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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2일 오후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한미FTA 협상 타결 기자회견에서 김종훈 수석대표와 웬디 커틀러 수석대표가 악수를 하고 있다.
 2007년 4월 2일 오후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한미FTA 협상 타결 기자회견에서 김종훈 수석대표와 웬디 커틀러 수석대표가 악수를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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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과 호주 두 나라가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 이하 FTA) 때문에 시끌벅적하다. 우연의 일치인데, 그 논쟁의 중심에 투자자-국가 소송제도(Investor-State Dispute, 이하 ISD)가 놓였다.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 한국 : 미국 상하 양원에서 이미 통과된 한·미FTA 비준동의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야당의 반대에 부딪혔다. 야당은 ISD 조항을 독소조항으로 규정하면서 "최악의 경우 ISD 조항만이라도 빼자"고 주장하고 있다. 여당은 "참여정부가 포함시킨 조항으로 근거 없는 정치공세"라며 비준을 서두르고 있다.

▲ 호주 : 호·미FTA는 2004년 2월에 타결되어 같은 해 10월에 비준됐다. 그 당시 농업분야에서 대폭 양보한 끝에 ISD 조항을 배제했다. 그런데 최근 미국 다국적기업이 새로운 형태의 슈퍼바이러스처럼 되살려서 ISD 시스템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투자자-국가 소송제도(ISD)는 괴물인가? 

생소한 시사경제용어 ISD는 외국 투자자(대부분 다국적기업)가 투자 대상국 정부의 정책으로 손해를 입었을 경우, 투자 유치국의 사법기관이 아닌 세계은행에 설치된 국제상사분쟁재판소(ICSID)에 소송을 제기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제도를 일컫는다.

ISD 조항이 안고 있는 문제는 해외 투자자가 분쟁으로 사업을 포기했을 경우, 향후에 발생이 예상되는 이윤까지 손해로 계산하여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호주에서는 ISD 대신 ISDS(투자자-국가 분쟁 해결, 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1994년 미국은 캐나다, 멕시코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했다. 협상 과정에서 별다른 고민 없이 ISD 조항을 포함시켰던 캐나다와 멕시코 정부는 미국 투자자들로부터 소송을 당해 거액을 보상해준 다음(각각 1억5700만 달러, 1억8700만 달러) 그 심각성을 깨달았다.

한편 호주의 대표적인 경제석학 로스 가노 교수(호주국립대, 초대 중국대사 역임)는 "ISDS라는 괴물이야말로 미국이 어떤 목적을 갖고 FTA 협상에 임하는지 가늠할 수 있는 척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2007년 3월에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했다.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중인 로스 가노 교수.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중인 로스 가노 교수.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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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D 조항 제외한 호주와 이스라엘

현재 미국과 FTA협정을 체결한 17개 국가 중에서 호주와 이스라엘이 협상을 통해서 ISD 조항을 제외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포괄적 FTA가 아닌 상품교역 분야에 한정하여 FTA를 체결했기 때문에 ISD가 유발하는 통상주권 위협이나 불평등 조약 등의 논쟁에서 제외된다.  

결국 호주가 남게 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많은 얘기들이 떠돈다. "호주와 미국이 보통법(Common law)을 수용한 영미법(英美法) 국가들이어서 국내외적으로 성숙한 법집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ISD 조항이 필요 없다"는 주장이 가장 많다. 또 하나는 "호주 광물자원에 투자한 외국 투자자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호주국영 abc-TV가 보도한 내용을 보면 이렇다. 호·미FTA는 1992년 미국이 먼저 제안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오자 호주 측에서 멈칫거렸다. 그러다가 2003년 3월에 본격적으로 협상을 개시하여 2004년 2월에 타결했다.

협상 과정에서 호주는 미국의 설탕시장에 대한 보호조치를 인정, 쿼터와 관세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대신 제약부문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인정받았다. 농업부문 협상의 최대관건이었던 설탕의 무관세 수출이 저지된 것. 그 결과 호주의 설탕업계가 강하게 반발했다.

농업부문 대폭 양보하고 ISD 제외한 호주

그러자 호주 측 협상대표였던 마크 베일 통상장관(농민 이익을 대변하는 국민당 소속)은 "호주에 큰 이익이 되는 협상을 마무리하기 위해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큰 틀에서 보면 결코 호주에 불리한 협상은 아니었다"고 강변했다.

