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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터
▲ 벽제관 옛터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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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사로 북경에 들어간 김유례로부터 장계가 올라왔다. '숙부 수양에게 선위하니 윤허해 달라'는 조선국왕 이홍위의 주청을 접수한 명나라가 윤봉과 김흥을 고명사신으로 파견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보고를 받은 조정은 환희로 들떴다.

정통성에 문제가 있어도 상국 명나라가 인정해주면 덮고 갈 수 있다. 내부적인 반발은 밟고 지나가면 되고 저항하면 베면 된다. 도둑놈 제발 저리 듯 도덕성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새로운 왕을 인정해준다니 명나라가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하늘처럼 은혜로웠고 아버지처럼 너그러워 보였다. 그 공식문서를 가지고 사신이 들어온다니 왕실과 조정이 술렁거렸다.

수양은 우참찬 황수신을 원접사로 임명하고 동지돈녕부사 심회를 안주에, 이조참판 어효첨을 평양에, 판중추원사 조혜를 황주에, 화천위 권공을 개성에 파견하여 명나라 사신 맞이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압록강을 건너온 사신일행이 평양을 지나 개성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개성유수로부터 들어왔다. 바짝 긴장한 수양은 도승지 박원형을 벽제관에 급파하여 사신을 영접하도록 했다. 홍제원에서 행장을 정비한 사신일행이 모화관에 도착했다. 수양이 손수 모화관에 나아가 흠차태감 윤봉과 김흥을 영접하고 조칙(詔勅)을 맞아들였다.

근정전
▲ 경복궁 근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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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서 고명의식이 거행되었다.

"짐은 조선국왕에게 칙유하노라. 이홍위는 적장자로서 동번(東藩)을 세습하였으나 약한 몸으로 간흉의 환란을 감당하지 못해 위(位)를 종친의 어진이에게 손양하겠다고 간청하여 특별히 그의 숙부 이휘를 조선 국왕으로 봉하노니 그대는 마땅히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여 더욱 사대(事大)를 확실히 하고 전왕의 양위를 욕되게 하지 말지어다."

수양이 근정전에 올라 무릎 꿇고 배례(拜禮)를 행했다. 뼈속까지 충성을 바치겠다는 의식이다. 명나라는 조선의 상국이다. 동이(東夷)로 규정하여 오랑캐 취급하지 않는 것만도 하해같이 고마운 일이다. 하여, 원나라가 기울고 명나라가 새로운 대륙의 맹주로 등장할 때부터 아버지 나라로 모시기로 했다. 그것도 강요해서가 아니다. 스스로 그렇게 하겠다고 기었다. 사대(事大)의 종결이다.

공식적인 행사를 마친 사신이 태평관으로 향했다. 황제를 대신하여 상국의 사신이 왔으니 융숭하게 대접해야 한다. 전국의 기생이 소집되었고 팔도의 산해진미가 공수(供需)되었다. 수양이 상왕과 함께 태평관에 거둥하여 하마연을 베풀었다.

수강궁을 품고 있었던 창경궁. 지붕 위에 지붕이 있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예사롭지 않다.
▲ 옥상옥 수강궁을 품고 있었던 창경궁. 지붕 위에 지붕이 있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예사롭지 않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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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뺏으면 질러야지, 천추의 한을 남기다

이튿날, 상왕의 처소 수강궁에서 사신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다. 상왕이 사신을 초치(안으로 불러들임)한 모양새다.

"운검은 들이지 말라 했다."

칼을 차고 들어가려는 성승을 한명회가 제지했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듣지 못했소."
"그래도 들어갈 수 없다."
"나는 도총관으로서 운검이 내 책무요."

성승과 한명회의 눈이 부딪혔다. 불꽃이 튀었다.

"무장한 무관은 들이지 말라 했다 하지 않았소이까?"

한명회가 뱁새눈처럼 작은 눈으로 성승을 쏘아보았다.

"명에 죽고 사는 것이 무관이오. 어디서 나온 명이요?"
"어명이요."

성승이 물러났다. 통수권자 임금의 명령이라는데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휴! 저놈을 그냥..."
"세자가 오지 않았으니 한명회를 죽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승이 칼을 빼어들고 한명회에게 달려가려 하자 성삼문이 만류했다.

"지금 당장 요절을 내버립시다."

유응부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고 운검을 들이지 말라 하였으니 이는 하늘의 뜻인 것 같습니다."

박팽년과 성삼문이 냉정을 되찾자고 호소했다.

