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숲속홍길동' 이상현씨의 홈페이지
 '숲속홍길동' 이상현씨의 홈페이지
ⓒ '숲속홍길동' 홈페이지 캡처

관련사진보기


한 '1인 미디어' 활동가의 죽음이 사람들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그가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사연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기 때문. 특히 그가 지난 4월 9일 인터넷에 마지막으로 올린 "긴급… 숲속 홍길동"이라는 제목의 글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자신이 지난 2004년 한국전력을 퇴직한 이후 그동안 활동해온 상황을 짧게 알림과 함께, 현재 처해 있는 경제적 어려움을 솔직하게 밝히면서 도움을 요청한 바 있다.

"좀 도와주십시요!! 만원도 좋고 이만원도 좋습니다. 당장 굶게 생겼습니다. 장비 마련도 아득한 일이지만, 일단 죽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동지들이 도우겠지 하고 외면 마시고 꼭 좀 도와주십시요!!"라며 절실하게 도움을 요청했었던 것.

반지하방에서 외롭게 끝낸 마흔여덟의 삶

지난 6월 25일 오후 5시경 주변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인천 연수구 연수동의 한 반지하 방에서 한 중년 남자의 주검을 발견했다. 목을 맨 상태에서 발견된 사람은 이상현(48)씨. 이상현씨는 인터넷상에서 '숲속홍길동'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한 1인 미디어 활동가였다.

그는 지난 2004년 한국전력을 퇴사한 후 1인 미디어 활동을 활발하게 펼쳐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올린 글을 살펴보면 그는 자신에 대해 "저 역시 노동조합을 했었고, 99년 2000년 한전 민영화 저지투쟁을 하며 구속을 각오하고 본사 조합원들 선동하기도 했고… 신 어용이 되어 사측에 달라 붙은 노조위원장을 상대로 바위에 계란치듯 투쟁하다 일선 사업장으로 인사 발령났었다. 시그네틱스 라든가 당시 이랜드 투쟁 등에 결합하며 촬영한 영상을 회사 퇴근 후 집에 가서 편집해 속보 영상으로 소개하는 것이 지금과 같은 연대활동의 시작"이었다고 소개한 바 있다.

그가 퇴직을 결심하면서까지 매달렸던 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들의 현장 투쟁이었다. 그는 마지막이 된 이 글에서 "2003년~2004년 사이 380일간 가열차게 투쟁한 이주노동자 명동성당 농성기간 동안 두 차례 휴직 그리고 퇴직을 했습니다. 한국 활동가가 부족한 상황에서 그 투쟁에 올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의나 말로만 하는 투쟁에 신물을 느낀 저는 한전 때 못한 투쟁을 그런 식으로 투쟁하고 있었던 것"이라며 그가 퇴직하면서까지 현장 노동운동에 매진한 사연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이 같은 자신의 활동 이력을 말한 후 "지난 3월 31일 재능노조의 시청 앞 농성 현장을 찍은 후 영등포시장, 민주당사 앞 집회로 갔었다. 전주버스 투쟁관련 서울시민대책위가 주최하고 전주버스 동지들이 참여한 규탄집회를 촬영하고 뒷풀이 겸 점심을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보고픈 동지들과 함께하니 기분이 좋아 2차, 3차, 계속 이어지다가 3년 전처럼 또 캠코더, 노트북, 외장하드, 활동비 중 남은 현찰 등이 담긴 가방을 분실해버렸다"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이 장비가 없으면 영상활동가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주머니에 보니 돈이 3만 원 정도 있어 그 돈으로 인천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쏘주를 20병 정도 사서 뇌를 마비시켰습니다…. 이 상황에서 패닉을 잊게 하려 했던 것"이라며 자신의 충격을 설명했다.

