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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 조선은 자전거의 나라였다. 자전거는 자동차 등 다른 교통수단을 압도했을 뿐만 아니라 통근, 통학, 업무, 레저 등 여러 분야에 두루두루 쓰였다. 그 시대 자전거문화는 어땠을까. 역사는 반복된다는데 앞으로 다가올 자전거 시대에 비슷한 모습으로 재현되진 않을까. 그 시절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본다. - 기자 말

자전거 몸통은 비어 있다. 튼튼하면서도 가벼운 자전거의 비밀. 이런 자전거의 특성을 밀수꾼들은 절묘하게 이용했다.
 자전거 몸통은 비어 있다. 튼튼하면서도 가벼운 자전거의 비밀. 이런 자전거의 특성을 밀수꾼들은 절묘하게 이용했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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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인을 자전거로 위장시켜 밀수출하려던 신종 마약밀수 사건이 적발됐습니다. 콜롬비아 마약 당국은 코카인 2킬로그램을 특수 용제와 결합시켜 자전거 2대에 덧칠한 뒤 이를 스페인으로 밀수출하려던 사건을 적발했다고 밝혔습니다. 콜롬비아 당국은 자전거 프레임에 덧칠해진 코카인 2킬로그램은 시가 7천만 원 어치에 이르며 이런 수법이 적발된 것은 처음이라고 밝혔습니다."

2004년 7월 17일자 YTN에 소개된 기사다. 기막히다. 이런 수법을 만들어낸 마약범이나 그걸 찾아낸 단속원이나. 자전거에 마약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역시 사기를 치는 이들에겐 상상력이 필요하고, 찾아내는 이들에겐 집요한 의심이 필요하다.

혹시 이런 일이 마약거래가 활발한 남미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2009년 일이다. 경기지방경찰청 마약수사대는 중국에서 히로뽕을 몰래 들여오려던 일당을 체포했다. 히로뽕이 들어있던 곳은 자전거 프레임. 당시 기사(연합뉴스 2009년 11월 17일)에 따르면 경찰은 "자전거 프레임을 이용해 마약을 밀반입하다 적발된 사례는 처음"이라며 "마약을 들여오는 수법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희한한 방법에 경찰은 혀를 내두르며 "처음 있는 일"이라 했지만 갑자기 나타난 수법은 아니다. 1930년대 이미 이와 같은 일이 빈번했으니 80여 년 전 대선배들이 앞서 길을 닦아놓았다. 그때 전통이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진 것일까, 아니면 후배들이 옛 자료를 뒤져 선배의 빛나는(?) 노하우를 전수받은 것일까. 그 비밀은 알 수 없지만 그때 그 시절로 들어가 선배 밀수꾼들의 활약상을 살펴본다.

여자 머리와 항문에 숨긴 금괴, 마침내 자전거 속에도 숨겨

1930년대 압록강철교는 엄청난 부를 안겨주는 '로또'길이었다. 조선 땅에 있는 압록강철교(신의주)와 만주 안동현(현 단둥) 세관과 거리 차이는 100여m. 빨리 달리면 채 20초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돈을 벌 궁리를 하는 이들에겐 한 몫 단단히 챙길 수 있는 길이었다.

1932년 기준으로 신의주에서 금 한 돈(3.75g, 당시 표기는 1몸메)은 9원, 안동현에선 12원에 거래됐다. 100m만 단속원 눈을 피할 수만 있다면 단번에 40%가 넘는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바다를 건너야 하는 것도 아니고 고압전기가 흐르는 철책을 넘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위험한 짐승들이 어슬렁거리는 야산도 아닌데다 그 대가는 너무도 달콤했으니 군침을 흘리는 이들은 많았다.

이처럼 심한 금값 차이가 생긴 이유는 일본 군부의 야심 때문이었다. 일본은 한국과 만주를 놓고 러시아와 벌인 러·일전쟁(1904∼1905년)에서 승리하면서 이 지역을 사실상 지배한다. 1931년 만주사변 뒤에는 만주 전역을 일본군이 집어삼킨다.

허나 일본군의 최종 목표는 만주가 아니었다. 중국 전역과 아시아 지배가 목적이었다. 만주 지배는 서곡에 불과했다. 대규모 전쟁 준비를 시작한 일본 군부는 전쟁 준비 자금으로 금이 많이 필요했다. 해서 일본이나 조선에서 생산된 금 시세를 낮게 정한다. 1931년 12월부터는 아예 일본과 조선에서 나오는 금 수출을 금지한다.