바로 이 '큰 틀' 속에 ISD 변수가 숨어 있었다. 농업부문을 대폭 양보하고 얻어낸 결과였던 것. 농촌지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자유-국민 연립당 정부는 우군이라고 할 수 있는 농민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러나 정부는 호·미FTA에서 ISD 조항을 제외시키는 것이 표를 얻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호주가 처음부터 ISD가 독소조항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건 아니다. 녹색당 소속 봅 브라운 상원의원(현 녹색당 당수)이 평소 친하게 지내던 캐나다 국회의원으로부터 ISD의 위험성(특히 환경 분야)을 전해 듣고 동료의원들에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브라운 상원의원은 FTA 자체를 반대하는 강경론자로 "자유무역 협상이 호주에서 중요한 법적 보호 장치의 토대를 무너지게 한다"고 말한 바 있다.

ISD 잘 몰랐던 반기문, 정동영, 마크 베일

기왕에 ISD 얘기가 나왔으니 <오마이뉴스>에 보도됐던 비화 하나를 소개한다. 미국을 상대로 한 FTA 협상을 주도했던 한국과 호주 주무장관들인 반기문 전 외교통상부 장관과 마크 베일 전 호주 통상장관이 ISD의 실체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반기문 전 장관은 '투자자-정부 제소권' 몰랐을까?> 참조). 왜 그랬을까?

그 당시 반 장관은 UN사무총장으로 선출되기 직전이어서 경황이 없었던 것 같고, 베일 장관은 농촌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민당 출신으로서 호주 농민의 피해를 줄이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또한 최근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은 "그 당시 ISD를 잘 몰랐다"는 반성문을 썼다. 앞에 소개한 로스 가노 교수도 호·미FTA 협상 막판까지 ISD 조항을 몰랐다고 한다. 로스 가노 교수는 "나도 처음에 그 조항 얘기를 전해 듣고 귀를 의심했다. 호주는 미국과 체결한 FTA에서 얻은 게 없다(nothing)고 생각하는데, 그나마 유일하게 얻은 소득(something)이 ISD 조항을 제외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로스 가노 교수는 호·미FTA를 평가하면서 "호주는 다 주었지만 얻은 게 없었고 미국만 몽땅 챙겼다(Australia took nothing, USA took everything)"고 결론지으면서 "세계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 다자 간 협정인 WTO와 도하개발어젠다(DDA)만 잘 활용하면 충분한데, 굳이 양자 간 협정인 FTA를 고집하는 미국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호주-미국 FTA 6년 평가는?

호·미FTA는 두 나라 의회에서 비준을 받는 과정에서도 명암이 엇갈렸다. 진통을 겪은 호주와 달리 미국 의회는 협상 타결 직후 바로 비준한 것. 그 당시 노동당 리더였던 마크 레이썸은 "미국이야 몽땅 챙겼으니 의회가 쉽게 비준해주었겠지만, 호주는 과연 무엇을 얻었는지 면밀하게 검토한 다음 신중하게 비준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호·미FTA는 호주 상원에서 두 번 부결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은 끝에 의회 회기를 하루 남겨놓고 비준됐다. 그나마 연방 총선일자 등을 고려한 고육지책의 비준이었다. 이를 두고 가노 교수는 "끝까지 정치적 흥정의 징후마저 보여서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편 2010년 11월에 호주 생산성위원회(Productivity Committee)가 내놓은 최종 보고서의 평가는 로스 가노 교수보다 훨씬 더 점수가 낮다. 호주국영 abc-TV에 출연한 페트리샤 스코트 위원장은 "여러 케이스를 종합해보면 FTA가 무역규모를 축소시킨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ISD 조항 제외 결정' 무력화시키는 미국 다국적기업

지난 4월, 줄리아 길러드 호주 총리는 "향후 발생할 FTA 협정에서 호주 정부는 더 이상 ISD 조항을 포함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호·미FTA 협상 과정에서 ISD를 제외시키기 위해서 호주가 그에 상응하는 양보를 감수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언뜻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었다.

그러나 길러드 총리의 선언에서 미국 다국적기업과 외국 투자자의 탐욕적인 공격으로부터 호주 국민의 공공분야 이익을 보호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읽혔다. 미국 다국적기업이 기상천외한 공격으로 ISD 조항 제외 결정이 무력화되자 반격에 나선 것. 그 속사정은 이렇다.

