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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시작된 '월스트리트 점령'(OccupyWallStreet) 시위가 석 달 넘게 계속되고 있다. '1%'의 가진 자에 대한 '99%'의 반격이다. 경제적 민주화를 위한 저항운동이다. '아랍의 봄'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됐다. 전례 없는 '미국의 가을'을 만들더니, 다시 국경을 넘어 한 달 만에 전 세계 1500여 개 도시로 확산됐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고용축소, 해고, 실업, 양극화…, 대한민국에서도 '1%대 99%'의 싸움이 진행중이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물론, '99%'다. 그들을 만나봤다. [편집자말]
미국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의 '큰형님' 역할을 하고 있는 브렌든 버크(41)
 미국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의 '큰형님' 역할을 하고 있는 브렌든 버크(41)
ⓒ 최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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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술에 취한 거구의 청년이 공원 안을 어슬렁거리며 다른 시위대에게 시비를 걸고 소리를 지른다. 풀린 눈으로 횡설수설하는 폼이 마약도 복용한 게 틀림없다. 브렌든 버크(41)가 동료 시위대 몇 명과 함께 청년을 둘러싼다. 금방이라도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될 것 같다. 그러나 버크는 공손하면서도 차분하게 그 청년을 설득한다.

"혹시 음식이나 물이 필요하면 가져다줄까?", "만약 어떤 문제가 있으면 우리한테 얘기해, 도와줄게."

버크는 청년의 몸에 손 하나 대지 않고 조용히 공원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지난해 9월 17일 뉴욕 맨해튼에서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이 시작되면서 시위대가 점거한 리버티스퀘어(주코티파크)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거시위 현장에서 절도, 마약 복용, 성폭행 등 크고 작은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했다.

문제는 일부 보수 언론이 이를 확대·왜곡 보도하면서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의 본질을 호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경찰에게는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해 공원에서 시위대를 몰아내는 데 좋은 구실이 되고 있다.

버크가 점거시위 운동 초기부터 현재까지 매일 현장을 지키며 자율방범대 역할을 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는 "몇몇 술주정뱅이들이 문제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우리가 자체적으로 이를 해결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경찰에 넘기고 있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경찰이 폭력적으로 개입할 여지를 줄이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월스트리트 점령' 평화 시위 뒤엔 '큰형님'이 있었다

미 뉴욕 맨해튼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아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월스트리트 점령' 피켓 시위를 하고 있는 시위대.
 미 뉴욕 맨해튼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아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월스트리트 점령' 피켓 시위를 하고 있는 시위대.
ⓒ 최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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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99%다", "금융자본가의 탐욕을 중단시켜라."

20~30대의 젊은 청년 수백 명이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며 피켓을 들고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인 뉴욕증권거래소 앞으로 몰려들었을 때, 이들을 주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침낭과 텐트를 짊어진 이들이 공원에 자리를 깔고 노숙을 시작할 때에도 금방 흩어지고 말 젊은이들의 일시적인 치기 정도로 인식됐다.

하지만 첫 시위 이후 약 한 달 만인 10월 15일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미국 900여 개 도시, 전 세계 80여 개 국 1500여 개 도시에서 각 지역 이름을 딴 점령시위가 동시다발로 일어났다. 겨울이 시작되고 경찰의 강제 퇴거가 거듭되면서 시위대의 규모가 다소 줄었다. 하지만 2012년 새해를 앞둔 12월 31일 밤에도 월스트리트 인근에서는 수천 명의 시위대가 행진을 하는 등 그 기세는 여전히 꺾이지 않고 있다.

광고 촬영 장비를 실어 나르는 트럭운전사인 버크가 시위대에 합류한 것은 첫 시위가 있고 난 5일 뒤였다.

