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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들판은 야생으로 살아가는 것들에게는 삶의 터전이며 무대입니다. 무심한듯하지만 들판은 모든 것을 품어 줍니다. 농부들의 삶을 품어주고, 들풀들의 생명을 품어 줍니다.

 

그러기에 대지는 뭇 생명의 어머니며, 인류의 터전입니다. 앙탈을 부리며 가슴패기에 상처를 내듯 삽질로 파헤치고, 타락한 자식이 패륜을 저지르듯 이런저런 형태로 들판을 농락해도 기연히 제자리로 돌려놓는 위대한 어머니입니다.   

 

들풀들에겐 삶의 터전, 야생화 에겐 자태 뽐내는 무대

 

들풀은 들판에 뿌리를 내려 살아가고, 야생초들은 들판을 무대로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들에서 자라는 풀들을 우리는 들풀이라고 하고, 들에서 피어나는 꽃을 우리는 들꽃(야생화)이라고 합니다. 

 

언뜻 보기에는 시설에서 재배된 꽃들보다 못나 보이지만 들풀에서는 강인한 생명력을 볼 수 있고, 야생화에서는 사람의 손에 훼손되지 않아 때 묻지 않은 아름다움, 보고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태고의 청초함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 증평 들노래 축제 농부들이 부르는 들노래가 들판 무대에서 야생화처럼 피어 난 축제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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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에는 호객행위를 하거나 시선을 유혹하려는 색조화장기 같은 화려함은 적을지 모르지만 마음을 끌어당기는 은근한 매력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향도 있고, 벌과 나비를 유혹하는 꽃가루도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오면 흔들거리고, 빗줄기가 쏟아지면 구부러지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는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모시적삼에 가려진 아낙의 뒤태, 보일 듯 말듯 한 여인네의 속살처럼 마음을 아른거리게 하는 은은한 아름다움이 무궁무진하게 감춰져 있고 생명력이 솟구치는 야생들이 살아가는 곳이 들판입니다.  

 

엉덩이와 어깨 들썩거리게 하는 들노래

 

들판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를 우린 들노래라고 합니다. 들판을 휘젓는 농악소리는 엉덩이와 어깨를 들썩거리게 하고, 팔과 다리를 허공으로 엉거주춤 치켜올리게 하는 신명나는 곡조입니다.

 

 

들노래는 고단함을 잊기 위해 토해내던 농부들의 한숨소리에서 시작됐을 수도 있습니다. 물을 마시고 허리띠를 졸라매도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팠던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한 심리적 최면일 수도 있는 게 들판에서 울리는 들노래입니다.  

 

들노래는 지겟다리를 두드리며 하던 콧노래일 수도 있고, 타들어 가는 가슴을 식혀내느라 하던 신세타령 같은 독백일 수도 있지만 꽹과리와 장구를 조화롭게 두드리고, 북과 징을 어울리게 울리는 데서 쏟아낼 수 있는 소리의 버무림, 신명의 대명사인 경우가 대개입니다.

 

들노래에는 한도 많고 사연도 많이 들어있겠지만 신납니다. 고단함도 잊고, 배고픔도 까먹고, 서러움도 망각할 만큼 신명납니다. 들노래소리를 들으면 천근만근만큼이나 무거웠던 팔다리가 가뿐해지고, 끊어질 듯이 아팠던 허리도 언제 그랬냐는 듯 말짱해집니다.

 

 

어깨를 짓누르던 지게 훌훌 벗어던지고, 두 손에 주렁주렁 달고 다녀야 했던 호미나 낫에서 벗어나니 사지가 후련해지고 오장육부까지 덩실거립니다.

 

지게를 벗어던진 어깨는 바람에 흔들거리는 들풀처럼 들썩거리고, 호미와 낫에서 해방된 팔다리는 야생화를 탐하는 벌 나비처럼 허허로운 몸짓으로 들판허공에서 피어납니다.   

 

오물거리던 입, 떡떡 벌어지게 하는 들밥

 

들판에서 먹는 식사를 우린 들밥이라고 합니다. 들밥을 먹어 본 사람들은 다들 맛있다고 합니다. 푸짐하게 차려진 게 없어도 푸짐하다고 합니다. 들판,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아무 곳에나 털썩 주저앉으면 그곳이 식당 되고, 무릎이 식탁입니다.

 

 

커다란 그릇에 꽁보리밥 담고, 열무김치와 나물 몇 가지, 고추장 등을 넣고 썩썩 비비면 오물거리던 입이 떡떡 벌어지게 하는 꿀맛입니다. 비빔밥이 싫다면 찬물에 밥을 말아 먹는 들밥도 맛있습니다. 입안에 푸른 물이 들고, 아삭 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맴돌 만큼 싱싱한 풋고추를 노랗게 익은 된장에 푹 찍어 먹는 맛은 들밥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천혜의 별미입니다.   

