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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듯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잊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오늘 6월 16일, 시인 노천명이 영면한 날이다. '사슴의 시인' 천명은 1957년 6월 16일 새벽 1시 30분, 불과 46세가 하늘이 그에게 준 천명이었는지, 쓸쓸히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시 '자화상'에서 스스로를 '조그만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미'라고 탄식했던 그가, 죽음은 아무런 거리낌도 아니었는지, 동이 틀 때까지도 버티지 못한 채 훌훌 날아 아득한 먼곳으로 가버렸다.

아래의 작은 원(백령도)와 위의 큰 타원(장연군) 사이로 서해의 군사분계선이 흐른다. 노천명은 황해도 장연군에서 출생했다.
▲ 노천명 출생지 아래의 작은 원(백령도)와 위의 큰 타원(장연군) 사이로 서해의 군사분계선이 흐른다. 노천명은 황해도 장연군에서 출생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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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은 1912년 9월 2일 황해도 장연군 부택면 비석리에서 출생했다. 사남매 중 셋째딸이었는데, 그 부모가 아들 출생을 소망했던 까닭에 남장을 해서 키웠다. 아명은 노기선이었다.

그가 개명을 한 까닭이 기구하다. 어릴 때 홍역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죽은 줄 알았는데 소생을 하자 부모는 '이 아이는 하늘이 돌보아주는 천명(天命)을 타고 났나 보다' 믿고 그렇게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46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버렸으니, 그 또한 그의 천명이리라.

노천명의 이른 죽음을 생각할 때, 문득 월명사의 '제망매가'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이른 죽음이 주는 생사의 의미를 '제망매가'만큼 격조높게 형상화해낸 시는 한국문학사에 달리 없는 까닭이다. 김광균의 '은수저'나 정지용의 '유리창' 같은 절창도 이른 죽음을 시적으로 잘 변용해내고 있지만 그래도 '제망매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물론 노천명은 아기나 아이 때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대를 주름잡던 천재적 여류시인의 46세는 사회적으로 '어린' 연령이나 마찬가지이다. 만약 그의 오누이들이 월명사와 같은 세기적 표현력을 지니고 있었다면, 아마도 제 2의 제망매가가 세상에 태어났을 터이다.

이미 아득한 옛날, 월명사는 죽은 누이를 바라보며 '죽고 사는 것이 예 있으니, 나는 갑니다 말도 못 이르고 그렇게 갔느냐"하고 노래했다. 제망매가는 누이가 '이른 바람에 지는 나뭇잎처럼' 그렇게 갔다고 한탄했다. 만약 월명의 누이가, 또는 노천명이  평균 수명을 넘는 노령에 자연사를 하였다면 사람들이 그렇듯 애틋히 여기지는 않을 터이다. 비록 삶과 죽음이 생로병사의 네 자리 중 둘이나 차지할 만큼 인간사의 본질적 의미망이기는 하지만, 저잣거리의 범인들은 깊은 철학적 의미보다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라는 세속적 가치관이 더욱 절절하게 와닿는 까닭에, 어린 나이로 세상을 버린 이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이화학당의 위치가 나오는 서울 지도(<이화백년사> 소재). 연두색 동그라미 부분이 이화학당이다. 이화학당 바로 위에 돈의문과 경희궁, 바로 아래에 배재학당이 보인다. 이화학당 대학과는 1925년 이화여전으로 발전하였고, 1935년 신촌으로 이전하였으니, 노천명은 정동 교사 시절의 학생이었다. 노천명보다 10세 연상인 류관순도 이 학교 학생이었다.
 이화학당의 위치가 나오는 서울 지도(<이화백년사> 소재). 연두색 동그라미 부분이 이화학당이다. 이화학당 바로 위에 돈의문과 경희궁, 바로 아래에 배재학당이 보인다. 이화학당 대학과는 1925년 이화여전으로 발전하였고, 1935년 신촌으로 이전하였으니, 노천명은 정동 교사 시절의 학생이었다. 노천명보다 10세 연상인 류관순도 이 학교 학생이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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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은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무렵인 8세 때 아버지를 잃고,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하던 때에 다시 어머니를 잃는다. 시를 쓰기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이화여전 3학년 때이며, 1934년 이화여전을 졸업한 뒤 신문기자가 된다. 당시 노천명은 언니네 집에서 살았는데, 그 집에 김광섭('성북동 비둘기'의 시인)이 잠깐 하숙을 하기도 한다.

노천명은 1936년 신문사에 사표를 내고 여행길에 오른다. 북간도의 용정과 연길 일대가 주 여행지였다. 그가 북간도 여행길에 혹시 용정중학교나 윤동주의 집에, 혹은 그 바로 옆집인 명동교회에 들렀는지 여부는 필자가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혹시 그랬더라면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해본다.