이씨는 계속해서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갑니다…. 지금 수중에 전혀 현찰이 없고 남은 돈은 2700원인데 이 돈으로 피씨방에 와서 인터넷을 하고 있습니다. 일일이 동지들께 전화드릴 돈이 없습니다…. 그리고 한 15일~20일 정도 그 집에서 지낼 수 있는데, 당장 먹을 쌀이 없는 상황입니다. 고시원이었으면 밥과 국 정도는 해결했을 텐데….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최악의 상황에서 동지들께 이메일을 보내드립니다…. 좀 도와주십시요!!"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씨가 처했던 상황에 대해 <경인일보>는 6월 30일 기사를 통해 지인 신아무개(41, 여)씨의 말을 빌려 "그가 이런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 바로 그 캠코더와 노트북 때문이었다. 용역과 경찰이 부딪히는 집회 등의 현장에서 그는 몸으로 부딪히며 그 모습을 카메라로 담아왔다. 그런 그에게 촬영장비가 사라진 것은 군인에게 총이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의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숲속홍길동' 이상현씨가 <노동의소리> 홈페이지 게시판에 마지막으로 올린 글.
 '숲속홍길동' 이상현씨가 <노동의소리> 홈페이지 게시판에 마지막으로 올린 글.
ⓒ <노동의소리> 홈페이지 캡처

관련사진보기


'숲속홍길동' 홈페이지에 추모의 글 이어져

그의 홈페이지('숲속홍길동')에서 지난 8년여 동안의 그의 치열했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다. 이 홈페이지에는 2003년 5월 15일 자신이 그해 4월 30일 촬영한 '노동절 전야제'를 시작으로 지난 8년여 동안 굵직굵직한 노동자 투쟁 현장은 물론 메이저 언론에서 들여다보지 않는 이주노동자들의 투쟁현장까지 샅샅이 훑으면서 소식을 전한 바 있다.

이씨의 홈페이지에는 그의 안타까운 죽음이 알려진 후 누리꾼들의 방문이 꾸준히 이어지면서 추모의 글이 이어지고 있다. 아이디 '비주얼'은 "내 일신의 안락을 꿈꿀 때 치열한 투쟁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은 챙기지 못한 내 살 같은, 피같은 분이…. 감히 동지라 이야기하지 못하겠습니다…. 세상을 버리고 우리를 버리고 먼저 가셨네요…. 정말 죄송합니다…"라며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아이디 '요꼬'는 "동지는 무정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투쟁현장을 다니면서 수많은 동지들을 카메라에 담으면서도 정작 당신의 마음엔 우리를 담지 않으셨습니까? 누구 좋으라고 스스로 그렇게 가버리십니까 이 험한 자본의 세상에서 동지 한 명의 힘이 얼마나 큰데 동지의 속보 동영상을 보면서 저는 현장에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었고 힘이 되었는데…. 딱 한 번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고맙다 존경한다고 서로 열심히 투쟁하자고 해놓구선. 부디… 저 하늘에서는 힘들게 카메라 그만 잡고 그냥… 편히 쉬십시요, 편히…. 그래도 괜찮습니다. 동지의 자료영상~ 영원히 남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너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슬픕니다"라며 슬픔을 표했다.

아이디 '죄송합니다'는 "도와드리지 못했습니다. 동지, 힘드신 거 뻔히 알면서 몇 년 전 밥까지 얻어먹고, 그렇게… 동지를 보냈습니다. 너무 미안합니다. 너무 너무 너무… 미안합니다. 그렇게 아파해온 시간, 꼭 잊지 않겠습니다. 동지께 부끄럽지 않게 살겠습니다. 만신창이 같은 현실에서 벗어난 그 곳이, 언젠가 오리라 생각합니다. 부디 아프지 않게 있어 주세요"라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아이디 '원조둥글이'는 '활동가 숲속 홍길동을 기리며'라는 글에서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들어주지 않는 작은 사업장 투쟁에서 그들 목소리에 유일하게 귀를 기울여준 경청자이고 부당해고자들의 친구이며, 외국인 불법체류자의 형제인 그는 그렇게 갔다. 우리는 오늘 다만 투쟁가 한 명을 잃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절친한 형제를 하나 잃었다"며 이씨를 추도했다.

한편 경찰은 1일 이씨의 죽음과 관련해 "99% 자살이 맞다"고 확인했다. 고 이상현씨는 6월 29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추모의 숲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숲속홍길동' 고 이상현씨가 마지막으로 올린 글 전문
<긴급 .. 숲속홍길동입니다!!>

방법이 없어 이렇게 이메일로 제 상황을 알려드리는 점 이해 바랍니다.

