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언젠가 대학로의 3일간의 풍경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대학로는 고된 현실 속에서 공연을 고집하는 군상들을 비추어주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처해진 현실이 가혹할지언정 연극은 포기할 수 없는 것으로 그려졌지요. 카메라 너머 현실 속에서 내일을 다짐하는 젊은 연기자, 중견 연극인, 기대에 부푼 관객들은 연극의 희망적인 미래를 증명하는 듯 보였습니다.

과연 그렇기 만한 것일까요. 저는 다르게 보았습니다. 카메라의 따뜻한 시선이야 어쨌든 그 다큐 속에서 배우들은 열정을 담보로 착취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다시 관객에게 열성적인 강요로 이어졌지요. 한편으로 대학로를 차지한 '연극' 의 위세도 새삼 느껴졌습니다. 제가 너무 얄팍하게, 삐딱하게만 본 것일까요.

2011년 지금, 여기의 대학로는 낙천적인 문화적 활기와 비극적인 현실이 교차되는 곳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연극이 있기에 활기가 있지만, 연극만 있기에 비극적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발전은 있는데 변화가 없다거나, 혹은 변화는 있는데 발전은 없는 사회와 문화계의 비대칭적 양상이 대학로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연극, 변화, 비대칭이라는 말을 상기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술가들, 가상의 세계에서 작업실을 열다

웹 2.0 시대의 예술가들은 자기 공간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는 시각, 청각, 문자 예술가들이 온라인 공간에서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웹사이트는 10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다만 이를 채워 넣을 콘텐츠라든지 이를 실현시킬 개인적 기술 장비들 혹은 이를 받아들일 수요가 적었지요.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조형 예술가들은 자기 이름을 건 웹사이트에서 갤러리를 열고, 스마트폰으로 찍은 영상이 웹페이지에 걸리고, 집에서 스스로 연주한 퍼포먼스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세계의 공통적 현상이라면, 우리만의 독특한 현상으로는 '웹툰' 이라는 만화 공간과 '문학 웹진' 등 지면을 대신한 화면이라는 가상 공간을 꼽을 수 있겠지요.

예술가들이 왜 가상의 장에서 자기 공간을 열게 되었을까요. 장르마다 다른 이유들이야 있겠지만, 결국 한정된 표현 공간의 한계를 넘기 위한 해결책으로써 제시된 대안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문제는 문화 권력과 상업 권력의 공간 독점화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공간을 부여받지 못한 예술가들이 공간을 통제하는 권력을 제치고 관객과 직접 소통을 위해 대안 공간을 창출해낸 것이지요.

구분하자면 온라인 공간의 변화와 맥을 같이한 스튜디오 아트(studio art)는 돌파구를 찾았고, 온라인 공간을 활용하기 어려운 스테이지 아트(stage art)는 더욱 큰 시련을 맞았습니다. 전반적으로 직접소통이 늘어나고, 전달의 방향성이 다양화되면서 수용자들은 그러한 변화의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발전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그러한 양상 가운데 실제적 장소에서만 표현이 가능한 스테이지 아트는 점점 더 불리해지고, 절실해져 간 것은 분명하지요. 즉, 누군가에게 실제적 공간은 의미가 없어진 반면에, 누군가에게는 더욱더 큰 가치와 의미로 다가온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공간'이란 헤게모니 투쟁의 장

이천년대를 지나오면서 우리 사회에서 '공간' 은 굉장히 다층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사람들이 몰리던 문화적 중심 '공간'이 예술가와 관객의 일상적 영역이었다면, 이제는 그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헤게모니 투쟁의 장이 됩니다. 상업과 문화만이 아니라, 사용자-노동자의 작업 공간이자, 부동산 문제까지 결부된 소유자-세입자의 존재 영역으로 확대 되지요. 자본을 가진 자는 사적인 영역에 자기 공간을 마련하고, 권력을 가진 자는 공적인 영역에 자기 공간을 부여받습니다.

대학로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한정된 부동산 중 일부는 빌딩과 땅을 소유한 개개인의 몫이며, 일부는 문화 권력을 소유한 전문가들의 몫일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대학로의 주인은 결국 관객도 아니고 예술가도 아니고 이들일 지도 모르지요. 물론 문화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듯 대학로도 누군가의 전용공간은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공공극장은 세금을 낸 시민들의 것이라야 맞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상업화된 혹은 사유화된 공간에 대해서도 어찌어찌 나쁘다고만 말할 수도 없지요. 상업공간이라고 해서 문화예술을 억압할 의도로 자리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들도 대체로 대학로의 공연문화가 활성화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니까요.