"미국이 위기에 빠져 있고, 나는 미국인으로서 이 자리에 와 있다. 월스트리트에 있는 일부 조직이 사람들의 돈을 빼앗으려는 목적으로 금융 상품을 디자인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미국에는 상·하의원이 있는데 어느 곳에서도 나 같이 평범하게 일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법은 통과시키지 않고 있다. 그런 위기감 속에 여기에 와 있다."

그는 시위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쫓아가 파수꾼 역할을 자처했다. 밤에 시위대가 공원에서 잠이 들어도 그는 늘 깨어 있었다. 낮에 시위대가 피켓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면 경찰과의 충돌을 최소화하며 대열을 이끌었다. 시위대를 폭행하거나 연행하려는 경찰을 제지하는 것도 그였고, 경찰을 자극하면서 폭력을 유도하는 시위대를 진정시키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시위대는 공원 안에서 집단 노숙 투쟁 중에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버크를 찾기 시작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영화배우 율 브린너의 외모만 닮은 게 아니다. 평소 말이 없이 조용하면서도 사려 깊은 행동 때문에 젊은 시위대들은 그를 '큰형님'처럼 의지하고 따랐다.

실제 공식적인 리더가 없는 점령시위가 지난 100여 일간 평화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버크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그는 늘 거리 행진에 나서는 시위대 앞에 서서 근엄한 표정으로 "절대 폭력을 쓰지 말라"고 당부한다. 시위대의 폭력이 곧 경찰의 폭력을 유발시킨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가 지난해 10월 15일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에 모여 시위를 벌인 가운데, 뉴욕 기마경찰이 시위대를 밀어내기 위해 시위대를 향해 말을 몰고 가서 위협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가 지난해 10월 15일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에 모여 시위를 벌인 가운데, 뉴욕 기마경찰이 시위대를 밀어내기 위해 시위대를 향해 말을 몰고 가서 위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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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쫓겨나본 버크의 세 번째 점거 투쟁 

버크는 톰킨 스퀘어 파크(Tompkins Square Park)에서 자랐다. 20여 년 전까지 이 공원은 뉴욕 맨해튼 동남쪽인 이스트빌리지의 상징적인 장소였다. 1960년대 말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내 대규모 반전시위가 처음으로 시작됐던 곳이다. 당시만 해도 이 지역은 집값이 싸서 가난한 학생, 이민자, 예술가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1970년대 말 반전시위가 잦아들면서 공원 전체가 일종의 '코뮌'처럼 변했는데, 이때부터 예술가, 펑크락밴드, 히피들의 집단 거주처가 됐다. 당시 버크도 펑크락밴드에서 드럼을 쳤다.

1988년 8월 6일 뉴욕경찰이 이 지역 주민들을 강제 퇴거시키기 위해 한밤중에 대대적인 기습작전을 폈다. 뉴욕경찰은 규정상 자기 소속과 성명을 알 수 있는 은색 배지를 가릴 수 없도록 되어 있었지만 이날만큼은 모두 배지를 가린 채 진압에 나섰고, 기마경찰 등을 동원해 주변 거리를 완전히 차단한 뒤 체포와 퇴거를 시도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경찰의 폭력 진압을 거세게 비판하면서 '경찰 폭동(police riot)'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후 이 지역은 1990년대 중반까지 거리 예술가들의 근거지가 됐다. 하지만 이들 덕분에 이 지역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과 개발업자들 사이에 충돌이 불가피했고, 결국 개발업자들의 사주를 받은 경찰과 지역 주민들 사이에 유혈 충돌 사태까지 벌어졌다. 미국에서는 이 과정을 '젠트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고 부르는데, 기존의 원주민을 쫓아내고 재개발을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뉴타운사업과 비슷한 의미다.