지난 2004년 한전을 관두고 나서는 경제적으로 쉽지 않은 생활 속에서 투쟁하는 동지들 소식을 영상으로 알려내 오는 작업을 꾸준히 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의 돈으로 그걸 까먹으며 활동했고, 나중엔 정말 돈이 없어 전해투, 또는 오산쎈터 등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영상 작업을 할 수 있는 캠코더, 영상작업용 컴퓨터 또는 노트북을 유지했기에 작업이 가능했습니다.

저 역시 노동조합을 했었고, 99년 2000년 한전 민영화 저지투쟁(당시 발전 분사 저지투쟁이었죠, 김대중 정권 때)을 하며 구속을 각오하고, 본사 조합원들 선동하기도 했고 삼성동 본사다 보니 텔레비젼 뉴스에도 얼굴이 많이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꼭 했어야만 하는 투쟁을, 당시 김대중 정권도 한전 투쟁에 상당히 힘들어 했는데, 또 IMF이행사항이기도 했기에... 김시자 열사와 노조 내부 어용 처단 민주화 투쟁을 했다는 오경호가 반동 짓을 하며 노동조합이 공식적으로 민영화를 인정해주는 직권조인을 혼자 해버려(2000.12.3) 좋았던 투쟁 전선을 하루아침에 날라가버리고, 민주파 활동가들도 무너지고, 1년넘게 본사에 상주하던 3, 4천 공권력도 사라지고... 그러면서 직권조인에 대한 조합원 찬반 투쟁, 그리고 위원장 불신임 투쟁을 당시 신어용이 되어 사측에 달라붙은 노조위원장을 상대로 바위에 계란치듯 투쟁하며 자본을 상대로 한 투쟁이 아닌 내부적 이유 때문에 탄압도 받았고 결국 구 어용도 내쫓지 못했던 저를 본사지부 활동을 못하게 하려 일선 사업장으로 인사발령내 버렸습니다.(노조의 협의없이 직원 발령은 날 수 없죠)

이렇게 2001년부터는 일선 사업장에 근무하면서도 (본사지부 활동 때도 회사 일을 하며 노조활동을 해 왔고 많이 바빴죠) 시그네틱스 라든가 당시 이드 투쟁 등에 결합하며 촬영한 영상을 회사 퇴근 후 집에 가서 편집해 속보 영상으로 소개하는 것이 지금과 같은 연대활동의 시작이었습니다.

2003년~2004년 사이 380일간 가열차게 투쟁한 이주노동자 명동성당 농성기간 동안 두 차례 휴직, 그리고 퇴직을 했습니다. 어찌보면 이주노동자들과 이런 이유로 각별한 인연이 있게 됩니다. 농성기간 중 인신납치되어 외국인보호소로 감급된 동지들 면회, 농성장 물품 구매, 동지들 이동시 차량 운전 등 한국 활동가가 부족한 상황에서 그 투쟁에 올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회의나 말로만 하는 투쟁에 신물을 느낀 저는 ] 한전 때 못한 투쟁을 그런 식으로 투쟁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지금까지 왔습니다... 최근에는 오산이주쎈터 부근 어느 고물상 게게를 하는 어떤 동지 컨테이너 사무실서 기거해던 중 노동자교육센터 라는 곳에서 오프라인 강좌만 하다가 새롭게 온라인 강좌를 시작하게 되어 영상편집할 활동가를 찾던 중 김호철 선배 도움으로 제가 그 곳에서 최근 7~8개월 정도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작업은 만만치 않았고 하루 평균 12~17시간 영상 편집(강좌 촬영 포함)일을 해야 했고 올 겨울 매서운 추위 속에 난방 혜택 없이 일하다보니 온몸이 쑤시고 코끝이 빨개지는 신체적 고통까지 겪게 됐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가야할 투쟁현장은 전혀 못가보게되고...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해야 투쟁현장 동지들 멋진 투쟁들을 멋지게 소개하는 작업, 활동을 할 수 있는데 48강좌 중 17강좌가 강사 사정상 또는 강좌 당일 수강 노동자들 사정 등으로 못했는데 7개월 활동비가 마지막이라는데, 후불이라 그 이후는 자원봉사가 되는데 밥값이 장난 아니죠...밥 두 끼 사먹고 담배한갑, 쏘주 한두병 사서 마시면 한달 활동비는 똔똔 이거나 마이너스...돈을 조금 모아볼 생각이었는데, 환장하죠

