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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하지만, 정작 그런 길을 알려주는 책들은 만나기가 어렵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책들이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풍요의 시대가 좋은 줄 알았는데, 너무 많은 작품들 속에서 보석 같은 수작이 묻히는, 좋은 책을 '읽기'보다 '발견하기'가 더 어려운 아이러니라니. '풍요 속의 빈곤'은 책에도 해당하는 말인 것 같다.

책을 고르는 데 있어 신문이나 공공도서관 등의 서평이나 양서 추천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몇 년 전 국방부가 선정한 23권의 금서들은 우리 시대에 꼭 읽어야 할 필독서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요즘은 그런 발표를 안 하는 게 아쉽고, 불황에 허덕이는 출판계를 위해서라도 국방부는 매년 금서 선정을 했으면 좋겠다.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은 베스트셀러 책을 사보았다가 후회하는 경우가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아는지 '베스트셀러 책은 2류다'라고 외치는 용감한(?) 저자 장정일의 독서일기다.
수많은 과작과 졸작으로 울창한 책의 밀림 속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까칠하지만 믿음이 가는 가이드 같은 책이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부터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이명박 대통령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 이르기까지 그가 읽은 80여 권을 통해 국내외 정치 상황과 사회 현상이 날카로운 통찰과 함께 버무려져 빛을 발하고 있다. 작가 특유의 유머와 통쾌한 독설은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읽게 하는 큰 매력이기도 하다.

당신이 책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는 장정일식의 16가지 자가 진단법도 재미있다. 그중 하나를 공개하자면, '다른 데서는 모르겠는데, 유독 서점에서 예쁜 여자 (혹은 멋진 남자)를 보면 거의 심장이 멎는다'이다.

읽은 책이 세상이며, 읽기 방식이 삶의 방식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표지.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표지.
ⓒ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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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파고들면 들수록 도통하는 게 아니라, 현실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 길은 책 속으로 난 길이 아니라, 책의 가장자리와 현실의 가장자리 사이로 난 길이다 - 본문 중

<내게 거짓말을 해봐>, <너에게 나를 보낸다>, <너희가 재즈를 아느냐?> 등을 쓴 소설가이기도 한 저자는 정작 한국 문학에 대해 냉소적이고 비판적이다. 우리나라는 문학이 너무 강한 사회라서 온갖 사회적 의제와 다양한 글감을 문학이란 대롱으로 탈수해버린단다.

예를 들어 BBK 같은 사건이 터졌을 때 제대로 된 사회라면 거의 반 년 안에 스무 권이 넘는 논픽션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그 가운데 어느 한 종이 100만 부 이상 팔리고 그 사건이 시중의 화제가 되고 칼럼에 오르내리는 사회가 <엄마를 부탁해>같은 소설이 100만 부나 팔리는 사회보다 훨씬 바람직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무엇이든 빨리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이 사회 속에서 독서의 속도마저 느린 것보다 빠른 게 좋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현상에 작가는 한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런 가속도의 사회에 살면서 책을 빨리 읽기 위해 조바심치는 사람과 느리게 읽겠다고 작심한 사람은 단지 책 읽기만이 아니라 각기 다른 인생관을 선택한 사람들이라고 해야 한다고.

300쪽짜리 책을 10여 분 만에 읽을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허세 속에는, 사고의 숙성을 본질로 하는 '책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야마무라 오사무의 <천천히 읽기를 권함>을 소개하며 속독에 대해 그는 말한다. 개그는 개그일 뿐 따라하지 말자!

이 책에 실린 많은 독후감을 읽고 파고들면 들수록 도통하는 게 아니라 그의 안내를 따라 현실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책을 읽는 까닭이 책 속에서 위안을 찾고 책을 탐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을 통해서 세상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세속적 삶에 참여하기 위함임을 깊이 공감하게 된다.

책은 죽었다... 책 문화도 죽었다

새로이 출현하는 미디어에 의해 죽어가는 것은 저자가 누구인지도 모를 유명인의 자서전이나 영화 개봉에 맞추어 곁다리로 키워 파는 책, 유명인사의 요리책과 같은 상업적인 책으로 사상이 담겨 있어도 사고를 촉발하지 못하는 책은 인쇄문화이지 책 문화에 속한 책은 아니다 - 본문 중

셔먼 영의 <책은 죽었다>는 책을 '기능적인 책'과 '안티 책(나쁜 책)' 그리고 '책'으로 나눈다. 종이에 잉크를 묻혀 제본을 한 구텐베르크 이후의 발명품으로서 '인쇄 문화'의 말단에 속한 것이 앞의 두 경우, 마지막의 '책'은 숙성된 사고에 의해 자연스럽게 생기는 '책 문화'에 속한다.

책 문화란 숙성된 사고의 동의어로 독자들에게 다양한 사상을 접하게 하고 깊이 있는 통찰을 하게 만든다. 이런 책은 인터넷이나 영상과 같은 새로운 미디어에 의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래 전부터 떠도는 '책의 죽음'은 '인쇄 문화'에 속한 책이지, '책 문화'에 속한 책과 세계관은 몸을 바꾸며 살아 남는다. 

저자는 책의 죽음을 촉발하고 있다는 새로운 미디어 인터넷이 무서운 것은 인쇄 문화를 죽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 숙성될 시간을 빼앗음으로써 궁극에는 사고와 내적활동의 특징을 이루는 책 문화조차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을 사기보단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나에게 '산 책'의 목록에 넣어 두고두고 읽고 싶게 하는 책들이 많이 나온다.

공기, 물, 빛 같은 자연이 베푸는 무료의 공공재산까지도 끔찍이 혐오하는 현대 신흥 봉건세력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는 장 지글러의 <탐욕의 시대>와  야구, 축구, 올림픽 등 엘리트 스포츠에 열광하나 자신은 정작 운동을 전혀 하지 않은채 스포츠 관람에만 넋을 빼는 사람들의 슬픈 관음증을 얘기하는 피터 페리클레스트리포나스의 <움베르토 에코와 축구> 등.

내게도 작가처럼 책을 고르고 평가하는 기준이 있는데 그건 바로 '독후감을 쓰는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이다. 독후감은 마음속에 오래 남는 좋은 책을 되새김질하고 한 번 읽고 나면 다시 넘겨보기 힘든 책을 다시 꺼내 보면서 새로운 발견을 하기도 하며, 책 속의 어떤 글에 빠져 성찰을 하게 하는 좋은 습관이요 제2의 독서다. 그래서 저자도 좋은 책을 읽고도 책에 대해서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면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하는가 보다.

덧붙이는 글 |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장정일 씀, 마티 펴냄, 2010년, 13000원)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장정일의 독서일기

장정일 지음, 마티(2010)


태그:#장정일, #빌린책,산책,버린책, #독서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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