그 결과 나타난 현상이 인근 지역과 생긴 금값 차이. 다른 지역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조선에서 강 하나만 건너면 이웃 만주라는 게 문제였다. 전쟁은 많은 이들을 사지로 내몰지만 한 편으로 눈치 빠른 이들에겐 돈 벌 기회를 제공한다. 밀수꾼들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먼저 자기 몸을 이용했다. 처음엔 허리에 차고 옷으로 덮고 강을 건넜으나 이내 발각된다. 이후 수법은 점차 다양해진다. 구두창 속에 넣고 여자 긴 머리 속에 숨긴다. 여기저기 숨기다 마침내 항문 속에 넣는 일당도 나왔다. 그럼 그때 단속원들은 의심나는 사람들을 불러 세운 뒤 모두 바지를 벗겼을까. 항문 같은 곳은 발견하기도 힘들었지만, 숨긴다고 해도 많이 숨기긴 힘들었을 것이다. 몸이 상할 가능성도 있었고.

이제 자기 몸에 숨기는 것에도 한계가 온다. 잔머리에서 온갖 꾀가 쏟아진다. 금괴를 녹인 초에 넣고 굳힌 뒤 비눗갑에 넣고 이동하는 이들까지 나온다. 비누를 들어보고 '어, 왜 이리 무겁지'라고 느끼지 않았다면 발각되지 않았겠지만 눈치 빠른 단속원이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들 밀수범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제3자를 전달자로 잘 이용한다. 역시 뿌리가 있었다. 당시 단속원들이 의심하지 않을 것 같은 아주 어린 소녀나 소년을 이용해 금괴를 운반하다 걸린다. 이처럼 자기 몸에 숨기거나 다른 사람 몸을 이용하는 단계를 지나 마침내 첨단수법이 등장하니 바로 '자전거 밀수'다.

"금괴를 자전거 튜브에 넣은 후 공기를 넣어 보아도 잘 모르게 한 후 지난 2월부터 5월까지 전후 5회에 금괴 580돈에 시가 7100여원어치를 밀수출한 사실이 발견되어 그동안 신의주서에 체포되어 그동안 엄중한 취조를 받다가..." - <조선중앙일보>(1934년 6월 25일)

보기보다 자전거가 꽤 정교한 기계라는 걸 간파한 밀수범들

자전거는 꽤 복잡한 기계다. 공통되는 부품을 빼더라도 130여개가 넘는다. 사진은 한 자전거숍에 전시된 공구들.
 자전거는 꽤 복잡한 기계다. 공통되는 부품을 빼더라도 130여개가 넘는다. 사진은 한 자전거숍에 전시된 공구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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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한 해 전에는 자전거 안장 밑에 넣고 신의주에서 안동현으로 건너가다가 붙잡힌 일이 있었다. 수법은 다양했다. 자전거 몸통에 숨기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자전거용 전등 안에 감춘 이도 있었다. 자전거를 뜯어보고 조립하면서 이리저리 연구한 결과였다.

보기보다 자전거가 꽤 정교한 기계라는 걸 이들 밀수범들은 알고 있었다. 자전거 잡지인 <바퀴> 2012년 1·2월호에는 자전거를 모두 분해해서 부품을 살펴보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부품 종류는 모두 136개. 공통으로 들어가는 종류는 모두 하나로 쳤으니 실제 부품개수는 이보다 훨씬 많다. 다른 전문가가 일일이 센 사례를 보면 자전거 부품은 대략 600개 이상이다. 이런 자전거의 특성을 밀수범들은 잘 이용했다. 무엇보다 자전거 몸통이 비어있다는 게 핵심이었다.

밀수범들 가운데는 기차와 자전거를 연계하는 이들도 있었다.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은 뒤 역 안에 공모자가 세워놓은 자전거를 타고 줄행랑을 치는 수법이다. 자전거가 일단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 달려서 붙잡긴 힘들다. 자동차는 시동을 거는 데 시간이 걸린다. 박자만 잘 맞는다면 이 또한 괜찮은 방법이었다.

어쨌든 황금에 눈먼 밀수꾼들은 촛불을 보고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1932년 12월 한 달 동안에만 밀수를 하다 잡힌 건수가 183회였으니 하루 평균 6건 정도였다. 그 뒤에도 빈번하게 밀수 관련 기사가 나오는 걸 보면 반드시 몸에 값나가는 물건을 지고 국경을 넘겠다는 밀수꾼들의 의지는 꽤 강했다.

