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부쿠레슈티 관광은 개선문에서 시작된다

혁명광장과 빅토리아 대로
 혁명광장과 빅토리아 대로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 도착하니 오후 1시 30분이다. 수속도 비교적 빨리 끝나 공항 밖으로 나오니 2시도 안 되었다. 모든 게 순조롭다. 밖에 나오니 현지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다. 그의 이름은 송용기다. 부쿠레슈티 대학교에서 동방정교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실력자다. 원래 성공회신학대학에 다니다 1992/93 인연이 되어 이곳 부쿠레슈티에 왔고, 1990년대 말 그리스 정교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다시 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한다. 또 이곳에서 화학을 전공한 루마니아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그는 결혼하면서 종교도 루마니아 정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그는 우선 선하게 생겼다. 말투도 조용하다. 또 솔직하다. 이틀간 우리를 안내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숨김없이 다 이야기해주었다. 루마니아 가정에서 처가살이를 하다 보니 한국어를 쓸 기회가 없어 한국말을 자꾸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용기씨라고 부르지는 말아달라고 한다. 그 이유가 재미있다. 자신이 한국에 있을 때 애인이 자신을 그렇게 불렀는데, 여성관광객들이 용기씨라고 부르면 옛 애인을 만난 것 같아 깜짝 놀라게 된다는 것이다.

부쿠레슈티 개선문
 부쿠레슈티 개선문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그는 우리에게 부쿠레슈티의 기온이 34℃나 되니 호텔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오후 4시쯤 시내 관광을 하자고 제안한다. 호텔은 부쿠레슈티 근교 오토페니 공항 근처에 있어 10분이면 도착한다. 그리고 여름인지라 해가 9시는 되어야 지니 시내 관광할 시간은 충분하다고 말한다. 호텔은 일급의 리조트호텔로 괜찮다. 방의 창문을 통해 수영장 겸 놀이시설인 워터파크(Water Park)를 볼 수 있다.

오후 4시 우리 일행은 부쿠레슈티 시내관광에 나선다. 우리 호텔이 도시 북쪽에 있기 때문에 남쪽으로 향하는 부쿠레슈티-플로이에스티 도로를 타고 간다. 그러고는 자유광장을 지나 키셀레프 거리를 따라 개선문까지 간다. 개선문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해 세웠다. 현재의 것은 1930년 페트루 안토네스쿠 등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바로 이 개선문으로부터 부쿠레슈티의 도심이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루마니아 역사의 중심은 혁명광장

혁명광장의 카롤 1세 동상과 대학도서관
 혁명광장의 카롤 1세 동상과 대학도서관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개선문에서 키셀레프 거리를 계속 따라가면 빅토리아 광장이 나온다. 이곳 빅토리아 광장에서부터 부쿠레슈티의 구도심(Old city)이 시작된다. 빅토리아 광장에서는 두 개의 큰 길이 남북으로 이어진다. 하나는 빅토리아 대로고, 다른 하나는 마게루 대로다. 바로 이 두 길 주변에서 부쿠레슈티 역사의 대부분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빅토리아 대로를 따라 가다 혁명광장에 내려 루마니아의 역사의 현장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둠보비차 운하(강)를 건넌 다음 자유대로에서 쵸세스쿠에 의해 지어진 인민궁전을 볼 것이다. 이 궁전은 쵸세스쿠가 북한의 평양에 있는 인민문화궁전을 모방해 만들었다고 한다. 인민궁전을 본 다음에는 궁전 앞으로 나 있는 통일대로를 따라 통일광장까지 갈 것이다. 그리고 통일광장을 지나 좌회전해 브라티아누-마게루 대로를 따라 부쿠레슈티의 건물과 역사를 살펴보려고 한다.

