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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문화재 표시- 대구동촌역의 경우
 등록문화재 표시- 대구동촌역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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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는 국가가 지정하는 '국가 지정 문화재', 광역지방자치단체가 지정하는 '시,도 지정 문화재', 그리고 문화재 자료, 등록 문화재, 비지정 문화재로 나눠진다. 그 중 비지정 문화재는 국가든 지방자치단체든 그 어느 곳으로부터도 지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를 말한다. 문화재 중에서는 가장 등급이 낮은 것들이다.

물론 가장 등급이 높은 것들은 국가지정 문화재다. 최고 등급인 국보가 있고, 그 외에 보물,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중요무형문화재, 중요민속자료들이 있다. 국가지정 문화재보다 낮은 등급의 문화재는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 들로 지방자치단체의 지정을 받은 것들이다. 시도 지정 문화재 아래 등급의 문화재들에는 '문화재 자료'라는 이름이 주어진다.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인 백불고택이 있는 둔산동 마을 안 골목과 담장 풍경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인 백불고택이 있는 둔산동 마을 안 골목과 담장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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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등록문화재는 무엇인가. 지정문화재가 아니면서 근대와 현대에 만들어진  것들로 보존할 가치가 큰 것들에게 주어지는 이름인데, 문화재청장이 지정한다. 50년은 넘었지만 아직 100년이 채 되지 않은 문화재들이다. 이들에는 '등록문화재 제 303호 대구동촌역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문화재청' 식의 표지판이 붙는다. 그러므로 '등록문화재'라는 말과 '근대문화유산'이라는 말은 거의 동의어로 보면 된다. '현대문화유산'이라는 것은 없다.

대구에는 8점의 등록문화재가 있다. 조양회관, 대구사범학교 본관과 강당, 동산병원 구관, 대봉 배수지, 대구화교협회 건물, 옻골마을 담장, 반야월 역사, 동촌역이 바로 그들이다. 그 중 옻골마을 담장은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인 백불고택이 있는 동구 둔산동 최씨종가마을의 전통적인 담장들을 말하고, 대구사범학교는 지금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가리킨다. 대구화교협회 건물은 약전골목에서 만경관극장으로 내려가는 종로골목 안에 있다. 물론 동촌역과 반야월역은 동촌과 반야월에 있으며, 기차가 서지는 않는다.

동촌역
 동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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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월역
 반야월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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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등록문화재 중에서 가장 답사할 만한 것은 조양회관이다. 조양회관은 대구지역의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건물인데다, 망우공원 안에 있기 때문에 임란의병관, 곽재우기념관, 대구읍성의 정문이었던 영남제일관,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비 등을 함께 답사할 수 있다는 장점까지 지닌 답사지다. 건물 안에 광복회 사무실이 있어서 흔히 광복회관이라 불리는 조양회관 앞에는 서상일 선생 동상도 서 있다.

대구가 낳은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인 동암 서상일 선생은 1887년 생으로, 22세이던 1909년 김동삼 등과 함께 무장항일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한 분이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던 1910년에 나라가 망했는데, 9인 결사대를 조직하여 서울 주재 외국 공사관에 독립선언문을 배포하였고, 만주 등지에서 망명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17년 귀국하였다가 3.1운동 직후 체포되어 '내란'죄로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대구로 내려와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사업을 펼친다. 달성공원 앞 옛날 원화여고 자리에 대지 500평, 건평 138평짜리 2층건물을 짓고, '아침해가 가장 먼저 비치는 집'이란 뜻의 조양(朝陽)회관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은근히 이름 속에 독립의지와 민족의식을 깃들인 것이었다.

조양회관. 광복회 사무실이 있어 요즘은 흔히 광복회관이라 부른다.
 조양회관. 광복회 사무실이 있어 요즘은 흔히 광복회관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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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일 선생 동상. 망우공원 내 조양회관 앞뜰에 세워져 있다.
 서상일 선생 동상. 망우공원 내 조양회관 앞뜰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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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회관을 짓는 데 들인 경비는 선생이 거의 혼자서 부담했다.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퇴학당한 이육사도 북경으로 가기 이전에는 조양회관에서 활동을 했다. 애국청년들의 잡합장소였던 조양회관은 식민지 시대 내내 일본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지만, 시국강연회 잡지발간 등 많은 활동을 펼쳤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천왕의 항복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거리로 뛰어나와 만세를 부른 사람들도 이 건물 안에 모여있던 청년들이었다. 

3.1운동 직후 감옥 생활을 했던 서상일 선생은 1929년 10월 18일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폭파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다시 구속된다. 해방 후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정치활동을 시작하지만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다 구속되기도 한다. 박정희의 군사정부도 그를 기소하였고, 재판 중인 1961년 4월 18일 타계한다.

그는 '진보'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보수 일색의 대구 '정치사'에서 주로 외면받아 왔다. 하지만 조양회관을 세우고 청년교육에 매진한 독립운동의 업적은 근래의 일인데다 너무나 뚜렷한 증거가 남아 있어 아무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1982년에 망우공원 안으로 옮겨진 조양회관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주도로에서 비켜나 구석진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2004년 4월 28일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지금도 눈비를 맞으면서도 형형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태그:#등록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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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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