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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데타 50년이 되는 시점에 박정희 통치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금의 대한민국에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해 따져봐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권력자들의 음모와 살생 게임, 야만적 고문과 공포정치, 한강의 기적의 실제 경제성적표, 그리고 대통령의 술과 여자...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를 일주일에 2회 정도 풀어나갈 예정이다. - 기자말

2005년 10월 12일, 70-80년대 추억을 소재로 한 '제2회 광주 충장로 축제'에서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 장면이 재연돼 눈길을 끌었다.
 2005년 10월 12일, 70-80년대 추억을 소재로 한 '제2회 광주 충장로 축제'에서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 장면이 재연돼 눈길을 끌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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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의 장발, 미니스커트 단속과 대중가요에 대한 금지곡 남발은 문화적 자유와 다양성에 대한 무지를 웅변했다. 문화적 자유가 방종과는 다르겠지만 청년 학생들의 순수한 외모 차림새까지 일탈행위로 간주하고 징계했다. 기성세대 독재권력자의 획일적 잣대로 얽어매었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외국 언론사의 특파원들은 장발을 가위질하는 경찰의 모습을 세계 토픽으로 전송하기도 했다. 서구 사회의 눈으로 보았을 때 희한한 코미디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퇴폐풍조와 불건전성은 국가발전을 공학적으로 이룩하겠다는 전체주의 체제가 가장 싫어하는 척결대상이다. 당시엔 히피 문화가 유행했는데 기성의 모든 권위와 질서를 부정하는 풍조였다. 그 히피 문화의 주역은 주류가 아닌 변방의 소외계층이었다. 독일의 나치나 일본 군국주의 정권 아래서였다면 모두 강제 수용 대상이었다.

전체주의 정권은 그런 변두리 집단의 '일탈된 행태'를 일종의 바이러스라고 보았다. 따라서 살균제를 뿌려서 박멸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장발과 미니스커트, 그리고 풍자가 섞인 대중가요를 그런 일탈 행위로 단속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불만과 저항의 의미가 엿보이는 무엇이든 놔두지 못하겠다는 발상이었다.

그렇다면 박정희 정권 아래서 권력자들의 문화적 건전성과 미풍양속은 어떤가. 국가 지도자들이 수범을 보이기는커녕 시정잡배만도 못한 윤리의식이었다. 오죽했으면 "남자의 배꼽 아래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을까. 그 현장은 바로 10·26 당일의 비밀안가 연회장이었다.

박정희의 최후를 맨 정신으로 가장 확실하게 보았던 증인은 10·26 당일 밤 궁정동 주연행사에 참석한 두 여인이었다. 재판부는 이 두 여인을 증인으로 불러 당시 상황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 최후를 본 두 여인의 증언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총격사건과 관련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군사법정에 섰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총격사건과 관련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군사법정에 섰다.
ⓒ 보도사진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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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17일 보통군법회의 8회 공판. 이날 오후 4시 15분경, 두 여인은 감색 제미니 승용차를 타고 보통군법회의 8회 공판이 열린 군사법정에 도착했다. 두 여인은 증인서약 등 절차를 마친 뒤 신재순(한양대 연극영화과 3년), 심수봉(가수) 순으로 증인신문을 받았다.

신재순이 먼저 증인석에 앉고 심수봉은 대기실로 안내됐다. 이들은 이날 재판부와 검찰관, 변호인, 그리고 보도진 4명과 기관원 등으로 방청이 제한된 별관의 소법정에서 수시간에 걸쳐 각각 따로 증인신문에 답변했다.

검찰관 : 그 자리에 들어갔을 때 정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신재순 : 그렇습니다. 내용은 기억이 안 납니다만.
검찰관 : 대통령 각하께서 삽교천 행사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셨다는데….
신재순 : 그렇습니다.
검찰관 : TV 뉴스가 끝날 때쯤 김재규 피고가 두 번째로 밖에 나갔다 돌아왔을 때 김계원 비서실장은 어떻게 하고 있었나요. 초조해하는 표정은 없었나요?
신재순 :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습니다. 당황하고 초조한 표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검찰관 : 잠시 후 김재규 피고가 나갔다가 얼마 후 들어와 총소리가 났어요? 아니면 조금 있다가 났습니까? 그리고 "피, 피" 하며 경호원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까?

10·26 사건 당일 밤 박 대통령의 양옆에 앉았던 두 여인이 증인으로 출두하는 날, 합수부는 이들의 신원이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데 크게 신경을 썼다. 이들이 역사의 현장을 목격했을 뿐 아니라 '사건 뒤의 여자'로 비쳐져 세간의 눈길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두 여인의 프라이버시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개인의 사생활은 보호돼야겠지만 너무나 엄청난 사건에 휘말렸기 때문에 국민의 알 권리보다 그것이 우선시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한 여인은 일류가수로 대중문화의 스타여서 일반인들에게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합수부는 언론보도에서 두 여인의 사진을 뒷모습만 게재하도록 제한했으며 이름도 가명을 쓰게 했다. 시중에는 이미 손금자라는 가명으로 발표된 가수가 누군지 알리는 정확한 '유비통신'이 나돌았다. "모 대학 연극영화과 재학생이며 모델 노릇도 한다는 정혜선양"의 신원도 언론보도만 막는다고 해서 감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궁정동 만찬장의 시해 현장을 재연하고 있는 김재규.
 궁정동 만찬장의 시해 현장을 재연하고 있는 김재규.
ⓒ 1980 보도사진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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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순 : 처음 총소리가 난 후 화장실로 피신했는데 조금 있다가 또 총소리가 났습니다.
검찰관 : 그때 대통령 각하는 어떻게 하고 계셨습니까?
신재순 : 쓰러져 있었는데 식탁 옆으로 몸이 기울어 있었습니다.
검찰관 : 총소리가 난 후 불이 나갔나요?
신재순 : 불이 꺼진 뒤 손양과 둘이서 각하를 부축했습니다. 그때 차지철 경호실장은 "경호원, 경호원"하고 소리치며 화장실에서 나와 문갑을 잡고 있었습니다.
(이때 변호인단이 유도신문을 하지 말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증인의 답변이 합수부의 수사기록대로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찰관 : 당시 상황을 기억나는 대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신재순 : 식탁에 엎드린 각하를 일으켜 부축했는데 그때 김재규 부장이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각하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 나도 이제 죽었구나 하고 겁이 나서 실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조금 조용해지는 것 같아 나와 보니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각하를 업고 나갔습니다.
검찰관 : 차 실장을 본 일이 있습니까?
신재순 : 방에서 빠져나가려는데 차 실장이 문가에 쓰러진 채 살아있어서 누군지 모르는 사람과 함께 부축하면서 일어나라고 했더니 "나는 못 일어날 것 같애" 하기에 그냥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옆 사람이 안내해줘 어느 방으로 들어가 기다리고 있는데 신음소리도 났고 조금 후 총소리가 계속해서 일곱 발 정도 났습니다. 그 방에 전화가 몇 번 왔는데 무조건 모른다고 했어요.

