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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뉴스에서 가을 산의 단풍 절정 시기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걸 보니 가을이 깊어감을 실감하게 된다. 더불어 가을 들녘의 벼익는 소식도 전해주면 더 좋았겠다 싶은 건, 자전거 여행을 즐기는 나같은 사람들에게 벼들이 노랗게 익어가는 황금빛 평야는 또 다른 아름다운 가을 풍경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세 계절을 지나면서 인간의 정성과 노고를 통해 생겨난 풍경이기에 감동까지 더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멀리서 보면 조금씩 색깔이 다른 모자이크 작품같은 가을 들판 사이로 자전거 타고 달리는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나는 가을 산의 단풍보다 가을 들판의 금벼들이 더 좋다. 더욱이 벼가 익어가는 가을 들녘을 만나러 가는 건 한낱 볼 거리를 구경하러 가는 여행 이상의 의미가 있다. 식량 자급률이 30%도 안되는 이 분야 OECD 회원국 중 최하위의 나라에 그나마도 한미 FTA로 곧 수입쌀이 밀려들 예정인 이때, 수천 년간 우리를 먹여 살려온 금싸라기 땅과 수고하시는 농부, 농모님들을 직접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안타깝기도 하고 아름다우며 애틋한 가을 평야가 펼쳐져 있는 곳 중의 하나가 섬진강변이다. 섬진강 오백리 물길 중 가장 너른 들을 자랑하는 평사리 들녘이 그곳으로, 얼마전 돌아가신 박경리 선생님의 대하 소설 <토지>의 배경이기도 하다. 게다가 고갯길이 없는 평탄한 섬진강변길은 자전거 여행자에게 주변 풍광을 감상하며 달릴 수 있는 편안함과 여유로움까지 선사해주는 고마운 여행지이다.

서울 남부버스터미널에서 애마 자전거와 함께 섬진강변의 화개 버스터미널을 향해 떠나 보았다.

대장간 아저씨의 망치질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던 화개 장터의 아침
 대장간 아저씨의 망치질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던 화개 장터의 아침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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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물과 바닷물이 합쳐지는 곳에서 사는 재첩을 걷는 섬진강의 아낙네들
 민물과 바닷물이 합쳐지는 곳에서 사는 재첩을 걷는 섬진강의 아낙네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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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 위로 흐르는 섬진강변의 고즈넉한 가을

화개 버스터미널에 내리자 이제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화개 장터가 맞이한다. 오일장날은 아니지만 부지런한 상인들은 이른 아침에 나와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아침 식사로 재첩국을 개운하게 먹는데 대장간에서 들려오는 망치질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 온다. 시끌벅적한 장터 분위기도 좋지만 이렇게 고요한 아침 시장 분위기도 괜찮구나 싶다.

이처럼 가을날의 섬진강은 어느 곳이나 고즈넉하다. 강변길이자 한적한 19번 국도를 따라 평사리 들판을 향해 강물이 흐르듯 천천히 페달을 밟는다. 길가에는 지난 봄 짧지만 찬란하게 피어났을 오래된 벚꽃나무들이 화장을 지운 우리네 여인들처럼 생경한 모습으로 도열해 있다. 멈춘 듯 하기도 하고 흐르는 것 같기도 한 강가에 왠 아낙네들이 모내기 하듯 허리를 숙이고 물질을 하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모래 속에서 새끼손톱만한 조개를 걷고 있는데 바로 아까 먹었던 섬진강의 명물 재첩이다.

섬진강 오백리 물길 중 가장 너른 들을 자랑하는 곳이 평사리 들녘이다.
 섬진강 오백리 물길 중 가장 너른 들을 자랑하는 곳이 평사리 들녘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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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알이 익어가는 벼들 위로 다정하게 기댄 소나무 두 그루가 서있다.
 알알이 익어가는 벼들 위로 다정하게 기댄 소나무 두 그루가 서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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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리('무딤이들'이라고도 한다), 악양면 이정표를 따라 왼쪽길로 들어서니 고즈넉한 강변 풍경이 금세 고요한 농촌 마을로 바뀐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에 고개를 더 들어보니 저 앞에 금벼들이 황금 물결처럼 출렁거리고 있다. 와~ 이곳이 평사리 들판이구나 한눈에 알 것 같다. 소설처럼 만석지기 두엇은 능히 낼 만한 넉넉한 들판이다. 들판 초입에는 지자체에서 만들어 놓은 허수아비들이 축제를 벌이고 있다. 허술한 허수아비들이지만 구경온 유치원 아이들은 '꺅 꺅' 소리를 지르며 허수아이 사이로 뛰놀고 있어 웃음을 짓게 한다.

보기만 해도 배부른 알알이 성근 벼들 위로 어깨를 다정히 기대고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한데 어울려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내고 있다. 잡식동물인 인간의 먹거리를 위해 피를 흘리며 희생되는 소, 닭, 물고기들과 달리 쌀은 그런 잔인함과 죄책감에서 자유롭다. 가을 추수가 한창인 평야에 서면 오히려 평화를 느끼게 된다. 생전의 박경리 선생님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로 세 가지를 얘기하셨다는데 그 중 하나가 "마른 논에 물들어가는 소리"였다고 한다. 내게도 그런 소리를 들라면 벼와 낱알 사이에서 들려오는 소슬한 가을바람 소리라 할 정도로 들판의 바람소리가 인상적이다.

악양면을 향해 이어지는 길은 '토지길'이라 하여 평사리 들판~동정호~최참판댁~조씨 고택~취간림~악양루를 거쳐 다시 평사리까지 돌아오는데, 약 10㎞의 거리로 자전거를 타고 돌아보기에도 부담이 없다. 악양면 동네 아주머니들의 사랑방격인 '새마을 미용실'에 들어가 '취간림'과 조금은 특이한 동네 이름에 담긴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던 조그맣고 정겨운 마을로 섬진강이 주는 혜택을 한몸에 받은 땅이다.

