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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원표공원에 마련된 잡년행진 부스
 광화문 원표공원에 마련된 잡년행진 부스
ⓒ 박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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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TV에서 '공연의 달인'이라 불리는 한 가수와 한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MC는 그에게 공연을 절정에 치닫게 하기 위해 관객의 흥분을 어떻게 하면 한층 높일 수 있는가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러자 가수가 답했다.

"많은 방법이 있지만, 물을 뿌리는 게 가장 반응이 뜨겁더라고요."

그래서일까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보며 한숨을 내쉬기보다는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하는 행진이라니, 얼마나 재밌을까!' 하며 집을 나섰다. 광화문으로 가는 버스 안,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씩 흘끗 내 짧은 바지를 스쳐 지나갔다. 사놓고도 한 번밖에 입을 수 없었던 비운의 바지였다. 키가 커서, 혹은 다리 모양이 예쁘지 않아서….

아니, 어쩌면 내가 이 바지를 입지 않았던 것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서였다. 혀를 끌끌 차던 아주머니의 언짢은 표정과 위, 아래를 노골적으로 훑어보던 눈빛을 감당해내기에 나는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옷장을 벗어난 짧은 바지를 얼른 카디건으로 가렸다. 시선을 견딘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잡년행진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광화문을 찾은 본인. 그러나 나름대로 야심차게 준비한 복장은 쏟아지는 비 때문에 시작도 하기 전에 온통 엉망이 되고 말았다.
 잡년행진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광화문을 찾은 본인. 그러나 나름대로 야심차게 준비한 복장은 쏟아지는 비 때문에 시작도 하기 전에 온통 엉망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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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년'과 '잡놈'으로 북새통 이룬 원표공원

광화문에 도착하자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과연 '퍼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여서, 이미 행진을 시작하기도 전에 바지며 신발이 모두 푹 젖어버렸다. 원표공원에 들어서니 과감한 복장의 사람들이 천막 아래에서 옷을 갈아입거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내리는 비쯤은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뚱뚱하든 말랐든, 키가 작든 크든 사람들은 자기가 입고 싶은 옷을 입고, 하고 싶었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행진에 참가한 남성 참가자 '초코버리'님
 행진에 참가한 남성 참가자 '초코버리'님
ⓒ 박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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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왔다는 권하림(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씨는 "여성들에 대한 폭력적인 시선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해 나왔으며, 부디 행사의 취지에 어긋나는 보도나 그 의미가 왜곡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닉네임 '초코버리'님 역시 "입고 싶은 옷은 입어야 하고, 그것으로 인해 성범죄 등의 피해를 보는 여성이 없어야 한다"고 씩씩하게 말했다.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어느새 행사 시작시간인 4시가 다가와 있었다. 원표공원의 작은 공터는 '잡년'과 '잡놈' 그리고 그것을 구경하는 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윽고 흘러나온 ABBA의 노래 <댄싱 퀸(Dancing Queen)>에 맞춰 참가자들은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몸치에 박치라 선뜻 나서진 못했지만, 음악에 맞춰 자신들이 말하고 싶은 바를 유쾌하게 표현하는 모습들을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피켓을 들고 행진을 시작한 참가자들
 피켓을 들고 행진을 시작한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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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년행진'이라... 속을 알수록 좋아지는 이름

퍼포먼스 이후 본격적인 행진이 시작되었다. 원표공원에서 출발한 이들은 덕수궁 대한문까지 길을 걸으며 구호를 외쳤다. 행진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했다. "벗어라, 던져라, 잡년이 걷는다!" 하는 구호에 일부 남성들은 "잡놈도 걷는다!"며 재치 있게 항의(?)했고, 목이 쉴 때까지 구호를 선창하는 이를 위해 박수를 쳐주는 참가자, 친구와 웃고 떠드는 참가자 등 행진은 어느새 축제로 변모해있었다.

이때 지켜보던 한 시민이 '잡년이라니…' 하며 충격을 받은 듯 말끝을 흐렸다.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잡년'은 부정적인 상황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 아니던가. 하지만 나는 잡년행진에 대해 알아갈수록 '잡(雜)'이라는 단어가 점점 좋아졌다. 제멋대로 해석해보자면, '모두 섞이어 제 목소리를 낸다'는 의미에서 이번 행진에 더없이 알맞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색깔만 가진 세상은 얼마나 지루하고 따분할까. 여러 빛깔과 색, 제 향기와 매력을 가진 것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모습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것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잡년'이라는 단어는 적절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행진에 앞서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행진에 앞서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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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년행진이 가르쳐준 사실, '내 몸은 내 거다'

시청역까지 행진을 마치고 다시 원표공원으로 돌아가는 길. 한두 방울씩 내리던 비는 어느새 굵은 빗줄기가 되어 우산 위로 떨어졌다. 빗소리에 지지 않기 위해 참가자들은 더 큰 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퍼붓는 비가 원망스러울만한데도 찡그리거나 짜증내는 사람이 없는 신기한 행진이었다. 오히려 비가 오는데도 이만큼 많은 이들이 나온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며 감사하는 사람들. 그들을 거리에 두고 나는 조금 일찍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비를 피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문득 움츠러들었던 내 어깨와 굽어 있던 허리가 활짝 펴져 있음을 깨달았다. 조금이라도 '더 가리기 위해' 스스로를 꽁꽁 감쌌던 마음이 그들의 웃는 얼굴과 당당한 구호에, 내리는 비에 조금씩 씻겨내렸다면 그것은 너무 큰 과장일까? 하지만 그것이 내게 일어나기 시작한 작은 변화임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행진하는 참가자들
 행진하는 참가자들
ⓒ 박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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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내 몸은 내 거다'라고. 아주 당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이것을 잊고 산다. 어쩌면 참가자들은 거창한 목적보다 '단지 내가 뚱뚱하거나 말랐다는 이유만으로 남들이 어떻게 볼까 입지 못했던 예쁜 옷들을 옷장에서 꺼내 입고 싶어서, 그리고 그것이 내게 손가락질하는 비난이나 내가 당할(지 모르는) 피해에 대한 변명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거리로 나왔을지 모른다.

한두 번의 시도로 많은 것이 순식간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날 아침 한번쯤 '내 몸은 내 거다'라는 생각을 갖고 구석에 고이 모셔두었던 옷을 꺼내 입는 그날이 하루이틀 모인다면, 우리는 더욱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진정한 잡년행진은 어쩌면 '질문하고 저항하는' 우리 안에서 이미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박가영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생기자단 '오마이프리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잡년행진, #슬럿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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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대학생기자단 오마이프리덤 1기로 활동했습니다. 사람과 영화가 좋습니다. 이상은 영화, 현실은 시트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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