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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의 자식이라고 설움 받던 배다른 누이의 입방정

시절이 하수상하다. 선비들은 외출을 삼갔고 백성들은 입을 닫았다. 어느 구름에서 비가 내릴지 모르고 어느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칠지 모른다. 운종가 시전에만 사람이 조금 보일뿐 도성이 한산하다. 정보(鄭保)가 누이 집을 찾았다.

"한 승지는 어디 갔는가?"
"죄인을 국문하느라 대궐에 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모처럼 오라비를 맞은 누이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그들이 무슨 죄인인가? 한 승지가 만일 그 사람들을 죽이면 만고의 죄인이 될 걸세."
"그 사람이 무슨 힘이 있다고 사람을 죽이고 말고 합니까?"
"이 사람이 뭘 모르고 있군, 장안의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그 사람이 쥐고 있다는 소문이 도성에 파다한데 자네만 모르고 있군."
"오라버님도, 참. 시절이 어수선할 때는 거저 입조심이 최고입니다."

정보와 누이는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가 다르다. 정보의 서매 즉, 배다른 누이를 한명회가 꿰찼다. 첩의 딸로 태어나 첩이 된 것이다.

"거 쓸데없는 소리 말라우야, 내 입 가지고 말도 못한단 말이가?"

괄괄한 성미의 정보가 숨 돌릴 겨를 없이 강한 평안도 사투리를 거칠게 내뱉었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날까봐 그러지요."

누이가 눈을 흘겼다.

"니도 그놈의 녹을 받아먹더니만 달라졌구만이야."
"그놈이라니요? 남들이 들을까봐 두렵습니다."
"들으라면 들으라지, 내가 뭐 허튼 소리했나?"

정보가 자리에 앉지도 앉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가버렸다. 주안상을 준비하려던 누이는 골목길로 사라지는 오라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내밀었다.

승진하는 것은 알바아니지만 녹봉이 더 들어오는 것은 대박

땅거미가 짙어갈 무렵, 한명회가 퇴청하여 돌아왔다.

"영감은 언제 진짜 영감 소리를 듣수?"
"거야, 도승지가 되면 듣게 되겠지..."
"내야 도승지가 되던 소도둑이 되던 알바 아니지만 녹이 언제 더 들어 오냐 그 말 입니다용."
"그렇게 갖다 주었는데도 녹타령인가?"
"다다익선이라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 호호호."
"이제 바리바리 갖다 주는 자들이 있을 걸세."
"'그놈 녹을 받아먹더니만 변했다.'고 구박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왕 욕먹을 바에는 많이 받고 싶습니다."
"누가?"
"오라비가 다녀갔습니다."
"전하를 그 놈이라고 하던가?"
"네."

말은 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다. 누이가 손으로 입을 막은 것과 동시에 한명회가 일어났다.
언제부터인가. 뭇사람들이 자신을 '칠삭동이.' '꼽추.' '사람 잡는 백정.' 이라는 험담과 비아양으로 심기를 자극해도 못들은 척 대범하게 흘려보내지만 자신이 주군으로 모시는 수양을 비하하고 모독하는 말을 들었을 때 참지 못하는 사람으로 변한 자신을 보고 놀랐다. 허나, 후회는 없었다.

주군을 모독한자는 용서하지 않겠다, 언제 이렇게 변했나?

남자와 여자가 혼인하거나 관계를 맺으면 동격이 된다. 본인이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타인들이 그렇게 본다. 그래서 평범한 여자가 임금과 관계를 맺으면 후궁이 되고 승은을 입으면 귀인이나 빈이 되어 만인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임금과 동격이기 때문이다.

정보는 자신의 서매와 관계를 맺은 한명회를 별로 좋게 보지 않았다. 첩의 딸과 운우의 정을 맺은 그 남자 역시, 그렇고 그런 부류이며 군자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수양의 장자방이 되어 장안을 휘젓고 다니니 명례궁의 개 취급했던 것이다.