윤동주가 시 '자화상'을 쓴 것이 23세인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때라는 기록에 따르면, 윤동주보다 4세 연상인 노천명이 북간도를 방문했을 당시 윤동주는 아직 용정에 머물러 살 때이다. 두 사람이 용정에서 조우를 했다면, 인생은 찰나의 우연으로 전체가 바뀔 수도 있는 법이니, 혹여 윤동주가 그렇게 비명횡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노천명 역시 '사슴'의 이미지를 고이 간직한 채 무병장수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고. 문득 부질없는 상상을 해본다. 

윤동주 생가
 윤동주 생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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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의 수필 '나의 20대'에 보면 그는 스스로 '그때 이 나라에선 하나밖에 없었던 여자로서 최고학부를 나오자 모 신문사에서 금방 데려갔고, 여기서 일을 하는 한편 나는 나이팅게일이 노래를 토하듯 쉴 새 없이 시를 토했으며, 또 용정이니 북간도니 연길 등지로 한 바퀴 여행하고 와서는 <산호림>이라는 처녀시집을 내놓았다. 당시 내 눈은 머언 데로, 높은 데로만 주어졌고, 눈앞에 있는 것들은 웬일인지 마땅치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1945년 2월 25일 노천명은 매일신보 출판부에서 제 2시집 <창변窓邊>을 발행한다. 당시는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일제의 말상정책이 막바지에 이른 혹독한 시절이었는데도 그는 한글판 시집을 간행했다. 시 한 편을 읽어본다. '촌경村景' 전문이다.

구릿빛 팔에 쇠수랑을 잡고
밭에 들어 검은 흙을 다듬는 낫
보기 좋은 낡은 초갓집 영마루엔
봄이 나른히 기고......
울파주 밖으론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웃는다

노천명이 '사슴'이나 '촌경村景' 같은 시만 썼다라면 얼마나 좋을까. 일제말 암흑기에 한글판 시집까지 낸 그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일시(附日詩)를 발표하여 지금껏 지탄을 받는 신세가 되고 만다. '싱가폴 함락' 일부를 보자.

우리들이 내놓은 정다운 손길을 잡아라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에
일장기가 나부끼고 있는 한 너희는 평화스러우리

1945년 해방이 오고, 그는 10년에 걸친 기자생활을 청산한다. 그런 노천명에게 다시 생의 위기가 닥쳐온다. 1950년 전쟁이 나자 '반역 문화인'으로 몰려 투옥된 것이다. 징역 20년 언도. 한때 언니의 집에서 하숙을 했던, 당시 경무대 비서실장 김광섭 시인이 김상용 코리아타임즈 사장 등과 연기명 진정서를 제출하여 6개월 뒤 풀려나기는 한다. 그러나 '머언 데, 높은 데'만 바라보던 노천명에게 이 투옥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의 유명한 시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는 이 영어(囹圄) 생활의 소산이다. 생애 마지막 시집인 <별을 쳐다보며>에는 20여 옥중시편이 '囹圄에서'로 분류되어 있는데,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도 그 중의 한 편이다.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지붕엔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심고
들장미로 울타리 엮어
마당엔 하늘을 들여 놓고
밤이면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는 마을
놋양푼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노천명의 삶의 굴곡을 모르고 읽으면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는 단순한 전원풍 자연시이다. 그러나 알고 읽으면, 높은 '이름'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이처럼 절망적으로 노래한 시를 다시 찾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자연생활을 동경하고 현실의 부대낌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탈정치적 여성의 낭만 가득한 순수시가 아니라는 말이다.

고독을 사랑하여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부일시를 쓴 이력 때문에 역사에 부끄러운 이름을 남긴 '사슴의 시인' 노천명. '사슴', '촌영村景', '男사당',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같은 주옥의 시편들만 남겼더라면 두고두고 '관이 향기로운' 시인으로 사람들의 '향수' 속에 영원히 기억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회한의 시인 노천명. 후대의 지식인들에게 나처럼 살지 말라는 반면교사의 교훈을 남긴 노천명. 오늘은 그가 이 세상을 등진 날이다. 오늘,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명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며 노천명의 시편들을 읽어본다.

46세 죽음을 앞두고 쓰여진 노천명의 시편들

노천명은 감옥에서 풀려난 후 '사슴' 이미지와는 전혀 거리가 먼 작품들을 발표했다. 유고시집을 제외하면 그의 생애 마지막 시집인 제4시집 <별을 쳐다보며>에는 30여 편의 전쟁시와 감옥시가 실려 있다. 일부를 읽어보면, 생애 끝부분에 서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극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고초를 받는 것이냐
누가 알아주는 투사냐
붉은 군대의 총부리를 받아
대한민국의 총부리를 받아
샛빨가니 뒤집어쓰고
감옥에까지 들어왔다
어처구니 없어라 이는 꿈일 게다
진정 꿈일 게다
- '누가 알아주는 투사야' 전문

나와 친하던 이들 또 나를 시기하던 이들
잔을 들어라
그대들과 나 사이에
마지막인 작별의 잔을 높이 들자 
우정이라는 것 또 신의라는 것
이것은 다 어디 있는 것이냐
생쥐에게나 뜯어먹게 던져 주어라
- '고별' 일부


태그:#노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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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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