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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른 실력으로 교사를 부끄럽게 만드는 제자 한둘 꼭 있기 마련이다. 역사교사로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최고라고 자부했지만, 얼마 전 '적수'를 제대로 만났다. 올해 우리역사바로알기대회에 참가하겠다는 그를 지도교사로서 만난 뒤, 알아갈수록 그의 출중한 실력에 혀를 내두르게 됐다. 그는 고작 고1이지만, 달리 설명할 길 없는, 준비된 역사학자다.

전공자조차 힘들어한다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1급)을 이미 중2 때 통과했고, 중3 때는 학교에 역사 동아리를 결성해 고장의 문화유적을 답사하고 토론학습을 주도하는 등 발군의 기량을 뽐냈다. 특히 중3 때 우연한 기회에 참가한 우리역사바로알기대회에서 수상을 하면서 해외의 역사유적을 둘러보는 소중한 기회도 얻었다고 한다.

이미 중학교 때 그는 진로에 대한 탐색을 마친 것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역사에 대한 관심은 각종 역사서 탐독으로 이어졌고, 그는 지금 웬만한 전공자를 훌쩍 뛰어넘는 시야와 인문학적 소양을 지니고 있다. 그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답변하고, 나이답지 않게 주관도 뚜렷하다.

비록 지켜본 기간은 짧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역사뿐, 다른 꿈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또래 여느 아이에게 꿈이란 그저 '직업'을 말할 뿐이지만, 그의 포부는 당찰 뿐만 아니라 너무나 구체적이다. 그에게 꿈을 물었더니, 그냥 역사학자라고 답하는 게 아니라, '동아시아를 포괄하는 입장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새롭게 써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의 역사에 대한 '때 이른' 관심과 출중한 재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해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관련 사교육을 받았는지, 부모님의 '다각적' 지원에 힘입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십수 년간의 교직 경험으로 보면, 대개 요즘의 '영재'는 타고나는 게 아니라 조작적으로 길러져 온 게 사실이다.

아뿔싸, '역사 사교육도 다 있느냐'며 되레 반문했다. 그가 가본 학원이란 그동안 별 관심이 없어 아예 손 놓고 있던 영어·수학의 맛을 보기 위해 한두 달 경험한 게 전부란다. 더욱이 대다수 기성세대가 그렇듯, 그의 부모 역시 나중에 사회에 나와도 취직하기 힘든 분야라며 한사코 말렸다고 한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건 학교 교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위의 만류를 이겨내고, 탁월한 실력을 쌓을 수 있었을까.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역사가 마냥 좋았다. 또래의 아이들이 과학이나 만화에 빠져 있을 때 역사책을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중학교 진학 후 공부해야 할 과목이 늘어나고 시간도 부족해 잠시 흔들렸지만, 그때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따로 준비하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늘어가는 국영수 학습량에 치여 힘겨운 '준비된 역사학자'

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장 모습.
 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장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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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나니 일과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방과 후에 집에 돌아오면 어김없이 EBS 강의를 청취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참고할 만한 책을 구해다 읽었고, 시험을 코앞에 두고는 시중의 관련 수험서를 구입해 풀어보며 혼자 열심히 준비했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도 주위의 반응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애쓴 결과는 1급이라는 '스펙'으로 돌아왔고, 그제야 그의 부모도 결국 '체념'하게 되더란다. 그 이후 남은 중학교 시절, 그는 정말 후회 없이 역사를 공부하며 보냈고, 해외의 역사유적을 둘러볼 기회를 가진 것도 그즈음이다.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금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야 한결같을 테지만 어디 인문계 고등학교 생활이 그러한가. 아침부터 밤늦도록 계속되는 입시 공부는 그의 재능을 전혀 알아봐주질 못한다. 비교과 영역의 활동이 중요해지고 수능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다지만, 학생들이 느끼는 입시 공부에 대한 중압감은 그다지 줄어들지 않았다.