호주 흡연자들은 니콜라 녹슨 보건장관을 저승사자라고 부른다. 녹슨 장관이 흡연율을 낮추기 위해서 담뱃갑에 섬뜩한 사진과 경고문을 넣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구강암에 걸린 흡연자의 입술과 시력을 잃은 눈동자를 클로즈업한 섬뜩한 사진들이 담뱃갑에 인쇄된 것.

그뿐이 아니다. 2012년 1월부터 모든 담뱃갑에 광고 문구와 사진은 물론 담배회사 로고를 넣는 것까지 금지하기로 했다. 반면에 담배회사 이름과 상품명은 담뱃갑 하단에 아주 작은 크기로 넣게 만들었다. 

호주에서 판매되는 답뱃갑 디자인.
 호주에서 판매되는 답뱃갑 디자인.
ⓒ 호주국영 abc-TV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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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정부 상대로 '담배광고 전쟁' 선포한 필립모리스

호주 정부의 강력한 조치에 담배회사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거대 담배회사인 필립모리스가 뜻밖의 대응조치를 발표했다. 호주 정부를 상대로 ISD 소송을 제기하면서 수천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발표한 것.

호·미FTA에서 ISD 조항을 제외시켰기 때문에 미국 다국적기업이 소송을 걸어올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던 호주 정부가 큰 혼란에 빠졌다. 호주 국민의 흡연으로 발생하는 의료비 지출과 피해액(매년 약 36조 원)이 엄청나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시민사회도 발끈했다.

그러나 필립모리스가 미국 본사나 호주 자회사가 아닌 홍콩 자회사를 통해서 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아연실색했다. 호주 정부가 이미 홍콩을 상대로 ISD가 포함된 통상 및 투자협정을 맺었기 때문이다. 다국적기업이 ISD 조항을 제외한 호·미FTA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기상천외한 방법이 나타난 것.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호주 정부는 "향후에 발생하는 FTA 협상에서 ISD를 제외하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ISD 조항을 제외한 미국이 태평양 동반자 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Agreement, TPPA) 멤버일 뿐만 아니라, 미국 다국적기업들이 호주의 FTA 상대국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호주는 미국, 뉴질랜드, 싱가포르, 태국, 칠레, 아세안국가 등과 FTA를 체결했고 한국,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와 협상을 벌이는 중이다. 이 중에서 미국은 호주가 추진하고 있는 태평양 동반자 협정 멤버이기도 하여, 호·미FTA 기준으로 하면 ISD 조항 제외 국가이지만 TPPA를 기준으로 삼으면 그 반대가 된다.  

한국-호주 FTA 2011년 안에 타결될까?

이쯤에서 한·호 FTA로 돌아가보자. 케빈 러드 호주 외무부 장관이 한·호 수교 50주년을 맞은 2011년 안에 한·호 FTA 협상이 타결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지난 4월에 "한·호 FTA는 큰 틀에서 보면 합의된 사안이다. 언제 끝날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올해 안에 타결되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

케빈 러드 장관은 이어서 "이명박 대통령과 줄리아 길러드 총리가 성공적인 타결을 약속했기 때문에 담당 장관으로서 협상 타결 일정이 앞당겨지도록 노력하는 중"이라며 "한국은 제조업, 호주는 에너지광물 차원에서 접근해 왔지만 금융, 의료, 서비스 분야에도 혜택이 많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 3월 4일, 시드니 노보텔호텔에서 월드옥타(World OKTA) 시드니지부 주관으로 열린 '한·호 FTA 체결 촉진대회'에 참석한 호주 측 협상대표도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러드 장관과 똑같은 의견을 밝혔다. 그는 "급박한 세계경제의 흐름이 빠른 타결을 요구하는 상황이어서 협상이 막바지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해가 잘 안 되는 대목이 있다. 지난 4월에 발표한 'ISD 조항 배제 원칙'이 한·호 FTA에 적용되지 않는 것. 지난 4월, 호주 정부는 새로운 통상정책을 채택하면서 "향후에 체결할 FTA에서 ISD 조항을 제외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유독 한국을 제외시킨 이유가 뭘까?

한-호 FTA 협상 개시에 합의한 한-호 정상.
 한-호 FTA 협상 개시에 합의한 한-호 정상.
ⓒ 외통부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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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FTA, #ISD, #투자자국가소송제, #자유무역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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