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영리단체 활동가 해외연수로 워싱턴에 도착한 첫 날, 시차 적응 안 되어 축축 쳐지는 지친 몸으로 알링턴 국립묘지를 방문하였습니다. 미국 전쟁 영웅들을 꼭 만나야 한다는 무슨 사명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여행사의 배려(?) 때문에 공항에서 워싱턴으로 이동하면서 맨 처음 들런 곳이 바로 알링턴 국립묘지입니다.
미국인들에게는 굉장히 의미있는 장소인 때문인지 흐리고 추운 날씨였지만 많은 관람객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알링턴 국립묘지는 포토맥 강을 사이에 두고 워싱턴 D. C.와 마주보고 있는 곳인데 200㏊가 넘는 커다란 공동묘지입니다.
여행사 가이드 '데니 정' 선생님은 케네디 묘역으로 걸어가는 길에 연도를 줄줄이 꽤면서 미국 역사와 알링턴 묘지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었습니다만 제 귀에는 별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묘지 중앙에 있는 아테네 양식의 건물 '알링턴하우스'와 로버트 리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익숙하지 않는 미국 역사여서 별로 기억에 새겨지지는 않았습니다. 리 장군은 남북 전쟁에 참가하였던 유명한 장군인 모양인데, 이 건물은 알링턴하우스라고 불리며 로버트 E.리 장군의 기념관으로 쓰인다고 하였습니다.
이곳에는 미국 남북 전쟁에 참전하였던 군인들, 그리고 미국독립전쟁 때 죽은 몇몇 장교들을 비롯해, 미국이 참전한 모든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많은 군사지도자들과 저명인사들도 이곳에 묻혀 있다고 하는데, 존 J.퍼싱 장군, 리처드 E.버드 제독,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로버트 E.피어리, 조너선 웨인라이트 장군, 조지 C.마셜 장군, 로버트 토드 링컨, 피에르 샤를 랑팡 소령,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존 F.케네디, 로버트 F. 케네디 등 입니다.
위인 전기 속의 옛 영웅 케네디 무덤에서그 중에서 제게 익숙한 이름은 케네디 형제 뿐입니다. 그중에서도 익숙한 이름은 대통령을 지낸 존 F.케네디는 한 사람 뿐 입니다. 철 없던 어린 시절에 읽은 위인 전기 전집 시리즈에 미국 제32대 대통령을 지냈던 존 F.케네디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 소년이었을 때, 이 유명한 취임 연설문(어른이 된 후에 케네디가 이 연설문을 베꼈다는 것을 알았지요)에 감동하였고,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 하려고 하였을 때, 핵전쟁을 불사하겠다며 소련의 미사일 배치를 막아낸 자유 세계의 영웅(?)에게 감동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에는 젊은 나이에 암살 당한 영웅(?)에 대한 경외감 같은 것도 있었고, 그의 묘지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다는 것도 아주 멋있게 생각하였답니다. 책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하였지만, 그 때는 케네디가 아주 멋있고 훌륭한 미국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그의 전기를 수십 번도 더 읽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좀 더 철이 들어 미국이라는 나라를 몰랐다면, 어쩌면 워싱턴 케네디 묘지 앞에 서서 감격하였을 수도 있었는데. 미국이라는 나라를 많이 알고 난 지금은 한 때 영웅이었던 케네디의 무덤도 그냥 무덤일 뿐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위인 전기에 나와 있던)영원히 발전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를 상징한다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도 별 감동을 주지 못하더군요.
알링턴 국립묘지 케네디 무덤에 서서 내 어린 시절 위인을 다시 한 번 떠 올려보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위인 전기에 나온오는 또 다른 미국인 영웅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케네디의 개인사를 줄줄 외울 수 있었지요. 늦기 전에 철이 들어 그들을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제 아이들이 읽는 위인전기 전집에는 케네디나 맥아더 같은 미국인들이 빠진 자리에 김구, 장준하, 전태일 같은 분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습니다.
재혼한 영부인도 국립묘지에...우리나라였다면?케네디 묘지에는 우리와는 다른 미국인들의 자유스러운 면을 볼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케네디의 아내였던 재클린의 묘 입니다. 케네디가 죽은 후에 재클린은 그리스 선박 재벌과 재혼을 하였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였다면 외국인과 재혼한 영부인 재클린이 전 남편이었던 케네디 대통령 옆에 나란히 묻히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사생활의 '자유'는 우리보다 앞서 있다고 여겨지더군요.
아 ~ 그리고 이건 그냥 제 느낌인데요. 김해 봉하마을에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박석 무덤과 느낌이 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무덤에 봉분이 없는 탓인지, 아니면 박석 묘역의 느낌 때문인지 왠지 저는 그냥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어갔는데, 제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지구상에는 단 하루도 전쟁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 대부분의 전쟁에는 미국이 관련되어 있는데.수 많은 이름없는 죽음들 앞에서 미국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였습니다.
알링턴 국립묘지 입구의 기념관에서 미국이 주장하는 '자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을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희생된 수 많은 젊은 죽음들을 표현하였는지 모르지만, 그림을 보는 저에겐 '자유의 여신상'이 상징하는 미국인들의 자유는 전쟁과 총, 칼 그리고 무력으로 유지되는 이 나라 권력 집단의 자유라는 느낌이 확 들더군요.
끝도 없이 서 있는 하얀 비석들을 보면서 자신들에게 죽음을 안겨 준 전쟁의 의미를 얼마나 알고 죽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 국립묘지나 마찬가지겠지만, 알링턴 국립묘지 역시 그 동안 저지른 전쟁 살인을 반성하는 장소가 아니라 수 많은 젊은이들에게 조국을 위해(?) 기꺼이 전쟁에 참가하도록 용기(?)를 심어주는 장소인 것이 못내 불만스러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제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