정보의 언행을 괘씸하게 여긴 한명회가 입궐하여 수양에게 고했다. 평소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을 얼매(孽妹)라고 차별한 정보에 대한 사적인 감정도 작용했다.

"정보가 전하를 감히 자(者)라고 막말을 하였습니다."
"이런 고얀 놈이 있는가? 그 놈을 당장 잡아 들여라."

정보가 잡혀왔다.

"네 놈이 정녕 그 말을 했느냐?"
"평소에 성삼문, 박팽년을 성인군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 소신에는 변함이 없느냐?"
"한 번 성인은 영원히 성인이고 군자는 영원히 군자입니다."

정조의 기개는 꼿꼿했다.

"생각을 바꾸면 살려줄 수 있다."
"없습니다."
"진정이냐?"
"네."
"저놈을 당장 능지처사에 처하라."

발끈한 수양의 명이 떨어졌다. 형졸들이 정보를 끌고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수양이 한명회에게 물었다.

"저 자는 어느 집 자손인가?"
"정몽주의 손자입니다."
"뭣이라고? 그 얘기를 왜 이제 말하는가?"

수양이 자신의 명을 수정했다. 굴욕이다.

'고려 충신의 후손 우대하라' 이면에 숨겨진 계략

문종 1년, 임금이 도승지 이계전을 불렀다.

"고려 5백 년을 돌이켜보면 정몽주와 길재의 충절이 남보다 뛰어났으므로 옛날 우리 태종께서 정몽주를 추시하셨고 길재를 복호하시었다. 그 후손으로 지금 살아 있는 자는 몇 사람이나 있는가?"
"정몽주의 아들 정종성과 정종본은 모두 죽었고 정종성의 아들 정보가 있습니다."
"그 자를 서용하라."

문종의 특별 배려로 예안 현감이 된 정보는 수양에 의해 김종서가 참살 당하자 관직을 집어 던지고 백수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김종서 당파도 아니고 성삼문의 조직도 아니었다. 그저 비분강개하여 관직을 버린 것이다.

"충신의 후손이니 특별히 사형을 감하라."

건국 시기. 자신의 할아버지 태종에 의해 격살되었지만 태종이 당대에 충신으로 추증시키며 '나는 죽였으되 너희들은 포은처럼 충성하라.'는 태종의 용병술을 닮고 싶었다. 허나 의금부에서 반대하고 나섰다.

"정보가 역신 성삼문을 옳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베어야 하고 가산을 적몰하여야 합니다."
"장(杖) 1백 대를 때려 연일현 고을의 종으로 영속시키라."

수양이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충성경쟁에 돌입한 사정기관의 질주를 수양도 제어 하지 못했다. 맹목적인 충성에 탄력이 붙으면 최고 권력자도 통제하기 어렵다. 지평 김달전이 사헌부의 뜻을 가지고 아뢰었다.

"정보가 불충을 범했는데 형벌이 적당하지 않습니다."
"충신의 후손이니 죽이는 것은 불가하다."
"정보의 말이 간당을 두둔하였으니 청컨대 그 죄를 바로잡아 극형에 처하소서."
"적몰된 정보의 집은 전 소윤(少尹) 윤사흔에게 주고 더 이상 논하지 말라."

먹물들은 가라, 훈민정음 창제의 산실 집현전 없애라

가까스로 수습한 수양이 대소신료를 소집했다. 살육 후속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다. 영의정 정인지, 좌찬성 윤사로, 우찬성 정창손, 좌참찬 강맹경, 공조판서 김하, 호조판서 이인손, 병조판서 신숙주, 예조판서 박중손, 형조판서 성봉조, 병조참판 홍달손, 호조참판 홍원용, 예조참판 홍윤성, 이조참판 어효첨, 대사헌 신석조, 의금부 도제조 파평군 윤암, 장령 최청강이 속속 입궐했다.

