어 있지만, 교회언론들의 사회에 대한 무관심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사회현실은 교회와 전혀 관련이 없다는, 더 나아가 교회는 사회와 유리된 시공간 속에서 존재한다는 메시지를 계속적으로 발현하고 있는 양상이다.

교회언론들은 제호에 '신문'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신문'이라는 말 속에는 '언론'의 뜻이 함축되어 있을 것으로 믿는다. 교회언론들은 그것을 스스로 부정한다. 신문은 그저 '소식전달자' 역할로 만족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도 교회 소식지 특성에 맞게 제한적이고 선별적인 교회 소식을 전하는 것이 소임의 전부라고 강변하는 듯하다. 언론의 포괄적인 의미를 놓고 본다면 교회언론들이 제호에 '신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부터 어색하게 느껴진다.

'생명평화미사' 후 해군기지(미군기지) 건설공사장 입구에서 '153배'를 하는 천주교 신부, 수도자, 신자들
▲ 2월 21일 오후의 153배 '생명평화미사' 후 해군기지(미군기지) 건설공사장 입구에서 '153배'를 하는 천주교 신부, 수도자, 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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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교회언론들이 보여주는 교회소식지 양상은 오늘의 한국교회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사회에 대한 교회의 무감각과 무관심을 교회언론들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더 나아가 교회언론들은 제도권 안에서 순응적 자세로만 일관하며 적절히 '알아서 기는' 행태를 잘 보여준다.

사회현실에 대한 교회의 무감각과 무관심은 그대로 무책임 성격을 내포한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갖가지 문제들에 대한 외면과 기피, 무감각과 무관심은 결국 무책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무책임은 책임이 없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 아니다. 마땅히 담당해야 할 책무를 기피하거나 외면한 '죄과'를 이르는 말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무책임이라는 이름의 '죄과'를 만들어가고 있음이 명백하다.

나는 교회가 사회현실과 유리된 공간에서 존재하는 게 아님을 굳게 믿는다. 교회는 세상 속에 존재하며, 이 세상 안에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실현시킬 책무를 지니고 있음을 또한 굳게 믿는다. 이런 단순하고도 명확한 신앙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왔고,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교회는 사회현실에 대해 무감각해서도 안 되고 무관심해서도 안 되며, 무책임적인 모습으로 일관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사회현실에 대해 눈감고 외면하며 침묵을 고수하는 것은  교회답지 않은 모습이다.

기존의 교회언론, 화려함 속의 적막함

오늘날 한국교회가 견지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무감각과 무관심과 무책임, 그 '삼무(三無)' 현상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만큼 그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도 크고,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지는 유치한 논쟁도 무성하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제시하는 사안들에 곧잘 이념 문제가 결부되고 개개인의 관점이 무제한적으로 중첩되는 현상은 어지럽기까지 하다.

그러한 사정을 교회가 잘 알고 있기에 교회의 '삼무현상'은 어쩔 수 없는 필요선택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교회 안의 분란을 키우지 않으려는 의도에다가 교회의 일부 장상들과 성직자들의 수구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이나 체질이 결합해서 오늘의 삼무현상은 더욱 견고한 양상을 보인다는 생각이다.

교회의 전반적인 양상은 그렇다 하더라도 교회언론들이 좀 더 융통성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교회의 삼무현상을 어느 정도는 완화시켜 줄 수도 있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교회언론들은 한마디로 평안하면서도 적막하다. 평화와 활기와 축복이 지면마다 넘친다. 축복받은 교회의 모습만이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하지만 그것은 적막의 또 다른 모습이다.

'종교친우회 서울모임(퀘이커) 회원인 오철근 선생(64)의 '삼보일배'는 이 날도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공사장 정문 앞에서 계속되었다. 서울에서 제주 강정을 지키기 위해 내려가신 분으로 100일이 넘도록 '삼보일배'를 계속하고 있다.
▲ 피땀과 함께 하는 삼보일배 '종교친우회 서울모임(퀘이커) 회원인 오철근 선생(64)의 '삼보일배'는 이 날도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공사장 정문 앞에서 계속되었다. 서울에서 제주 강정을 지키기 위해 내려가신 분으로 100일이 넘도록 '삼보일배'를 계속하고 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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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언론들, 즉 인쇄매체들의 풍요와 화려함 속에 내재해 있는 그 '적막감'을 인터넷 매체인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해소하는 이들이 많다. 기존 언론들이 불식하지 못하는 적막감 때문에 대안언론을 찾는 이들이 나날이 늘고 있다. 대안언론의 태동과 존재는 필연적으로 교회와 기존의 교회언론이 빚어낸 산물이다.      
           