브렌든 버크(41)
 브렌든 버크(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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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킨 스퀘어 파크를 경찰이 두 차례에 걸쳐서 밀어냈다. 말을 타고 온 경찰이 모든 것을 때려 부수고 지역 주민들을 쫓아냈다. 그 곳에서 이미 나의 점거 투쟁은 두 번이나 작살났고, 가차 없이 쫓겨났다. 그래서 나는 시위대에게 '경찰에게 함부로 하지 마라'고 한다. 그들은 우리보다 전술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병력도 많고 무기도 다양하고 진압 방법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월스트리트의 범죄'와 싸우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운동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지 않나. 작게 싸우지 말고 크게 한 번 붙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의 강제 진압 강도가 높아지고 겨울이 깊어가면서 시위대들이 하나 둘 자신의 점령지를 이탈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점령시위의 본거지인 뉴욕 맨해튼 리버티스퀘어에서는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다. 시위대는 인근 교회에 나뉘어져서 잠을 자거나 동조자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낮에도 특별한 시위 일정이 없으면 공원은 거의 텅 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일각에서는 '점령지를 잃은 점령 시위는 이제 끝났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있는데, 이 운동이 계속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렇다. 실질적인 이유에서 가능하다. 먼저 월스트리트의 범죄에 대해서 처벌하고 정의를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 둘째 사람들이 이런 상황 속에서 정신적인 해방을 추구해야 한다. 미국의 정치 체제가 견제와 균형에 기반하고 있는데, 현재 (금융자본가의) 권력은 한 번도 견제를 받아본 적이 없는 권력이다. 따라서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을 다시 복구해야 한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월스트리트의 범죄를 단죄하고 정의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인가?
"우선 기업들의 힘을 빼앗아야 한다. 이를 위한 방법은 정경유착을 끊어버릴 수 있는 법을 통과시키도록 의회에 압력을 넣는 것이다."

실제 시위대는 경찰의 강제 퇴거가 본격화되자 아예 시위 대상을 의회로 잡는 등 공격적인 압박에 나서고 있다. 이들은 지난 6일 미국 정치의 심장부인 워싱턴 의사당 의원실 앞에서 '의회를 되찾자'는 농성을 벌였다. 정치권의 무능과 비리에 대한 비판과는 별도로 "기업이 로비를 통해 의회를 사들였기 때문에 우리가 강제 해산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의회와 백악관 근처 내셔널 몰 인근에서 '국민의 캠프'(People's Camp)라는 이름으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시위대는 2012년 여름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될 대선 유세 기간 동안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는 등 한 단계 높은 시위를 준비 중이다. '평화로운 텐트' 시위에서 벗어나 기습적인 플래시몹 등 다양한 방식의 게릴라 시위를 통해 공격적인 역습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2012년을 점령하라!"... 99%의 역습?

미국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 수천명이 2011년 마지막날인 12월 31일 밤 월스트리트 인근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대의 구호는 '2012년을 점령하라'였다. 사진은 시위를 알리는 포스터 (출처 -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 홈페이지)
 미국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 수천명이 2011년 마지막날인 12월 31일 밤 월스트리트 인근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대의 구호는 '2012년을 점령하라'였다. 사진은 시위를 알리는 포스터 (출처 -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 홈페이지)
2011년 마지막 날 밤 벌어진 시위대의 거리 행진에서 등장한 구호는 '2012년을 점령하라'였다. 공교롭게도 12월 30일 타계한 고 김근태 통합민주당 상임고문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블로그 글의 제목 역시 '2012년을 점령하라'였다. 특히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를 언급하면서 2012년 치러질 총선과 대선에 시민들의 참여를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지난해 12월 26일 농성장에서 마지막으로 본 버크는 여전히 바빠 보였다. 한 사람과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와 대화를 하기 위해 뒤로 줄을 선 사람이 3~4명쯤 됐다.

그에게 물었다. '한국의 99%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짧은 그의 대답은 2012년 한국과 미국에서 벌어질 99%의 역습을 예고하는 듯했다.

"압제에 대항해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당신들의 권리라는 것을 기억해라.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함께 협동해서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태그:#월가 시위, #월스트리트 점령, #브렌든 버크, #뉴욕,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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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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