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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에 대체 무슨 문화유산이 있다고

 

 

'나홀로 테마여행' 카페의 서울 문화유산 답사 제45차 정기답사가 노원구로 잡혔다. 노원구에도 문화유산이 있을까? 공지를 보니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다. 노원구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태릉과 강릉이 있다. 태릉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능이다. 그리고 강릉은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과 그의 비인 인순왕후의 능이다. 그 외에 태릉선수촌에 체육박물관이 있고, 육군사관학교에 육군박물관이 있다. 그리고 육사 교내에 삼군부 청헌당과 연령군 이훤 신도비도 있다.

 

삼군부라면 조선시대 군령과 군무를 총괄하던 군사기구로, 지금의 합동참모본부에 해당한다. 청헌당은 삼군부의 청사다. 연령군 이훤은 숙종의 아들로 효성이 지극했던 걸로 알려져 있다. 그가 1720년 2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신도비는 왕명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오면 바로 화랑대역을 만날 수 있다. 이 역은 중앙선 복선화 및 전철화 사업으로 폐쇄된 상태다. 이들 문화유산은 모두 태릉 주변에 모여 있다.

 

여기서 북쪽으로 약 40분 정도 걸어가면 충숙공 이상길 신도비를 만날 수 있다. 이 지역은 충숙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벽진이씨 묘역이다. 그리고 다시 북쪽으로 500m쯤 가면 이윤탁 한글 고비를 만날 수 있다. 비석의 문구를 한글로 써서 유명하다. 1536년에 세워졌으니, 한글 반포 후 90년 만에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이번 답사의 최종 목적지 학도암 마애불까지는 좀 멀고 힘이 든다. 그것은 학도암이 불암산 중턱에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릉 전시관

 

아침 11시 우리 일행은 태릉에 있는 조선왕릉 전시관에 모였다. 미리 공지한 대로 태릉에서 시작해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에서 답사를 할 계획이다. 평일이고 오전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없다. 전시관으로 들어가니 아는 사람이 보인다. 최강이 씨라고 이곳 전시관에 근무하고 있다. 그는 능원묘 분야의 전문가다. 그가 우리에게 조선왕릉 전시관과 태‧강릉을 안내해 줄 것이다. 그는 전시물에 대해 1시간 동안 설명을 해주고, 태‧강릉을 1시간 동안 안내해 줬다.

 

왕릉 전시관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먼저 조선의 국장을 체험할 수 있고, 한 눈에 조선왕릉을 볼 수 있으며, 마지막에 조선왕릉의 관리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국장 코너로 들어가기 전 내 눈에 띄는 게 있다. 작가 박승갑이 그린 그림이다. 모두 네 점이 있는데, 모두 왕릉과 관련이 있다. 하나는 산과 고층건물 속에 자리 잡은 왕릉을 현대적인 기법으로 표현했다. 색감이 참 좋다. 다른 하나에서는 산 속의 고적(孤寂)이 느껴진다. 또 다른 그림의 제목은 '왕릉의 가족'으로, 봉분 둘레에 문무인석, 양마호석,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을 그려넣었다.

 

 

조선의 국장 코너에는 국장의 전 과정이 사진과 패널 그리고 자료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 왕이 죽으면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이 설치되고 장례가 시작된다. 그 다음에 11단계과정을 거치는데, 그 용어가 비교적 어렵다. 대표적인 것이 염습(殮襲), 성복(成服), 발인(發靷), 반우(返虞)다. 염습은 시신을 씻기고 옷을 입히는 것이다. 성복은 말 그대로 상주가 상복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발인은 왕릉으로 출발하는 것이며, 반우는 장례 후 신주를 모시고 돌아와 제사지내는 일이다.

 

한 눈에 보는 조선왕릉 코너에는 왕릉 내부 모습이 보여진다. 그리고 비디오를 통해 왕릉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재연되고 있다. 왕릉은 외견 상 병풍석과 난간석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있고, 난간석으로만 이루어진 경우가 있다. 보기에 병풍석과 난간석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훨씬 더 웅장해 보인다. 왕릉 내부는 크게 석관과 회격 두 가지로 이루어졌는데, 세조 때부터 회격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왕릉을 만드는데 너무나 많은 인원과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세조의 명으로 간소화한 것이라고 한다. 석관이 들어가는 왕릉을 하나 조성하는데 5개월 동안 연인원 15,000명이 동원되었다고 하니, 보통 일이 아니다. 이를 간소화하기 위해 회격을 사용했고, 이를 통해 인력을 절반 정도 절약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릉은 모두 40기이다.

 

조선 태조의 능인 건원릉부터 제27대 순종에 이르기까지 왕릉은 모두 42기다. 그 중 휴전선 북쪽에 있는 제릉(태조비 신의왕후 한씨)과 후릉(정종과 정안왕후 김씨)은 제외되어 있다. 그리고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은 능이 아닌 묘이기 때문에 여기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들 조선왕릉은 대부분 서울 근교에 있지만, 단종의 장릉만은 강원도 영월에 있다. 그것은 그가 폐위되어 영월에 묻혔다가 숙종 때 복위되었기 때문이다.