하지만 교회 대안언론의 영향력은 아직 신자대중에게 크게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 기존의 교회언론들에서 해소하지 못하는 갈증이나 적막감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같은 대안언론에서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는 다행스러움 속에서 큰 가능성도 감지하게 되지만, 아직은 영향력이 기존의 교회언론들을 능가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교회 대안언론의 위상이나 존재가치는 앞으로 점점 확대되리라 확신한다. 또한 대안언론의 역할이 커질수록 기존의 교회언론들이 지니고 있는 '풍요로움 속의 적막감'은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기존의 교회언론들은 필자가 말하는 '풍요로움 속의 적막감'이 무엇인지를 깊이 헤아려야 한다. 그동안 사회적 관심을 크게 증폭시킨 여러 가지 일들, 가톨릭교회 성직자들과 신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의미 있는 일들에 대해 기존의 교회언론들은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문규현 전종훈 신부와 수경 스님이 2년 동안 함께 했던 '오체투지 순례기도', 참사 현장에서 일 년 동안 매일 저녁 거행되었던 '용산미사', 또 일 년 동안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매주 월요일 저녁 거행되었던 '생명평화미사'와 전국 각지에서 여러 차례 봉헌된 대규모 '생명평화미사'에 대해서도 기존의 교회언론들은 한 번도 심층보도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

기존의 교회언론, 조중동 성격으로 분류되는 현실

지금 이 시각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미군기지) 건설공사장 정문 앞에서 거행되고 있는 '생명평화미사'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 제주교구 신자들과 육지교구의 신자들이 매일 오전 11시(월요일은 오전 11시와 오후 4시) 거행하고 있는 생명평화미사도 기존의 교회언론들에는 전혀 뉴스거리가 아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주교회의 의장은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다. 그동안 강우일 주교는 한국주교회의 의장 자격으로 4대강 파괴사업에 대해,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에 대해, 또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문제에 대해 매우 심도 있는 메시지를 발표해왔다. 그 메시지의 상세한 내용과 해설기사 같은 것을 기존의 교회언론에서는 한 번도 접할 수가 없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주교회의 의장의 공식 발표문을 교회언론들은 왜 지면에 충실히 반영하지 않고 외면하는지 실로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강정마을 해군기지(미군기지) 건설공사장 앞에서 ‘생명평화미사’를 집전하시며 강론을 하시는 한국주교회의 의장 겸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
▲ 강우일 주교 강정마을 해군기지(미군기지) 건설공사장 앞에서 ‘생명평화미사’를 집전하시며 강론을 하시는 한국주교회의 의장 겸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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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같은 대안언론이 없었다면 어디에 가서 한국주교회의 의장의 공식 발표문을 접할 수 있으랴. 그 사실은 그대로 큰 다행스러움과 큰 비애를 동시에 안겨준다. 한국주교회의 의장의 공식 발표문조차 제대로 소개하지 않고 해설기사 한번 내지 않는 교회신문들이 과연 존재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일까?

필자는 최근 제주 강정마을을 다녀왔다. 해군기지 공사장 정문 앞에서 거행된 '생명평화미사'에 세 번 참례했고, '153배'에 두 번 참여했다. 21일에는 비를 맞으며 미사를 지내고 나서 계속 비가 내리는 관계로 153배 대신 묵주기도 15단을 바쳤다. 고작 이틀 동안 머물렀지만 실로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겪으며 실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때 괜한 생각을 또 한 번 했다. 기존의 교회언론들이 제주 강정을 지면에 담아줄 수는 없는 것일까. 해군기지(미군기지) 건설에 대한 찬반 논의는 별개로 치고, 그것과 별도로 강정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단순보도 차원만으로도 보도할 수는 있지 않을까?

내가 그런 말을 뇌까렸을 때 일행 중의 한 분이 재미있는 말을 했다. "기존의 교회언론들은 조중동과 같은 성격의 신문들인데, 그런 보도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나 다름없지요"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또 한 분은 예전에 교회 신문들의 구독을 끊었음을 밝히면서 더욱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과거 우리 본당에서 내 대자들과 주변의 많은 신자들에게 권유를 하여 두 신문의 구독자를 수십 명씩 늘려주었던 이력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꼭 조중동 독자를 늘려준 것 같아 떨떠름하고 후회가 돼요."라고.

기존의 교회언론들이 조중동처럼 수구적 편향보도와 왜곡보도를 일삼고 기득권 수호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뜻으로 조중동과 비교를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사회현실에 무감각 무관심하고, 기피와 외면을 관성화해 가는 것은 조중동과 비슷한 일면이다. 이 점을 기존의 교회언론들은 깊이 헤아리며 자성을 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가톨릭교회,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 #교회언론 , #강우일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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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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