그러면서 그동안 고시원서 지냈는데, 용산이란 데가 물가가 워낙 비싸 허름하고 방음도 안 되고 난방도 변변치 않은 곳에서 겨울을 지내니 노동자교육센터도 그랬고, 온 몸이 만신찬이라...인터넷 검색을 통해 인천 연수동 쪽 (활동상 거리가 멀지만) 무보증 월세 원룸을 구하게 됐습니다. 23일에 받은 마지막 활동비로,,,26일날... 그리고도 교육센터 일을 하다보니 밤새고 하니 통 인천을 못 가보다가... 3월 31일은 어쩌면 재 데뷰하는 날이었습니다...(아직 노동자교육센터 일을 마무리한 건 아니지만, 이제 투쟁현장도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보다 먼저 3월4일엔 이주 집회에도 다녀왔고 영상을 오랜만에 올렸죠) 밤새고 아침에 재능(시청 앞 농성, 유명자 지부장 7일째이던 날)으로 갔고, 유명자 지부장과 강종숙 위원장 인터부를 땄습니다.

그리고 곧 바로 류재운 동지에게 소통한 후 (김창현 퀵 동지 전회기로) 영등포 시장, 민주당사 앞 집회로 갔습니다. 전주버스 투쟁관련 서울시민대책위가 주최하고 전주버스동지들이 참여한 규탄집회를 촬영하고 뒷풀이 겸 점시을 하게 됐습니다. 오랜만에 보고픈 동지들과 함꼐 하다보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2차 3차 계속 이어지고, 이날 일을 치뤘습니다. 3년전 처럼 또 캠코더, 노트북, 외장 하드, 활동비 중 남은 현찰 등이 담긴 가방을 분실해 버렸습니다......

다음날,여러동지들과 전화해가며 전날 갔던 곳을 어렵사리 다 찾아내 다시 가봤지만 가방을 찾을 수 없게 됩니다. 제가 핸드폰은 문자수신 밖에 안되니 공중전화로 전화하다보니 2만원 정도 돈이 들더군요... 이 장비가 없으면 영상활동가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허탈감... 주머니를 보니 돈이 3만원 정도 있어 그 돈으로 인천으로 갔습니다.그리고 쏘주를 20병 정도 사서] 뇌를 마비시켰습니다...이 상황에서 패닉을 잊게 하려 했던 겁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 갑니다... 지금 수중에 전혀 현찰이 없고 남은 돈은 2700원인데 이 돈으로 피씨방에 와서 인터넷을 하고 있습니다. 일일이 동지들께 전화드릴 돈이 없습니다... 그리고 한 15일~20일 정도 그 집에서 지낼 수는 있는데, 당장 먹을 쌀이 없는 상황입니다. 고시원이었으면 밥과 국 정도는 해결했을 텐데...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최악의 상황에서 동지들꼐 이메일을 보내드립니다...

좀 도와주십시요!! 만원도 좋고 이만원도 좋습니다...당장 굶게 생겼습니다. 장비 마련도 아득한 일이지만,,, 일단 죽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동지들이 도우겠지 하고 외면 마시고 꼭 좀 도와주십시요!! 문자 수신 밖에 안 되는 상황이라 (그것도 액정이 나가서 어떻게 하면 겨우 보고 그럽니다만...) 공중전화에서 전화 드릴 돈이 없어 마지막 현찰로 이메일을 보냅니다! 적은 금액이라도 꼭 좀 도와주세요! 죄송하고 염치불구하고 글을 보냅니다...

하나은행 217-910146-65807 (예금주 : 정원섭) 앞으로 부탁합니다...(신용불량이라 타 동지 계좌를 제가 상시적으로 씁니다. 제 계좌는 입금은 되나 출금이 안되서) 그리고 도움 주시게 되면 그 때 간단한 문자를 부탁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꼭 다시 일어나서 동지들 곁에서 당당히 활동하는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다급해서 이메일 보냅니다... 이제 피씨방도 못 올 상황인만큼 다급해서요...

숲속홍길동 이상현 올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상현, #미디어 활동가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화물차는 굴러가는게 아니라 뛰어서 갈 수도 있습니다. 물론 화물칸도 없을 수 있습니다. <신문고 뉴스> 편집장 입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