사람이 단속하는 것만으론 한계가 있다고 느꼈는지 1934년 9월 마침내 안동세관에선 밀수방지용 정탐견을 파견한다고 발표한다.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 이제 인간 대 개의 싸움으로 옮겨간다. 과연 개가 완벽하게 밀수를 막았을까? 아마 밀수꾼들의 또 다른 꼼수가 나타났을 것이다.

종종 원인과 대책이 따로 노는 경우가 많았으니 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밀수가 성행한 것은 결국 일본 군부가 전쟁을 벌여 금값 수요가 커진 것이니 국경검문만 강화하는 건 원인 따로 대책 따로였다. 허니 정탐견이 나타난 뒤에도 안동현엔 밀수로 먹고 사는 이가 수천을 헤아린다는 기사가 실린다.

"국경도시의 발전 그 자체가 밀수의 은덕인 경우가 적지 않으며 이 안동현 신의주만 하여도 밀수로 생업을 삼는 자가 기천이라 하니 농무가 자욱한 압강상에는 식염의 밀수선이 뚫고 가는 것 같고 철교 위를 구르는 자전거의 타이어 속에도 밀수의 황금이 빛나는 것 같이도 생각된다." - <동아일보>(1935년 8월 1일)

기계 자체는 선도 악도 아냐, 사용하는 사람의 생각이 중요

기계란 게 본디 그 자체로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선도 되고 악도 된다. 자전거도 마찬가지다.
 기계란 게 본디 그 자체로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선도 되고 악도 된다. 자전거도 마찬가지다.
ⓒ 영화 '달려라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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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밀수범들이 애용한(?) 자전거는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최근에도 여전히 사용된다. 좋은 일에 쓰여야 할 자전거가 범죄에 이용되니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사실 그게 기계의 운명이다.

기계 자체로서는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니다. 쓰는 사람에 따라 선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방치자전거가 대표 사례다. 적당히 타다가 버리는 자전거는 자원낭비에다가 환경오염까지 일으킨다. 서울시 방치자전거는 2006년 1606대에서 2007년 3661대, 2008년 5561대로 매년 증가추세다.

공공자전거도 마찬가지다. 김태원 한나라당 의원이 서울시로부터 제출받은 '공공자전거 도난 분실 고장 현황'에 따르면 2010년 11월부터 2011년 9월 13일까지 고장 난 자전거는 총 3006대. 자전거 한 대당 단가가 84만 원이 넘는 것을 감안하면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 외에도 자전거가 공격받는 지점은 많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2013년까지 지리산 설악산 내장산 국립공원에 만들기로 한 자전거도로는 환경을 해친다는 지적을 받았다. 잘 포장된 강변자전거도로가 강과 육지 쪽 생태계를 나눈다는 비판 또한 그 중 하나다.

자전거가 환경을 살린다는 가능성과 실제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의문도 존재한다. 자전거이용 인구는 늘고 있지만 이로 인해 에너지 사용이 줄고 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대부분 자전거는 여가용으로 쓰일 뿐 기존 교통수단을 대체하는 정도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전거는 좋은 여가수단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훌륭한 자가발전수단이라는 점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과 KBS2 예능프로그램 <개그콘서트>의 '달인'편에서 자전거로 전기를 만드는 모습이 방영된 바 있다. 두 코너는 자전거가 지닌 잠재력을 잘 보여주면서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한 편으론 자전거로 에너지를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표현하면서 자전거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줬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의 의식변화가 중요한 건 그래서다. 자전거 타는 여건이 아무리 좋아져도 타는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자전거는 옳은 길로 나아가지 못한다. 자전거를 밀수에 이용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물론 더 중요한 건 정책을 만드는 이들이다. 의식이 바뀌는 건 나홀로 애쓴다고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옛날 일본 군부처럼 밀수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놓고 '하지 말라'고 하면 단속원들만 죽어난다.

자전거를 꼭 타야 하는 이유는 결국 에너지 문제 때문이다. 자전거를 많이 탄다 하더라도 에너지 소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결국 자전거는 헛바퀴를 돌리는 셈이 된다. 만약 자전거를 많이 타면서 에너지 소비가 오히려 느는 결과가 나온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

멀리 갈 것도 없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본인이 자전거를 타면서 자기 생활에서 에너지 소비가 느는지 주는지 보면 될 일이다. 과연 우리는 착한 자전거를 타는 것일까. 나쁜 자전거를 타는 것일까. 답은 멀리 있지 않다.


태그:#자전거, #밀수, #금괴, #마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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