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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향원정
 경복궁 향원정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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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면 늘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경복궁을 물들이는 붉은 단풍이다. 설악산에 단풍이 들 무렵, 향원정 연못가를 둘러싼 나무들 역시 울긋불긋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그럴 때면 경복궁 역시 완전히 다른 세계로 변모한다. 설악산에서 보는 단풍과는 또 다른 멋이다. 사실 경복궁 단풍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처럼 인상적인 풍경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한때 경복궁을 내 집안 정원처럼 드나들던 때가 있었다. 광화문 근처에 있던 회사 건물로 출퇴근을 하던 때의 일이다. 점심 때 시간이 남을 때는 더러 산책 삼아 고궁 안마당을 어슬렁거리며 걸어 다니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게는 그때가 '호시절'이었다. 서울 시민이라고 해서 아무나 아무 때 경복궁을 드나들 수 있는 건 아니다.

경복궁 돌담길
 경복궁 돌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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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경복궁은 다른 고궁들과 마찬가지로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빛바랜 유적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평상시 너무 익숙하게 보고 들어온 탓에, 실제 실물을 마주하게 된다 해도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그런 물건들 중에 하나였다.

처음에는 경복궁을 새롭게 받아들일 겨를이 없었다. 매일같이 광화문을 지나치면서 그 안에 뭐 별다른 게 있을까 싶었다. 예전에 다 보았던 거겠지, 이미 다 익히 알고 있던 것들이겠지 짐작했던 게 틀림없다. 겉보기에는, 광화문 안쪽에 존재하는 세상 역시 광화문 바깥에서 겪는 세상만큼이나 건조해 보였다. 특별히 시간을 내서 찾아갈 곳이 아니었다.

경복궁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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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 경복궁이 들어오기 시작한 건, 광화문으로 출퇴근을 하던 그 해 가을이었다. 점심 식사를 하고 난 뒤에 산책 삼아 거리를 걷다가 발길이 경복궁 앞에 다다랐다. 그러다 내친 김에 경복궁 안쪽 너른 마당으로 들어서게 됐는데 그곳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과 마주쳤다.

마당 한쪽에 가지가 온통 붉게 물든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하늘로 치솟은 나뭇가지들이 마치 화염에 휩싸인 듯 빨갛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나무는 경복궁 밖 자동차들이 떼 지어 달리는 검은 도로와 하늘을 가리고 선 높은 회색빛 건물들 사이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색감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느낌이 이럴까? 결국 그 나무가 나를 경복궁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경복궁 자경전 담장 밖 은행나무
 경복궁 자경전 담장 밖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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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가을은 참으로 황홀했다. 경복궁은 평소 내가 알고 있던 곳이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경복궁은 오랜 세월 죽어 있는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우중충한 빛깔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지극히 낡고 오래된 건물에 지나지 않았다. 단청마저 흙물이 든 누런 대리석 같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해 가을에 본 경복궁은 여전히 인간의 더운 숨결이 묻어나는 살아 있는 공간이었다. 향원정 연못가 홍단풍이 손을 갖다 대면 데일 듯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자경전 붉은 벽돌 담장 밖 은행나무는 세상을 모두 품어 안을 듯 넓고 큰 몸으로 하늘 높이 노랗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경복궁 향원정
 경복궁 향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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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동안 경복궁을 역사 속에 사라져가는 죽은 공간으로 인식한 건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경복궁은 결코 퇴락한 공간이 아니었다. 경복궁은 매해 가을마다 600여 년 전 이곳에 새로운 국가를 세우던 때의 가슴 벅찬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가을은 경복궁이 매번 새롭게 되살아나는 계절이었던 것이다.

올해 다시 경복궁을 찾았다. 하지만 올해는 단풍이 예전만 못하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미처 대비를 하지 못한 탓일 게다. 경복궁 단풍이 절정에 다다르려면 아직은 조금 더 기다려 볼 필요가 있을 듯싶다.

사계절의 경계가 점점 더 희미해지는 탓인지 올해 단풍이 물드는 시기 역시 예전 같지 않다. 더디 와서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빠르게 절정에 다다를 거라는 소식이다. 이런 추세라면 아마도 조금 늦었다 싶을 때가 우리가 기다리는 절정이 될지도 모르겠다.

관악산 연주암.
 관악산 연주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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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뉴스를 보면서 다시 경복궁을 떠올렸다. 설악산 단풍여행을 떠난 차들과 사람들이 설악산 국립공원으로 진입하는 도로 위에 멈춰선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도로는 주차장이 되고, 그 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차를 버리고 설악산을 향해 줄을 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설악산 단풍이야말로 그런 수고가 전혀 아깝지 않은 풍경임에 틀림없다. 거기에는 분명히 차에 밀리고 사람에 치이는 고생을 하고도 기어코 그곳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경복궁이나 그밖에 자신들 주변에 다가와 있는 가을과는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궁금했다. 혹 등잔 밑이 어둡다고,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마냥 잊고 사는 건 아닌지.

관악산 연주암 오르는 등산로.
 관악산 연주암 오르는 등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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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도 단풍으로 유명한 곳이 여러 곳이다. 단풍이 일찍 들기로 유명한 관악산 등산로 입구 약 2km 되는 구간에 단풍나무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5,6km에 달하는 중랑천 제방은 왕벚나무와 느티나무 단풍이 유명하고,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삼청터널까지 이어지는 1.5km 구간에 걸친 삼청동길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단풍이 아름답다.

그리고 양재시민의숲, 석촌호수, 올림픽공원, 보라매공원 등도 단풍 명소로 꼽힌다. 찾아보면 꽤 많은 곳에서 단풍을 즐길 수 있다. 교통체증을 무릅쓰고 달려가 설악산까지 무거운 등짐 짊어지고 올라갈 필요 없이, 그냥 언제든지 내 맘 내킬 때 김밥 한 줄 싸들고 찾아가 보기 적당한 곳들이다. 가을 소풍 장소로 제격이다.

창경궁 앞 매표소
 창경궁 앞 매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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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안쪽에 서 있던 그 붉은 나무는 광화문 복원을 하기 전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런데 복원 공사를 마치고 난 뒤 주변 조경을 새로 하면서 어느 사이엔가 잘려 나갔다. 유적을 복원하면서 그 와중에, 또 다른 역사를 간직했던 사물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셈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텐데, 나는 인간의 역사를 위해 그 나무의 '역사성'을 소홀히 한 점이 못내 아쉽다.


태그:#단풍, #경복궁, #향원정, #광화문, #관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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