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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어머니는 1970년 11월 13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전태일의 어머니에 머물지 않고 이 땅 노동자들의 어머니 나아가 사회운동권 전체의 어머니이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그를 어머니라 불렀습니다. 

전태일은 우리 노동운동사의 전설입니다. 아니 현대사의 물줄기를 뒤흔든 역사입니다. 그로 인해서 이 땅에 정의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전태일 전에는 운동다운 운동이 없었습니다. 억압된 압제, 군사독재의 서슬퍼런 칼날만 있었지 인간다움을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는 없었습니다.

지금부터 40여 년 전인 1970년 11월 13일, 서울의 한 복판 청계천 봉제 공장 노동자 전태일이 노동조건 개선을 외치며 몸에 불을 지핌으로 드디어 사람들의 소리가 정의를 찾아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자들의 의식이 하나 둘씩 깨이고, 대학생들이 기층 민중운동에 눈을 뜨고, 시민사회도 왜곡되이 흘러가는 나라를 걱정하는 목소리를 돋우었습니다.

전태일은 그렇게 우리 현대사에 우뚝 섰습니다. 그런데 전태일이 진정 전태일 열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 때문입니다. 그는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아들의 외침을 유언으로 마음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 유언의 성취를 위해 40년을 운동의 전선에서 싸웠습니다. 노동운동 사회운동에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불의에 저항하며 몸을 불사른 전태일 열사의 넋은 불의한 정권에 늘 그림자가 되어 따라 다녔습니다. 그 그림자는 때론 협박으로 때론 타이름으로 그리고 또 가끔은 직언이 되어 정권을 괴롭혔습니다. 살아 있는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대신할 땐 언제나 화가 되어 군사 독재 정권의 심장을 들쑤셔댔습니다. 방법을 찾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됐다, 되었어. 이소선만 회유하면 될 것 아닌가!"

정권은 거액을 싸들고 다니며 이소선 어머니를 회유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턱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소선 어머니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런 불의에 타협할 사람입니까? 그는 전태일의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 어미의 할 일이라고 다짐했습니다.

제가 전태일을 전태일 열사로 만든 것은 이소선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아들의 뜻을 이어받아 어머니로써 가열찬 투쟁이 없었다면, 그래서 불의한 정권의 회유에 넘어 갔다면, 그것이 아니어도 조용한 여생을 보냈어도 전태일의 역사적 자리는 그렇게 크지 못했을 것입니다. 분신한 아들의 뜻을 현장에서 실천한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아들 전태일의 이름이 더욱 빛날 수 있었습니다.

이소선 어머니는 배운 사람이 아닙니다. 일제 때 방학을 이용해서 봉사활동을 나온 대학생들에게서 배운 야학 공부가 그분에겐 공부의 전부였습니다. 그분이 먹물을 부러워하면서도 먹물과 선을 긋는 삶을 산 이유도 길지 않은 가방 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가 변함없이 노동운동의 어머니로 사회운동 전체의 대모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이런 짧은 공부가 의식에 공구(工具)가 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먹물의 속성 중 하나가 자기 이익에 따라 의식과 삶이 쉽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 굴절의 과정을 거쳐 현재도 사회 지도층연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저는 이소선 어머니의 짧은 공부가 얼마나 다행인지 숨을 고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 온전한 답은 되지 못합니다. 강철군화와 같은 치열한 의식의 단련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도 쉬 꺾어지고 마는 법입니다.

이소선 어머니는 러시아의 문호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에 나오는 주인공 파벨의 어머니를 연상시킵니다. 파벨의 운동적 삶에서 그의 어머니가 변화되었듯이, 전태일 열사로 인해 어머니의 의식이 바뀌고, 그 어머니로 인해 노동자들의 의식이 고양되어 갔습니다. 배운 자들의 책상머리에서 나온 의식이 아니라 현장에서 숙성한 의식을 노동자들은 배워갔습니다. 그분은 머리 속의 의식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끄는 의식의 표본이었습니다. 배우지 못한 어른, 나약한 여성에게서 나오는 치열한 투쟁 의지는 많은 노동자들에게 나의 의식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민주화 운동의 고비마다 그의 이름이 빛을 발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노동운동이 노선 투쟁으로 갈등을 일으킬 때에도 그의 조언이 필요했으며, 사회운동이 틈새가 벌어질 때에도 그의 충고가 힘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우리 곁에 늘 든든히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분이 전태일의 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강인한 의지만으로 우리들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분에겐 따스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약자를 위한 사랑, 노동자를 위한 사랑 나아가 노동자와 뜻을 함께 하는 모든 사람에게 베푼 사랑이 이소선을 우리의 '어머니'로 만든 원천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을 직접 경험한 일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1987년 6.10항쟁 사건 직후입니다. 잠깐 몸을 숨길 일이 있어 안전한 거처를 알아보던 중 한 선배가 상계동 이소선 여사 댁을 연결해 주었습니다. 모임에서 아니면 집회 현장에서 어머니를 뵌 적은 적지 않지만 이렇게 한 식구가 되어 기식을 함께 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벌써 환갑을 넘긴 전태삼 형 내외와 함께 영세 봉제 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집은 초라한 단층 건물로 여러 개의 방을 갖고 있었습니다. 노동운동 또는 사회운동을 하다가 경찰의 손을 피해 도망을 다녀야 하는 사람들이 이곳 신세를 진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후에 운동판에 이름이 걸출한 장기표, 조영래(작고), 단병호 등 운동의 지도자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작은 방 하나가 제가 쓸 방이었습니다. 어머니도 전태삼 형 부부도 가능한 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저는 방에서 왼종일 책만 읽었습니다. 그리고 하루 세 끼 식사는 함께 했습니다. 이소선 여사는 경상도 출신 여인입니다. 말이 걸걸합니다. 거기에다 정제함이 없습니다. 저속한 말도 섞어서 하는 그분의 말이었지만 그 안에 감춰져 있는 따스한 사랑은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 와서 한 번은 가야 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소선 어머니의 소천은 이른 감이 없지 않습니다. 아직 우리의 노동조건이 후진적 수준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외침이 계속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것을 쟁취하고자 많은 노동자들이 힘을 합쳐야 할 상황에서 이소선 어머니의 소천은 우리를 안타깝게 만듭니다.

모든 신체 기능이 정지하고 유족과 가까운 동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산소 호흡기를 제거함으로써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오늘(8월 3일) 오전 11시 45분, 이소선 어머니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목사인 손주 사위의 집례로 마지막 임종 예배가 있었다고 합니다. 40성상 어머니가 싸워 오신 노동자 해방의 세상을 위해 못다 이룬 일들은 고스란히 우리의 몫으로 남겨졌습니다. 운동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그 목표 쟁취를 위한 방략도 하나로 모아 전진해야 할 것입니다.

이소선 어머니의 장례 일정과 절차가 곧 나올 것입니다. 노동자들의 어머니, 우리 전체 운동의 대모셨던 이소선 여사의 장례식이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가신 그분도 간절히 원하는 바일 것입니다. 그분이 준열히 이어온 투쟁의 역정이 끊어지지 않도록 작은 차이는 극복하고 큰 것을 위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불의 앞에 굽힘 없는 삶을 사신 그분의 유지를 받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소선 어머니의 안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명재 기자는 서울민통련 조직국장 총무국장 등을 거쳐 서울민중연합 민족학교 부의장을 지냈으며 지금은 시골에서 농촌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소선어머니, #소천, #노동운동, #대모,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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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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