혁명광장에 있는 재탄생 기념비
 혁명광장에 있는 재탄생 기념비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혁명광장(Piaţa Revoluţiei)에서 차를 내리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재탄생 기념비다. 25m 높이의 대리석 사각뿔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고, 그 상단부에 쇠로 된 왕관 형태의 조형물이 둘러싸고 있다. 전체적으로 흰 대리석과 검은 쇠가 멋진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1989년 공산주의를 붕괴시킨 혁명을 기념해서 2005년 알렉산드루 길두쉬의 디자인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 조형물이 혁명의 숭고함과 희생을 반영하지 못했다고 해서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재탄생 기념비 앞의 철제조형물
 재탄생 기념비 앞의 철제조형물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너무 추상적이고 상징적이라는 것이다. 당시 시장이었던 아드리온 비도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취향의 문제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의 상징성을 이해할 수 없다." 예술비평가인 미하이 오로보누는 "길두쉬가 그런 작업을 수행할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혹평했다. 그가 조각가가 아니고 디자이너이기 때문이었다. 일부 시민들은 이 기념물을 '막대기에 꼬인 감자' 또는 '이쑤시개에 꼬인 올리브'라고 비꼬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 재탄생 기념비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보인다. 우선 흰 대리석과 검은 쇠의 대비가 사람의 시선을 끈다. 그리고 혁명에 동참한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은 조형물 앞에 있는 철제 조형물이 충분히 보완을 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머리와 몸체 그리고 다리로 단순화시킨 사람들이 어깨를 맞대고 혁명을 향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비노두 시장의 말처럼 예술은 취향의 문제라서 늘 논란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혁명광장 주변의 건축물과 조형물

정치가 마니우의 동상. 뒤로 국립 예술박물관이 보인다.
 정치가 마니우의 동상. 뒤로 국립 예술박물관이 보인다.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혁명광장은 1989년 혁명에 성공하기까지는 궁전광장(Piaţa Palatului) 으로 불렸다. 그것은 이곳에 루마니아 왕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왕궁은 현재 국립 예술박물관이 되어 있다. 이곳에는 매너리즘에서 바로크를 거쳐 인상파에 이르는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이 있다. 엘 그레코, 틴토레토, 루벤스, 렘브란트, 모네, 시슬리 등의 작품이 있다. 그리고 루마니아 현대 작가들의 작품도 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 처음 들어보는 테오도르 아만, 니콜라에 그리고레스쿠, 게오르게 타타레스쿠 같은 화가가 그들이다.

재탄생 기념비 옆에는 마니우(luliu Maniu: 1873-1953)의 동상과 청동조형물이 있다. 마니우는 루마니아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인이다. 당시 헝가리의 지배를 받던 트란실바니아 지방에서 태어난 마니우는 1896년 루마니아 국민당을 만들었다. 그는 1906년 헝가리 의회의원이 되었고, 루마니아 민족운동의 대변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무너지자 트란실바니아 지방을 루마니아에 편입시켰고, 1926년 국민당 당수로서 노동당과의 통합을 성사시켰다. 1928년 그가 이끄는 국민노동당은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았고, 그가 수상에 취임했다. 이후 그는 루마니아의 가장 대표적인 정치가로 활동했다.

클레츨레스쿠 루마니아 정교회 성당
 클레츨레스쿠 루마니아 정교회 성당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혁명광장 주변에서 또 눈에 띄는 것은 카롤 1세의 동상과 그 뒤에 있는 국립대학 도서관이다. 카롤 1세(1839-1914)는 루마니아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국왕으로 1881년부터 1914년까지 루마니아를 통치했다. 그는 독일계 호헨촐레른 왕가의 왕자로 1866년부터 이미 루마니아를 통치하고 있었다. 1877년 러시아-터키 전쟁에서 터키가 패배하자, 카롤 1세는 1878년 루마니아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또한 1881년 루마니아 왕국을 선포하고 왕이 되어 정치·경제적으로 루마니아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광장에서 빅토리아 대로를 건너면 클레츨레스쿠 정교회 성당이 나타난다. 이 성당은 17/18세기 왈라키아 양식으로 지어진 루마니아 정교회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던 클레출레스쿠 왕과 그의 부인 사프타를 위해 1720-1722년에 지어졌다. 원래 성당 외벽에 그림이 있었으나, 1935/36년 복원을 하면서 벽돌로 교체했다. 현재는 성당 입구 위에 프레스코화가 일부 남아있고, 내부에도 1859/60년 게오르게 타타레스쿠가 그린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다.

