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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을 나선 가마가 예성강으로 향했다. 시녀들과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행차하는 가마는 언뜻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았다. 가마에 좌정한 귀티 나는 소녀는 왕실의 손녀로서, 모친이 충혜왕의 딸인 장녕공주(長寧公主)였다. 장녕공주의 모친인 덕녕공주(德寧公主)는 원(元)나라의 실력자인 진서무정왕(鎭西武靖王)의 딸로서, 충숙왕 17년(1330)에 충혜왕과 혼인하여 충목왕과 장녕공주를 낳았다.

이후 충혜왕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음행을 식은 밥 물 말아먹듯 예사로 저지르고 국정을 도탄에 빠뜨리는 바람에 폐위 당해 원나라로 끌려가다 객사했다. 그후 덕녕공주가 왕실을 대표하게 됐다. 충혜왕의 아들 충목왕이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등극하였다가 12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덕녕공주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충혜왕의 서자로서 즉위한 충정왕의 시대에도 덕녕공주가 국정에 관여하였는데, 공민왕이 죽은 이후에도 우왕 2년(1375)까지 생존하였다.

장녕공주는 모친과 달리 비운 했다. 주변의 부러움은 궁궐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다가 원나라의 실력자에게 선택되어 그쪽으로 건너갈 때까지였다. 신흥의 명나라에 밀린 원나라가 멸망할 때 장녕공주는 그만 행방이 묘연해지고 말았다. 크게 우려한 덕녕공주가 공민왕에게 하소연하자 공민왕이 명나라에 특사를 보내어 도움을 요청한 결과 북경(北京)에서 찾을 수 있었다.

장녕공주는 천신만고 끝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공민왕을 위시한 대부분의 표정이 싸늘했다. 원나라를 배격하던 공민왕에게 장녕공주는 떨어버려야 치욕스런 과거의 상징물에 지나지 않았으며, 아직도 원나라와 가깝던 자들은 종주국이 멸망할 때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장녕공주를 경멸하고 혐오했다. 그들이 장녕공주를 변방으로 내칠 것을 주장하였지만 공민왕은 듣지 않고 개경에 별궁別宮을 마련해주었다. 세인(世人)의 관심에서 벗어난 장경공주는 딸 하나를 두고 세상을 떠났는데, 다행히 공민왕은 공주로 대우하고 생활을 비롯한 모든 것을 돌보아주도록 배려했다. 

우왕에게 인사를 드리고 예성강으로 바람을 쐬러 나가는 앳된 신녕(愼寧)공주가 몹시 들떴다. 어릴 때부터 집안에 갇혀 교양과 몸가짐을 반복하여 익혀야 했던 일상은 고문과도 같았다. 2년 전에 모친 장경공주가 돌아간 다음 약간 숨통이 트이기는 했지만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는 마찬가지였다.

일 년에 통틀어 열 차례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외출은 한정된 공기를 호흡하는 것처럼 각별하고 절박했다. 시끌벅적한 저자거리와 백성들의 모습조차 신기하게 비쳤고 여린 피부를 마찰하는 공기마저 별궁의 것과는 전혀 다른 질감으로 느껴졌다. 해가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에 예성강을 다녀오려면 서둘러야 했는데 갑자기 가마가 멈췄다.


태그:#역사소설, #고려,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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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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