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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경북 영주시의 한 돼지농가가 비어 있다. 구제역으로 돼지가 모두 살처분된 탓이다.
 25일 경북 영주시의 한 돼지농가가 비어 있다. 구제역으로 돼지가 모두 살처분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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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5호 지방도는 경북 영주시내에서 부석면으로 이어지는 2차선 도로다. 중간에 잠시 봉화군 봉화읍을 거친다. 이 도로 주변으로는 많은 축산 농가를 볼 수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어 있는 곳이 많다. '위험' 팻말이 서 있고, 파이프가 하늘로 솟은 낮은 언덕도 눈에 띈다. 매몰지다.

구제역 발생지인 안동시와 맞닿아 있는 영주시와 봉화군에서는 구제역 피해가 컸다. 특히, 면역력이 약한 돼지가 많이 죽었다. 영주시에서는 돼지 6만8000마리 중 87%인 5만9700마리가 살처분됐다. 봉화군에서 살아남은 돼지는 4만699마리 중 800마리에 불과하다. 살처분 비율이 98%다. 이 지역에서는 "돼지가 전멸했다"고 말한다.

돼지의 전멸은 곧 돼지농가의 고통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보상 탓에 빚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돼지농가가 많다. 더군다나 보상이 지연되고 있다. 최근에 발효된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이들의 미래는 '바람 앞 촛불' 처지다. 25일 영주시·봉화군을 찾았다. 돼지농가의 민심은 현 정부를 떠난 지 오래다.

턱 없이 부족한 보상금... "돈 없어 집 밖에 나간 적 없어"

"사유재산을 강탈한 거나 마찬가집니다. 정부가 도움은 안 줄망정, 발목만 잡고 있어요. 이명박 정부에 협조한 죄로 빚만 늘었네요."

영주시 상망동의 한 돼지농가에서 만난 김재호(가명·53)씨의 말이다. 사투리에서 날카로운 가시가 느껴졌다. 1320㎡ 규모의 돼지우리 구석에 있는 돼지 30마리가 보였다. 한때 1000마리를 키웠던 곳이다. 불 꺼진 돼지우리는 삭막했다. 팬티 차림의 그는 "돈이 없어 최근에 집 밖으로 나가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2009년 어미돼지 28마리로 돼지농장을 꾸렸다. 2010년 말에는 780마리로 불어났다. 이 과정에서 사료값과 농장 임대료 등을 합쳐 1억 원의 빚을 졌다. 2011년 2월 돼지 500마리 출하 계획을 세웠다. 돼지 1마리 당 45만 원에 거래되는 것을 감안하면, 두 차례 출하가 가능한 2011년에만 4억 원이 넘는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2010년 12월 25일 김씨의 농장에서 300m 떨어진 곳에서 구제역이 발생하면서 계획이 뒤틀렸다. 사흘 뒤 김씨의 돼지는 모두 살처분됐다. 1월 그는 1차 보상금으로 1마리당 15만 원씩 1억1700만 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이 돈으로 빚을 갚았고, 어미 돼지 30마리를 얻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경북 영주시 곳곳에서는 구제역에 걸린 가축을 매몰지가 눈에 띈다.
 경북 영주시 곳곳에서는 구제역에 걸린 가축을 매몰지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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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뒤 돼지를 1000마리로 불리기 위해서는 어미 돼지 70마리가 필요하지만, 김씨에게는 돈이 없다. 확정된 2차 보상금은 1차 때보다 적었다. 이마저도 언제 지급될 지 모른다. 사료값도 없다. 현재 김씨는 빚을 얻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적금을 깬 지는 오래다.

김씨는 "정부가 구제역이 우려된다면서, 구제역에 걸리지 않은 돼지를 강제로 살처분했다"며 "사실상 사유재산을 강제로 처분한 것인데,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기는커녕 보상을 미뤄, 빚만 늘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돼지 500마리를 묻은 또 다른 돼지농가 주인은 "공무원과 함께 어미돼지 66마리를 묻었는데 이제 와서 41마리만 보상을 해주겠다고 한다, 불복하겠다고 해도 막무가내"라며 "정부는 구제역 당시 돼지농가를 위하는 척 했지만, 이제 와서는 보상금을 줄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엎친 데 덮친 격... 한-EU FTA에 물가 관리 불똥까지

돼지농가의 미래는 암울하다. 정부가 미국, EU 등과 FTA를 체결하면서 돼지고기 시장을 개방했기 때문이다. 지난 1일 발효된 한-EU FTA로 냉동삼겹살, 냉장삼겹살·목살의 관세(현재 22.5~25%)가 10년 뒤 철폐된다. 값싼 유럽산 돼지고기가 들어오면 국내 돼지농가의 피해는 불 보듯 뻔하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예상 양돈업 생산액은 4조4130억 원이다. 한-EU FTA 발효로, 매년 수백 억 원의 생산액이 감소될 것으로 보인다. 10년 뒤, 관세가 사라지면 한 해 생산감소액만 1055억 원에 달한다. 여기에 한-미FTA가 발효될 경우, 추가로 연 931억 원의 생산감소액이 예상된다.

돼지농가의 시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정부가 최근 삼겹살 가격을 안정시킨다며 내달 20일까지 들여오는 수입 냉장 삼겹살 1만 톤을 긴급 구매해 싸게 팔기로 했다. 수입업체에 대한 인센티브가 지급되고 항공운임까지 지원된다. 농림수산식품부 자료에 따르면 대형마트에서 판매되는 국내산 삼겹살 500g 가격은 1만1857원인 반면, 수입산 냉장 삼겹살 500g가격이 5750원에 불과하다.

25일 경북 영주시의 한 돼지농장에서 돼지들이 쉬고 있다. 구제역 이후, 새롭게 들인 돼지다.
 25일 경북 영주시의 한 돼지농장에서 돼지들이 쉬고 있다. 구제역 이후, 새롭게 들인 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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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농장을 운영하는 남규현(52)씨는 "물가를 잡기 위한 노력은 이해하지만, 수입업체의 항공료까지 지원하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돼지농장 주인은 "축협을 통해 국내 삼겹살을 사는 방법도 있다, 이번 조치는 해외 수입업체와 대형마트 배만 불리고 생산자인 돼지농가는 죽이는 일"이라고 말했다.

돼지사육 농가에 따르면 현재 영주지역의 돼지고기 1kg당 경매가격은 6000원으로, 구제역 전(4500원)보다 크게 오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구제역으로 인한 수급불균형과 함께 사료값 상승에도 원인이 있다. 사료값은 5년 전에 비해 2배 이상 올랐다.

남씨는 "정부는 이런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채, 국내 양돈산업이 부가가치가 낮고 고비용 저효율이라고만 지적한다"며 "현 정부는 겉으로는 FTA 지원 대책으로 양돈 농가를 지원하겠다고 생색을 내지만, 실제로는 일방적으로 손해만 전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양돈농가는 "경북도민들은 이전 선거에서 한나라당만 뽑았지만, 돼지농가를 중심으로 내년 선거에서 밭을 갈아엎듯이, 정치를 갈아엎자는 얘기가 많이 들린다"며 "내년 선거에서는 많이 바뀔 것 같다"고 전했다.


태그:#돼지농가 피해, #구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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