수능은 늘 해오던 대로 준비하고, 더불어 비교과 영역 또한 따로 챙겨야 한다고 여긴다. 어느 하나 출중한 능력만으로는 어림없다는 건 교사와 학부모는 물론, 학생들조차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일단 국영수가 바탕이 되어야만 자신만의 특기와 적성을 배려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온 터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고등학교 들어와 가장 먼저 들은 얘기가 '수능'과 '국영수'라고 한다. 수능에서 고득점을 얻기 위해서는 국영수 성적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치러지는 전국 단위의 모의고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학교생활 지침을, 전장에 나가는 병사처럼 결연한 자세로 들어야 했다.

기실 공교육의 교육과정 자체가 획일화될 수밖에 없다. 콘크리트 거푸집까지는 아니더라도 같은 공간에 모여 동일한 기간 동안 정해진 과목과 표준화된 시수로 교육 받은 학생들이 재능도, 취미도, 심지어 성향까지도 비슷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렇다고 개개인의 특성을 배려해 예외를 두기도 곤란한 곳이, 특히 고등학교다.

그도 그걸 잘 알기에 바람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학교에 '특별한 대우'를 차마 요구하지 못하겠단다. 그런데도 나날이 늘어만 가는 국영수 학습량에 치여 틈만 나면 역사책을 꺼내 읽던 습관마저 시들해졌다. 영어야 유학 준비를 위해 기꺼이 공부한다지만, 수학 같은 과목은 오로지 입시를 위해 견뎌내야 한다는 생각에 흥미도 잃고, 효율도 떨어진다고 말한다.

그를 위해 학교가 조금 양보하고 배려해주면 안 될까

대학입시가 모든 고등학교의 교육목표가 돼버린 현실과, 그러자면 도구과목이라는 국영수에 '올인'해야 하는 여건 속에서 그의 남다른 재능은 시나브로 퇴색될 수밖에 없을 듯하다. 공부의 재능도 이왕이면 국영수와 가까워야지, 입시에 별 도움도 안 되는 '기타 과목'과 관련된 것이라면 솔직히 별 쓸모가 없다.

입시를 준비하면서 그가 앞으로 받게 될 스트레스가 눈에 훤히 보인다. 고등학교는 그의 재능에 득이 되기는커녕 해가 될 게 뻔하므로, 적응하자면 또래 아이들처럼 '평범'해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마음 독하게 먹은 채 재능을 살려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학교 교문을 박차고 나가는 수밖에.

과연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할까. 그를 위해 학교가 조금 양보하고 배려해주면 안 될까. 예외를 허용하면 전체 학생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낡은 훈육 방식을 고집하는 현실이 아쉽다. 학교교육을 통해 양성하려는 인간상이 여전히 20세기에 머물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지금도 수많은 영재가 십수 년간의 학교생활을 거치며 시나브로 범재가 되고, 심지어 둔재로 전락하고 있는지 곱씹어 볼 때다.

과연 그의 꿈은 이루어질까. 장차 역사학자가 되어 동아시아의 포괄적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쓸 수 있을까. 그러자면 지금 이 시간에도 꿈을 향해 지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뚜벅뚜벅 나아가야 할 텐데, 고등학교 생활이 그의 꿈에 장애가 되지나 않을는지. 너무나 행복했다는 중3 시절, 과연 그에게 다시 오게 될까.

헤어지며 설령 입시 공부가 버겁고 힘이 들더라도 부디 학교를 원망하며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아무 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 지도교사랍시고 그저 값싼 응원의 메시지 한 줄 건넨 것이다. 그러나 그는 되레 걱정하는 나를 위로했다. 그것도 낙천적이고 대범한 말투로.

"중학교 때부터 학교에 무언가를 바라지 않았어요. 공부도 결국엔 제가 하는 거지, 선생님 수업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건 못난 짓이라 여겼거든요. 학교를 통해 모르는 친구들을 알게 됐고, 함께 뛰어놀며 사귈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저 혼자 학교를 전세 낸 것도 아닌데, 저만 봐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솔직히 두렵긴 하지만 공부하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도중에 학교를 그만두고 스스로 제 미래를 개척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디선가 읽었는데, 역사란 모름지기 '남다른' 이들이 남긴 '남다른' 삶들의 총합이래요."


태그:#입시교육, #국영수 위주 교육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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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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