과즙이 많아 하나만 먹어도 갈증을 풀어준 '배고을' 하동의 배
 과즙이 많아 하나만 먹어도 갈증을 풀어준 '배고을' 하동의 배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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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름을 해결해준 '배고을' 하동의 배맛

남해바다가 점점 가까워지는 섬진강 하류를 향해, 큰 재래시장과 기차역, 하동 8경 중의 하나인 '하동송림'이 있다는 하동읍을 향해 강변길을 부지런히 달려간다. 섬진강은 예로부터 '다사강'(多沙江)이라 불렸다더니 하류쪽으로 내려 갈수록 정말 곳곳에 고운 모래가 많다. 모래없는 강인 한강이 흐르는 도시에 사는 나로서는 더욱 이채롭고 귀하게 느껴지는 풍경이다.

어느 사이엔가 강변길가에 정성스럽게 종이로 싼 큼지막한 배들을 파는 노점들이 연달아 나타난다. 먹음직스런 배들을 봐서 그런지 갑자기 목이 말라오기 시작하더니 결국 어느 노점앞에 멈춰서 혹시 배 한 개만 사도 되냐고 물어보았다. 웃음으로 허락해준 초로의 아주머니는 아기 얼굴만한 배를 건네 주시며 천 원만 내라고 하신다. (종종 있는 자전거 여행자만의 특별한 혜택이다). 배가 하도 커서 과즙으로 갈증도 해소되고 밥 한 그릇 먹은 것처럼 배가 다 부르다.

하동 8경 중의 하나라는 오래된 노송숲 '하동 송림', 가을과 잘 어울린다.
 하동 8경 중의 하나라는 오래된 노송숲 '하동 송림', 가을과 잘 어울린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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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갔지만 결혼을 안하는 딸 걱정을 같이 하며 아주머니와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다보니 이 부근이 온통 배 과수원으로 유명한 '만지 배밭'이란다. (하동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녹차밭, 80만평이 넘는 황금들녘, 임금님 진상품이라는 대봉감, 만지 배밭까지 지리산과 섬진강이 내어주는 것들이 많기도 한 하동은 참으로 복받은 땅이다.

물반 모래반인 하동포구가에 도착하니 강변을 따라 자전거길과 산책로가 잘 나 있다. 산책로를 지나다보면 아름드리 나무들이 용트림을 하듯 꿈틀거리며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데 바로 하동 8경 중 하나라는 '하동 송림'이다. 조선 영조 때 강바람과 모랫바람을 막으려고 조성한 소나무숲인데, 지금은 이렇게 멋진 노송숲이 되어 섬진강 백사장 옆에서 하동 사람들의 편안한 휴식처가 되어 주고 있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오가는 '경전선' 기차가 코스모스와 잘 어울린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오가는 '경전선' 기차가 코스모스와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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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한들 한들 피어 있는 길 ♪ 노래가 절로 나오는 마을이다.
 코스모스 한들 한들 피어 있는 길 ♪ 노래가 절로 나오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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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선 기차를 타고 간 북천역 코스모스 마을  

오일장날엔 큰 시장이 열릴 것 같은 하동군 시장통에 들어가 순대를 사먹다가 얘기를 나누게 된 젊은 시절 '방랑' 좀 했다는 택시 기사 아저씨는 코스모스 마을을 보려고 북천역에 간다는 나를 말린다. 중간에 가파른 고갯길이 있는데 1차선의 갓길없는 국도에 차들이 마구 내달려 위험하다는 거다. 택시 영업을 하려나 보다 예상했던 아저씨의 입에서 나온 대안은 뜻밖에 '경전선 기차'. 경상도(밀양 삼랑진)와 전라도 (광주)를 오간다 해서 이름 지어진 여행자들의 로망과 같은 열차를 타게 될 줄이야.

미니 열차같은 경전선 기차는 하동역에서 기적 소리를 내며 횡천역, 양보역을 지나 누렇게 익은 가을 들판 사이를 천천히 달려 나와 자전거를 코스모스 마을로 데려다 준다. 북천역 앞에도 오일장터(매 4,9일)가 있고, 역 주변과 철길 사이로 색동 저고리를 입은 것 같은 예쁜 코스모스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 있다. 역 주변의 어떤 마을은 아예 코스모스 마을이라 써 있고, 하동 출신으로 소설 '산하' '지리산'을 쓴 이병주(1921∼1992) 작가를 기리는 문학관도 있다.

봄이 오면 매화 떼가 구름처럼 피어나고 4월엔 길 양편으로 벚꽃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섬진강을 봄의 강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깊어가는 가을날 찾아간 섬진강은 그 고즈넉하면서도 서정적인 또 다른 얼굴로 여행자의 경탄을 이끌어낸다. 그 물길 따라 참 많은 것들이 깃들어 살고 있다. 지리산의 품처럼 깊고 화개, 하동의 오일장터처럼 넉넉하다.

화개 버스터미널에 내려 섬진강변을 따라 평사리-악양면-하동포구에 도착, 하동역에서 경전선 기차를 타고 코스모스 마을 북천역을 오갔다.
 화개 버스터미널에 내려 섬진강변을 따라 평사리-악양면-하동포구에 도착, 하동역에서 경전선 기차를 타고 코스모스 마을 북천역을 오갔다.
ⓒ N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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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10/6일날 다녀 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올때는 하동군에 있는 하동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을 추천합니다.



태그:#자전거여행, #섬진강, #평사리, #하동, #북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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