현재 대학로에는 100여개의 소극장이나 문화공간들 보다 갖가지 상점들이 눈에 띈다.
 현재 대학로에는 100여개의 소극장이나 문화공간들 보다 갖가지 상점들이 눈에 띈다.
ⓒ 정진세

관련사진보기


'대학로'적인 가치란 도대체 무엇일까

대학로라는 공간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국 공연이라는 무대 장르의 특성상 공간이 매우 중요하며, 그 공간의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점유하고 있는가, 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공연력을 발생시키는 주된 요소가 '공간' 이라는 점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조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왜 대학로에서 공연을 보아야 하며, 왜 대학로에서 공연을 해야만 할까요. 대학로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도 발생합니다. 대학로가 가지고 있는 '대학로' 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모르니까 알아야 된다는 당위론적 입장 말고, 왜 알아야 하는지를 먼저 따져 물어야 할 것입니다. 혹은 왜 알기 어려운지도 살펴볼 수 있겠지요. 그런 과정에서 지금 대학로의 가치가 너무 과대평가된 것은 아닌가, 자유의 의미가 허위로만 남아있지는 않은가, 연극 공동체가 그저 거리상으로만 가까이 있고, 서로 대화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대학로의 상징은 늘 젊음의 문화로 대변되곤 했습니다. 그 이름에서부터 지성과 젊음의 뉘앙스가 풍겨나지요. 잘 들여다보면 7,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 대학로를 누비던 젊은 세대는 각각 그 화두를 달리했습니다. 여기서도 비대칭적인 양상은 발견됩니다. 젊음의 의미와 효과가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있는데, 그 '장소' 는 예전 그대로 지난 가치와 정신을 표방하기에 나오는 시차적 어긋남입니다. 그 대표적인 공간이 마로니에 공원이지요. 그 비대칭적 양상의 공간에서는 정치적인 행사를 해도 어색하고, 문화적인 행사를 해도 어색합니다. 정치적인 행사는 자유와 투쟁의 가치를 끌어오지만, 열광하는 젊은이들이 없고, 문화적인 행사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지만 괜한 열기와 소음이 부자연스럽습니다. 결국 젊음의 주체인 젊은이들은 그 수만 많을 뿐이지, 그 공간의 진정한 주체가 아니라는 데 원인이 있겠지요.

대학로에서 벌어지는 투쟁들 
(위 행사는 기사의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대학로에서 벌어지는 투쟁들 (위 행사는 기사의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 정진세

관련사진보기


창작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금의 젊은이들은 연극이 절정이거나 이를 지나던 시기에 태어났고, 점점 추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한편, '시장' 의 관점에서 연극이 문화상품으로 급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지요. 그러니까 이들에게 공연이란 지켜내야 할 정신이면서 동시에 상품화해야하는 재화입니다. 이들은 지금 재능 있는 또래 동료들이 방송과 영화에서 활약할 때 소수의 동지들과 고군분투하는 중입니다. 386세대 연극인이 그 윗대의 선배 연극인들과 많은 동료들을 갖고 있는 것과는 상황이 조금은 다르지요. 그나마 소수의 동료들도 거의 다 서바이벌을 위한 경쟁 상대입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젊은이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이들은 예술 활동의 참여자 혹은 종결자로 존재해야만 하는 관객이기 보다는 그저 떠돌이에 가깝습니다. 그들에게는 상업적인 공연은 너무 비싸고, 미학적인 공연은 너무 어렵다는 이유도 있겠습니다. 소통이 어려운 것이지요. 지금이 공연들이 관객을 너무 모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대학로' 의 '대학' 은 지성과 젊음의 '대학생' 을 명시하는 게 아니라 창작자의 주요 직업인 '대학' 교수이자, 관극의 주요 목적인 '대학' 과제를 의미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지금의 경쟁적이고 억압적인 대학생들의 상황이 대학로에서도 재현되기에 '대학로 맞다' 고 주장할 수도 있겠습니다. 혜화동의 지리적 역사나, '대학로' 명칭의 기원을 살펴볼 때, 이 장소는 최고 지성들의 산실이었으므로 엘리트 중심으로 가는 것이 '전통적으로 옳다' 고 할 수도 있겠지요. 씁쓸한 농담이었습니다만, 이제는 과연 대학로가 다양성, 자발성 등의 요새 젊은이들 감성을 잘 표현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됩니다. 결국 여기저기도 속하지 못한 공간 없는 주체들은 공간 혹은 자본의 지원을 기다리거나 자발적 (혹은 타의적으로) 대학로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되겠지요. 그 기다림의 시간은 결국 내면화 혹은 자숙의 기간으로 되돌아옵니다. 원인은 구조에 있을 터인데, 마치 자기 자신이 원인인 냥 내공부족을 탓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공연은 과연 투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연극판에서 세대간의 투쟁이 '지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랫' 세대는 '윗' 세대를 거스르지 못하며, '윗' 세대는 '아랫' 세대에게 본보기가 되지 못합니다. 실상 젊은이들은 상업권력을 향해 투쟁해야 할지, 문화권력을 향해 투쟁해야 할지 혹은 기성 세대를 향해 소리를 질러야 할지, 다같이 어려운데 싸우는 게 맞는지 참 난감합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투쟁은 결국 무분별한 상업적인 움직임에 반대하고, 기성의 미학에 맞서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해달라는, 인정투쟁일 것입니다. 발언권을 달라는 공간 투쟁일 수도 있겠지요.