 

입을 떡떡 벌리며 꿀떡꿀떡 삼키는 꿀맛 같은 들밥은 배만 부르게 하고, 보기에만 푸짐한 게 아니라 마음도 부르고 추억도 푸짐하게 합니다. 불뚝한 배 툭툭 두드리며, 옹달샘에서 솟는 물 한 바가지 벌컥벌컥 마실 수 있는 들밥이라면 돈과 권력으로는 맛 볼 수 없는 최고의 식사입니다.    

 

들판 무대에서 야생화처럼 펼쳐진 '2011 증평 들노래 축제'

 

잘 꾸며진 무대에서 공연되는 극이나 음악도 좋지만 들판에서 펼쳐지는 노래에는 야생화에서 볼 수 있는 은은한 아름다움, 들풀에서 느낄 수 있는 악착같은 생명력, 썩썩 비벼먹는 들밥에서 맛볼 수 있는 꿀맛 같은 맛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런 축제, 들판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들판에 피어난 야생화처럼 들판을 무대로 하여 펼치는 '증평 들노래 축제장'에를 다녀왔습니다.

 

증평 들노래축제를 준비하고 시연하는 사람들은 가수나 배우 같은 연예인들이 아닌 농부들, 장뜰(증평)에서 들풀처럼 농사를 짓고, 야생화처럼 인생을 꽃피우며 살아가고 있는 토박이 농부들입니다.

 

<장뜰두레보존회>는 1992년에 발족하여 자생적으로 생명력을 꽃피워나가고 있는 농부들의 단체입니다. 한량처럼 위락만을 즐기기 위한 출발도 아니었고, 수익을 위한 발족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농기구가 기계화되고, 제조제가 등장하면서 시들시들 사라지고 있는 우리 것, 자라면서 보고 들었던 야생화 같은 들노래를 보존하려는 뜻을 모아 발족하고, 마음을 쏟으며 지켜가는 농부들의 모임입니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모진 비바람이나 북풍한설 같은 어려움, 타는 갈증이나 장맛비처럼 다가오는 온갖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들풀처럼 극복하며 자라 꽃일 피우고 있는 순수 민간인 단체입니다.

 

선소리꾼인 정씨 어르신은 80세 가까이 되었으며, 꽹과리를 두드리는 상쇠(지명현)는 환갑의 나이입니다. 살림을 꾸려나가는 회장(양철주, 56) 역시 토박이 농부이고, 힘쓰는 일이라면 도맡아 해야 하는 막내(이송근, 45)까지 모두가 증평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들입니다.

 

6월 19일, 싱그러운 들판을 가르며 찾아간 축제장에서는 이틀째 하고 있는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풍악이 울리고 있었습니다. 한바탕 들노래가 펼쳐질 무대는 소를 부리고, 모내기를 할 수 있는 농지그대로였습니다. 

 

모 찌고, 모 내기고, 김매기하며 부르는 들노래

 

소를 몰고 들어간 농부가 '어더더더' 거리며 써레질을 하고나니, 깃발을 앞세운 <장뜰두레놀이보존회> 회원들이 농악을 울리며 논둑길을 따라 등장합니다. 바짓가랑이를 둥둥 걷어 올린 농부들이 모가 자라고 있는 논으로 들어갑니다. 선소리꾼이 넣는 선소리를 후렴으로 받아가며 모를 찝니다.

 

쏙쏙 쪄내는 모가 차곡차곡 모아지며 단으로 묶여 모내기를 할 논으로 군데군데 던져집니다. 모를 찐 농부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모심기를 시작합니다. 선소리를 넣으면 후렴소리로 답을 합니다. 워낭소리처럼 넣는 선소리에 바람결 같이 이어지는 후렴입니다.

 

선소리와 후렴소리에 맞춰 농부들이 모를 심어나갑니다. 혼자였다면, 들노래가 없었다면 마냥 지루하고 힘든 시간이 되었겠지만 함께 어우러지고, 함께 들노래를 불러가며 일을 하고 있어서 인지 바라보는 눈길조차 편안하고 신명납니다. 보기엔 좋아도 힘든 건 힘든 가 봅니다. 사정없이 내리쬐는 햇볕이 민망할 만큼 구부린 허리가 아픈가봅니다. 모심기를 한참 하던 농부가 몸을 일으키며 허리를 두드립니다.   

 

얼마만큼 모내기를 끝낸 농부들이 김을 맬 논으로 이동합니다. 일찌감치 모내기가 돼 땅 냄새를 맡고 푸른빛을 더해가는 논으로 들어간 농부들은 다시금 허리를 구부리고 논바닥을 훔칩니다.

 

선소리와 북 장단, 후렴소리로 엮어가는 들노래가 끊이지 않으니, 농사꾼들이 농사일은 겸해 시연하고 있는 들노래는 들판에 피어난 들풀의 생명력이었고, 호객행위를 하거나 시선을 유혹하는 색조화장기 같은 화려함은 적지만 보면 볼수록 마음을 끌어당기는 은근히 매력있는 들에 핀 야생화였습니다.


태그:#들노래, #장뜰, #증평, #들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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