 

중종비 문정왕후 능인 태릉

 

 

왕릉전시관을 나와 찾아간 곳은 중종비 문정왕후(1501-1565)의 능인 태릉이다. 문정왕후 하면 치맛바람이 대단했던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조선의 측천무후로 불리기도 한다. 그녀는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딸로 중종의 제2계비가 되었다. 중종에게는 세 명의 부인이 있다. 첫째가 단경왕후 신씨고, 둘째가 장경왕후 윤씨며, 셋째가 문정왕후 윤씨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들의 능이 모두 따로 조성되어 있다.

 

중종의 능은 정릉으로 강남구 선릉로에 있다. 단경왕후의 능은 온릉으로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있다. 장경왕후의 능은 희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에 있다. 그리고 문정왕후 윤씨의 능인 태릉이 이곳 노원구 화랑로에 있다. 문정왕후는 원래 중종의 능인 정릉에 함께 묻히려 했으나, 장마철이라 정릉이 침수되는 바람에 불암산 자락에 홀로 묻히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1517년 중종의 제2계비가 되었다. 그녀는 중종과의 사이에 1남4녀를 두었고, 아들 경원대군 환(峘: 1534-1567)이 1545년 명종으로 즉위했다. 당시 명종의 나이가 12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문정왕후가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다.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는 인종의 외척을 몰아내기 위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다. 을사사화를 통해 윤임 등 인종의 외척과 사림파가 제거되거나 축출되었다.

 

태릉의 홍살문에 도착하니 정면에 정자각이 보이고, 그 뒤로 능상 영역이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어도를 따라 정자각으로 가면서 수복방과 신도비를 살펴본다. 신도비에는 조선국 문정황후 태릉(朝鮮國文定王后泰陵)이라고 적혀 있다. 계단을 통해 정자각에 오른 다음 뒷문을 통해 능상의 봉분과 석물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최강이 씨의 안내로 능상으로 올라간다. 능상에는 봉분 쪽으로 가면서 무석인,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이 있다.

 

 

문무석인은 얼굴이 크고 목이 짧으며, 몸통이 전체의 3/4 정도를 차지한다. 문석인은 높이가 260cm로,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하는 관복차림을 하고 있다. 두 손으로는 홀(笏)을 공손히 맞잡고 있어, 이전의 문인석과 다른 모습이다. 의복에는 아랫부분에 삼도형태의 주름이 있어 불상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귀에도 아랫부분에 구멍이 있어 귀걸이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무석인은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투구를 쓴 위용 있는 무장의 모습이다.

 

봉분 아랫부분에 구름과 십이지신을 의미하는 방위신을 새긴 병풍석을 둘렀으며, 그 주위에 난간석을 세웠다. 석물이 완벽하게 한 쌍씩 갖춰져 있으며, 그 크기 또한 크고 웅장하다. 태릉은 왕비의 능이면서도 여늬 왕릉보다 더 위엄이 있다. 그것은 문정왕후의 정치적인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

 

 

나는 곡장을 돌아 왕릉 뒤로 가서 풍수적인 면을 살펴본다. 안개 속으로 낮은 구릉이 펼쳐진 게 편안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은 지 2년 후 명종도 세상을 떠나 가까운 강릉(康陵)에 묻힌다. 명종에게는 후사가 없어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이 왕위를 계승한다. 그가 선조이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큰 시련을 겪게 된다.

 

명종과 인순왕후의 쌍릉인 강릉

 

 

태릉에서 강릉을 가려면 작은 산을 넘어야 한다. 길은 산속으로 잘 나 있으며 거리는 1.2㎞쯤 된다. 길은 강릉의 뒤로 이어지기기 때문에 먼저 곡장을 만나게 된다. 곡장 뒤에서 산세와 풍수를 살펴보고 곡장을 돌아 능상으로 간다. 강릉은 명종과 인순왕후의 쌍릉이다. 그래서 봉분도 두 개고 혼유석도 두 개다. 봉분은 병풍석으로 두르고 그 바깥에 난간석을 설치했다.

 

문무인석, 양마호석,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등이 태릉과 거의 같은 형태다. 능 아래로 내려오니 정자각 옆에 신도비가 보인다. 신도비각 옆에 수복방은 없고 주춧돌만 보인다. 정자각도 능과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약간은 틀어앉았다. 전체적으로 원래의 모습에서 약간 변형된 것 같다. 강릉은 원래 비공개능인데, 태릉관리소장의 배려로 볼 수 있었다.

 

 

명종은 1553년부터 어머니인 문정왕후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아 친정을 펼친다. 외척을 견제하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면서 선정을 펼치려 노력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외숙인 윤원형 등 외척세력의 영향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1555년에는 을묘왜변이 터져 대외적으로도 불안했다. 의적으로 알려진 임꺽정이 활동한 것도 대개 1559년부터 1562년까지였다. 더욱이 문정왕후가 봉은사 주지였던 보우스님을 중용하면서 불교중흥을 꾀해 유교와 불교의 갈등도 심해졌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명종은 외척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치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67년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역사는 명종을 문약했던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언적, 이황, 기대승 같은 학자들이 재야에서 주자학을 연구하여 조선 유학의 틀이 마련되기도 했다. 역사는 이처럼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차있다.

덧붙이는 글 | 1월 18일 노원구의 문화유산을 답사했다. 왕릉, 박물관, 비석, 마애불 등 다양한 유산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들을 보고 느낀 내용을 3회 정도 연재할 예정이다.


태그:#노원구 문화유산, #태?강릉, #왕릉전시관, #육군박물관, #한글 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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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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