물론 투쟁에 앞서 선행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겠지요. 공연이 투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즉, 과연 나는 '공연' 때문에 내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혹은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누군가와 맞설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왜 공연을 하는가, 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나서도 절실함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왜 투쟁이 필요한지도 알 수 있겠지요. 그 질문은 다시 상대에게 던질 수 있습니다. 당신은 왜 연극을 하는가. 연극을 출세의 수단으로, 입신의 수단으로 사용하지는 않는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시켜주는 수단으로 연극이 도구화된 것은 아닌가.

대학로 한 버스정류장에 붙어있는 공연포스터들 (위에 공연 포스터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대학로 한 버스정류장에 붙어있는 공연포스터들 (위에 공연 포스터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 정진세

관련사진보기


도대체 왜 우리는 공연을 하며, 왜 연극을 보는 것일까요. 연극이 세상을 바꾸고 사회에 강력하게 발언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연극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명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뛰어난 명작을 만들어서 대중들을 사로잡아야 하고, 그래서 연극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지요. 관객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 이유일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젊은이들에게 연극은 재미있고, 즐겁고, 행복한 것, 즉 '놀이' 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가장 힘이 센 답이지요. 그러니까 때와 장소를 가리면서 눈치보며 놀 필요는 없습니다. 타인의 강요에 의해서 놀 필요도 없구요. 대학로에 놀 자리가 없다고 해서 무한정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다행히도 대학로에서는 의미심장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전용 상연기회 마련, 기성극단의 멘토 제도, 초저예산 공연, 스튜디오형 공연 등등 실업구제제도와 유사한 작업들이 계획되고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시행은 결국 뜻있는 중견 창작자들로부터 혹은 문화단체로부터 시혜적으로, 나눠주는 방식으로 판이 형성됩니다. 그 틀에서 보면, 역시나 눈치가 보이는 일이지요. 결국 공연계의 문제는 공간의 문제이며, 여기서 존재감을 발휘해야만 하는 주체의 문제겠지요. 주체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공간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생겨날 것입니다.

대학로를 다른 시각에서 보았습니다만, 이 또한 하나의 의견이지요. 대학로에서 소외된 젊은이들의 입장에선, 지금 권력에 대한 견제도 있어야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투쟁도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야기가 길어졌고 다소 격앙되었습니다. 한국의 공연예술가 혹은 연극인에게 '대학로' 는 단순히 소통의 공간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인격과 주체성이 만들어지고, 성장하는 공간일 것입니다. 그 안에서 어떤 누군가는 열정과 재능을 저당 잡히고 무한정 성장하지 않는 '어린' 존재로만 남아있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이번 호에서 다루려고 했던, 홍대 앞 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번으로 미루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본의 아니게 편을 가르고, 어느 한쪽에 무게를 둔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재차 강조하자면,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어느 한쪽에 무게를 싣기 보다는 한명의 관객으로써, 예술을 향유하는 주체로써 냉정하게 현상을 인식하기를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에 이은 3부 내용이 추가될 예정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