성당 옆에는 정치가 코르넬리우 코포수(1914-1995)의 흉상이 서 있다. 코포수는 마니우의 후계자로 국민노동당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 시절 핍박을 받았으며, 1989년 국민노동당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선언을 이끌어냈고, 이후 루마니아 민주연합의 지도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상원의원이 되었다. 그는 루마니아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치가 중 한 사람이다.    

인민궁전을 떠나야 했던 독재자 쵸세스쿠의 말로

통일대로에서 바라 본 인민궁전
 통일대로에서 바라 본 인민궁전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혁명광장을 떠나 우리가 찾아간 곳은 자유대로변 약간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인민궁전이다. 이 건물은 현재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의회궁전으로 불린다. 쵸세스쿠 시절인 1984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처음에는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궁과 러시아의 크레믈린 궁을 모방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 궁전은 가로 세로가 각각 270m, 240m에 달하며, 높이도 86m에 이른다. 12층 건물로 내부에 방이 무려 1,100개나 된다. 건축면적이 340,000㎡로 미국 국방성 건물인 펜타곤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다. 이 궁전은 1989년까지 행정부 건물로 사용되었고, 1997년부터는 의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자유대로 앞 입헌광장에 차를 세우고 인민궁전의 외관을 살펴본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전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 건물은 남북 방향의 길이가 동서 방향의 길이보다 조금 긴 직사각형이고, 정면은 동쪽을 향하고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내부를 살펴볼 수 없는 아쉬움은 있지만, 실제 내부를 보려고 해도 서너 시간은 걸릴 것 같다. 현지 가이드인 송용기 박사도 두세 번 밖에는 못 들어가 봤다고 한다.

이 건물을 지은 쵸세스쿠는 1967년부터 루마니아 정계의 최고 실권자가 된다. 그는 처음 독자적인 외교정책으로 서방의 주목을 받았고, 그를 통해 서방으로부터 많은 경제적인 지원을 받았다. 1971년 그는 중국의 문화혁명과 북한 주체사상을 모방 7월 명제(July Theses)를 발표하면서 새로운 정치실험을 한다. 7월 명제의 핵심은 사회주의적 인본주의(Socialist Humanism)였다. 이를 통해 그는 루마니아식 사회주의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상숭배로 흘러갔고, 새로운 독재 모델에 불과했다. 결국 그는 1989년 유럽의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민중들에게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사형에 처해졌다.

인민궁전 앞의 통일대로
 인민궁전 앞의 통일대로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인민궁전을 떠나 통일대로를 달린다. 대로 가운데는 분수가 흐르고 가장자리에는 가로수가 정연하게 심어져 있다. 가로수 뒤로는 공산주의 시절 지어진 아파트들이 보인다. 쵸세스쿠는 자신이 추구하는 루마니아식 사회주의가 가장 이상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무모한 작업을 했고, 그 결과물이 자유대로와 통일대로 주변의 도시계획과 건물로 남아있다.

현재 루마니아는 유럽연합에 가입하는 등 친서방 정책을 계속 추구하고 있지만, 경제발전은 쉬울 것 같지 않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성장률이 주춤하고 있고, 실업률마저 높기 때문이다. 2010년의 경우 GDP 성장률이 –1.2%였다. 그러나 루마니아는 자동차, IT 분야를 집중 육성하면서 경제발전을 꾀하고 있고, 2014년에는 유로존에 가입할 예정이다. 루마니아가 정치·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라가 될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다. 


태그:#부쿠레슈티, #개선문, #혁명광장, #재탄생 기념비, #인민궁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