"정창손은 좌익 삼등에서 이등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더하고 김질은 특별히 죄를 사(赦)하여 공신으로 삼아 좌익 삼등으로 추록하고 판 군기감사를 제수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정창손의 목소리가 유난히 컸다. 한명회의 각본에 따라 움직였지만 칼 날 위에서 춤을 춘 것 같고 지옥과 천당을 다녀온 심정이었다.

"박팽년의 아내 옥금과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 아내 내은비와 딸 내은금, 첩의 딸 한금은 영의정 정인지에게 주고 성삼문의 아내 차산과 딸 효옥은 박종우에게 주라. 또한 삼문의 아우 성삼고의 아내 사금 및 한 살 된 딸은 우찬성 정창손에게 주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합니다."

제일 많은 사람을 내려 받은 정인지가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지아비를 죽음으로 내 몬 자의 여자가 돼야 하는 여인의 슬픔. 말해 무엇하랴.

"지금 금성대군 이유를 경상도 순흥, 한남군 이어를 함양, 화의군 이영을 전라도 금산, 영풍군 이전을 임실, 영양위 정종을 광주에 안치하니 그 고을의 수령에게 난간과 담장을 될 수 있는 대로 높고 견고하게 하고 내려간 뒤에는 외간 사람들과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소서."

의금부 도제조가 계청했다.

"그리 하도록 하라."
"무녀 용안이 '상왕께서 금년에 복위하시는 기쁜 일이 있다.'고 요설을 퍼뜨렸으니 그 죄는 능지처사에 해당합니다."
"아뢴 데로 하여라."

애꿎은 무당이 사지가 찢어지는 참변을 당했다.

"집현전은 역도들의 소굴입니다. 혁파하소서."
"집현전을 파하고 그곳에 있는 서책은 예문관으로 옮겨라."

훈민정음의 산실 집현전이 한글을 창제한 군주의 아들에 의해 폐쇄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명나라 사신 운봉이 떠났다. 수양이 자행한 대학살을 현지에서 묵인해준 꼴이다. 수양이 직접 모화관에 나아가 전송하고 우의정 이사철, 호조판서 이인손, 도승지 박원형으로 하여금 벽제역에 나가 전송하도록 했다.

대궐에서 부르기만 해도 간이 콩알만 해지는 왕비의 아버지

상왕의 처가에 대전 승전색이 들이닥쳤다.

"판돈녕부사 송현수는 들라 이르십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올 것이 왔다라고 생각한 송현수는 망연자실했다. 끌려가 곤욕을 당하느니 자결할까 생각하던 송현수의 머리에 번개처럼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죄를 물으려면 의금부에서 나와야 하는데 왜 대전 내관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없었으나 불길한 생각은 점점 엷어졌다. 행장을 갖추어 급하게 입궐했다.

"어서오시오. 여량군!"

군신(君臣)간으로 따지면 신하이지만 사돈으로 예우했다. 그 자리에는 임영대군 이구, 계양군 이증, 의창군 이공, 밀성군 이침, 연창위 안맹담과 우의정 이사철, 운성 부원군 박종우, 진무 황치신과 봉석주, 병조참판 홍달손과 승지 여러 명이 함께 있었다.

"역신들의 흉계를 처음 들었을 때에는 염려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했으나 그 규모를 파헤쳐보니 놀랍고도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옛 부터 역신은 있었으나 오늘과 같이 그 규모와 조직이 막강한 적은 없었다. 다행히 그 흉계가 미수에 그쳤으니 어찌 하늘의 도움이라 아니하겠느냐? 오늘같이 기쁜 날, 여러분과 한 잔 마시고 싶다. 술자리를 마련하라."

전악서 악공들의 풍악이 울렸다. 수양이 나인으로 하여금 송현수에게 술을 부어 올리게 하고 그 손을 잡았다.

"조정에서 모두 경이 역당의 모의에 참여하였으리라고 의심하였으나 과인이 듣지 아니한 것은 경이 나의 옛 친구인 까닭입니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왕비의 아버지 송현수가 머리를 조아렸다.


태그:#수양대군, #박팽년, #한명회, #성삼문, #금성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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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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