"여기에 와 있는 수양과 그 졸개들을 죽이고 상왕을 모시고 경복궁으로 쳐들어가면 세자가 감히 대항하겠습니까? 좀처럼 만나기 힘든 기회이니 놓쳐서는 안 됩니다."

유응부가 강공을 주장했다.

"만일 거사하였다가 세자가 경복궁에서 군사를 일으켜 반격하면 성공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임금과 세자가 같이 있는 날을 잡아 거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일은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중요한데 후일로 미루면 비밀이 누설될까 두렵소."
"무모한 공격은 만전지계(萬全之計)가 아닙니다."

오늘 결행하자는 유응부의 주장을 박팽년과 성삼문이 한사코 만류했다. 만전(萬全). 참 좋은 낱말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가렸다'고 완벽하면 더할 나위없다. 하지만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고 너무 신중한 것이 화(禍)를 부르고 천추의 한이 된다는 것을 성삼문도 이때는 몰랐다.

문밖에서 유응부를 제지한 성삼문이 수강궁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머리를 감고 있는 신숙주를 발견한 윤영손이 칼을 빼려하자 성삼문이 눈짓으로 만류했다. 영문을 모른 윤영손이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갔다.

향원정
▲ 경복궁 향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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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놈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현명하다

거사가 불발이 그친 것을 확인한 김질이 쏜살같이 내달렸다.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얼마큼 달렸을까? 갈 길은 먼데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김질이 또 다시 뛰었다. 처가에 도착한 김질이 숨을 헐떡이며 장인 정창손에게 고했다.

"거사가 미뤄졌습니다."
"거사라 했는가?"

놀란 정창손이 사위 김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오늘 운검을 들이지 않고 세자도 오지 않았으니 천명입니다."
"누구의 천명(天命)이란 말인가?"
"주상 전하 말씀입니다."
"전하를 도모하려 했단 말인가?"
"네."

김질의 손을 잡고 있던 정창손의 손이 풀렸다. 천당과 지옥을 오간 느낌이었다.

"자네가 왜 그런 일에 끼어들었나?"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으려 했는데 굿판이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예끼 이 사람아, 그렇게 위험한 굿을 구경해?"

말은 그렇게 했으나 수양을 제거하려는 거사에 한 발 담그고 있는 사위를 구경하고 있던 자신의 속내는 드러내지 않았다.

"성공하면 빈장 어른을 영의정으로 모시겠다 하기에..."

김질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정창손은 정난직후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현재는 의정부 우찬성이다. 그의 뒷배를 받은 김질은 6품 벼슬에서 4품 성균 사예로 고속 승진하여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수양의 비호로 유야무야 되었다.

"자네 간덩이가 부었군. 영상 자리에 오르기 전에 내 목이 달아나겠네. 역적은 삼족을 멸한다는 소리도 들어보지 못했나?"
"고변하면 부귀를 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정전
▲ 경복궁 사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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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질과 정창손이 입궐하여 사정전 뜰에 무릎을 꿇었다.

"신은 알지 못하였는데 사위 김질이 성삼문 무리와 어울렸습니다. 소신은 만 번 죽어 마땅하오니 죽여주옵소서."

정창손이 눈물을 흘렸다.

"비밀히 아뢸 것이 있습니다."

김질이 땅바닥에 쳐박고 있던 머리를 들었다.

"말해보거라."
"성삼문이 신을 보자 하기에 신이 가보았더니 '임금이 죽고 상왕과 세자가 왕위를 다툰다면 상왕을 돕는 것이 옳으니 꼭 너의 장인에게 이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장인이 어떻게 혼자서 할 수 있겠는가?'라고 되물으니 '좌의정은 북경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우의정은 결단성이 없으니 윤사로·신숙주·권남·한명회를 제거하면 거사는 성공이다. 너의 장인 우찬성 대감은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있으니 대감이 앞장서 상왕을 다시 세운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놀랍고 의아스러워 '그대의 뜻과 같이하는 사람이 누구누구인가?' 하니 '이개·하위지·유응부다' 하였습니다."
"틀림없으렷다?"

수양이 김질을 노려보았다. 고양이 앞에 쥐처럼 잔뜩 웅크린 김질이 모기소리처럼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소신의 목숨은 전하 것이옵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하겠습니다."

김질의 고변을 접수한 수양이 비상을 걸었다.


태그:#수양대군, #성삼문, #김질, #정창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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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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