설마 했으나 각하 머리에 총을 갖다 대는 걸 보고

지난 2005년 5월 25일 MBC에서 기자 시사회에서 제작진이 공개한 10·26 직후의 궁정동 안가 연회장 사진, 오른쪽 위에 차지철 전 경호실장이 쓰러져 있다.
 지난 2005년 5월 25일 MBC에서 기자 시사회에서 제작진이 공개한 10·26 직후의 궁정동 안가 연회장 사진, 오른쪽 위에 차지철 전 경호실장이 쓰러져 있다.
ⓒ MB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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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변호인 신문이 시작됐다. 김재규의 국선 변호인으로 선임된 안동일, 신호양, 이병용 변호사 등이 물었다.

변호인 : 검찰관이 신문할 때처럼 그냥 "네, 네" 하지 말고 아는 대로 대답해주세요. 궁정동에 도착해서 바로 방에 들어갔습니까?
신재순 : 6시 30분에서 40분 사이에 도착해서 잠깐 대기했습니다.
변호인 : 방에 들어갔을 때 대화가 계속되고 있었나요?
신재순 : 대화가 계속되고 있는 상태에서 들어가 인사하고 앉았습니다.
변호인 : 대화 중 언성이 높아진 적이 있습니까?
신재순 : 없습니다.
변호인 : 대화 중 차 실장과 김재규 부장 사이에 언성이 높았습니까?
신재순 : 그런 느낌은 못 받았습니다.
변호인 : 합동수사본부에 몇 번이나 갔지요?
신재순 : 한 번 갔습니다.
(이때 검찰관이 "본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질문은 삼가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변호인은 "검찰신문의 신빙력에 관한 질문"이라고 응수했다.
변호인 : 그날 김계원 실장이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었다는 것은 높은 어른 앞이라 그런 것인가요, 아니면 무슨 꾸지람이나 죄책감이 있어서였나요?
신재순 : 뭔가 초조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 
변호인 : 증인은 관상학을 공부한 일이 없지요? 그날 김 실장을 처음 보았고 조명도 흐렸지요?
신재순 : 조명은 말하기 곤란합니다.
변호인 : 조명이 어두웠나요, 밝았나요?
신재순 : 조명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조명에 대한 질문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은 실내가 밝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시중의 룸살롱처럼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권력자 그리고 술과 여자가 함께 있었다. 이어 가수 심수봉이 증인석에 앉았다.)
검찰관 : 그날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대통령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던가요?
심수봉 : 조금 높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검찰관 : 만찬장에 들어간 뒤 대통령 각하께서 총에 맞을 때까지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보세요.
심수봉 : 처음 들어가니 각하께서 차 실장에게 "TV에서 삽교천 행사를 방영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차 실장은 "시간이 되면 제가 켜드리겠습니다" 하면서 시계를 봤습니다. 이때 저도 시계를 보았는데 7시 10분 전쯤이었어요. 삽교천에 대한 말씀이 계속됐고 심부름하는 사람이 들어와 김 부장의 귀에 대고 "과장님이 뵙자는데요" 하자 바로 나갔습니다. 그 후에 나갔던 김 부장이 언제 들어왔는지 곧 총소리가 났어요.
검찰관 : 그때 상호 간에 주고받은 얘기가 없었습니까?
심수봉 : 이 "버러지 같은 놈"이라는 고함소리만 들었습니다.
검찰관 : 김재규 피고인이 두 번째 들어올 때 눈이 마주쳤다고 했는데….
심수봉 : 총을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굉장히 당황했어요. 설마 했으나 각하 머리에 총을 갖다 대는 걸 보고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남효주 사무관이 부속실로 들어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두 여인의 진술은 비화보다는 사건 당일의 현장목격담이 주였다. 그러나 '관립 비밀요정'의 풍속도를 그대로 전해준 증언이었다.


태그:#박정희, #궁정동 비밀요정, #심수봉 , #신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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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정치학과 학사 석사 박사, 하버드대 니만펠로십 수료. 동아일보 논설위원, 오마이뉴스 논설주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 한국정치평론학회 회장,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제17대 국회의원, 방송통신위 상임위원-방송평가위원장, 서울디지털대 총장 등 역임. 현재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 저서 : '한국정당과 정치지도자론' '군부와 권력' '우리시대의 정치와 언론' 외 1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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