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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일요일 오후 <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가 방송되고 나면 각종 인터넷 게시판과 SNS에는 <나가수> 관련 내용이 거의 실시간으로 올라온다. 기사에 달리는 수천 개의 댓글까지…. 주말엔 <나가수> 독점이라는 말까지 돌 정도다.

그중에서 가장 핫한 인물은 단연 임재범이다. '재범신'이라는 호칭에 '재범앓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길 지경이니, 월요일이 되면 무편집으로 제공되는 영상을 몇 차례고 돌려보기 일쑤다.

개인적으로 지난주의 하이라이트는 임재범의 내레이션이 아니었나 싶다. 눈시울을 붉히며 가슴 속 응어리를 토해내듯 노래하던 임재범.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감정을 추스르려 애를 쓰며 내레이션을 한다. 그의 몸에서 나온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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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바로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고원무립에 유폐시켰던 임재범은 <여러분>이라는 노래를 통해 광장으로 돌아왔다. 대중을 위로해 주고, 대중에게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순간, 그의 눈빛은 이제 더 이상 날카롭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노래와 삶이 일치된 순간이 아닌가 싶은데, 한 곡의 노래는 이렇게 한 인생의 중심을 옮겨 놓을 정도로 힘이 세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물론, 노래에 바뀐 인생이 임재범 그 하나뿐만은 아니다.

[나도 가수다①] 못생긴 계집종에서 명창이 된 '석개'

주유청강(舟遊淸江), <혜원풍속도첩 (蕙園風俗圖帖)> 중에서, 종이에 담채 28.2 cm x 35.2 cm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소장).
 주유청강(舟遊淸江), <혜원풍속도첩 (蕙園風俗圖帖)> 중에서, 종이에 담채 28.2 cm x 35.2 cm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소장).
ⓒ 혜원 신윤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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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의 법도가 지엄하던 조선조에 못생긴 계집종에서 비단옷 입고 노래하는 명창이 된 이도 있으니까, 그가 바로 석개. 생긴 걸로 트집을 잡는 것이 안티를 만드는 지름길인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 석개라는 인물에 대한 묘사에서 생김새를 빼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활달한 문체를 가진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석개를 대뜸 이렇게 그리고 있다.

"얼굴은 늙은 원숭이 같고 눈은 좀대추나무로 만든 살같이 작았다."

듣는 이가 민망할 정도로 야박한 평가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계집종 석개는 이런 생김새 때문에 안방마님의 몸종 노릇이 아닌 나무통을 지고 물을 길어오는 일을 하게 되었다.

허나, 시키는 대로 물통이나 날랐다면 우리가 석개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을 터. 석개는 우물가에 가서 물통은 우물 난간에 걸어두고 온종일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면 빈 물통을 지고 집으로 돌아오니,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다름 아닌 매타작이었다. 하지만 매를 맞아도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니 이번에는 그의 손에 약초 광주리가 건네졌다. 그럼에도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석개의 하루는 달라지지 않았다.

석개는 광주리를 들판 한가운데 놓아두고 작은 돌멩이를 주워서 노래 한 곡을 부를 때마다 돌멩이 하나를 광주리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해서 광주리가 돌로 가득 차면, 이번에는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광주리 속에 있는 돌을 들판에 던졌다. 돌을 가득 채웠다가 다시 쏟아내는 것을 하루면 두세 차례씩 반복하다가, 역시 날이 저물면 빈 광주리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어지는 것은 매타작의 리플레이. 하지만 그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는다. (<악인열전>(허경진 평역, 한길사) 참조)

송인 신도비.
 송인 신도비.
ⓒ 한국문화관광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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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 소식은 집주인 송인*에게까지 전해지고 이것을 기이하게 여긴 주인의 아량으로 석개는 노래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매타작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그의 노래에 대한 사랑은 바야흐로 꽃을 피우게 된다. (* 이암 송인은 조선 중기 학자로 이황·이이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할 정도의 명망 높은 학자였다. 중종의 셋째 서녀(庶女) 정순옹주(貞順翁主)와 결혼, 여성위(礪城尉)가 된 송인은 계집종 석개의 노래를 듣고 본격적으로 노래를 배우게 해 주었다.)

장안에서 제일가는 명창이 되고 근래 100년 동안 석개만한 명창이 없게 되었다는 평을 받았으니. 계집종에서 명창으로 인생 역전. 물통과 광주리를 들고 다니던 그는 아로새긴 안장에 수놓은 비단옷을 입고 날마다 권세 있고 귀한 사람들의 잔치에서 노래를 하게 된 것이다.

[나도 가수다②] 재상 집안에 태어나 노래 때문에 가문서 퇴출당한 '권삼득'

'비가비'로 이름을 떨친 권삼득의 묘.
 '비가비'로 이름을 떨친 권삼득의 묘.
ⓒ 완주군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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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노래가 이렇게 인생역전 엘리베이터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재상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노래 때문에 가문에서 퇴출당한 이도 있다. 안동 권씨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최초의 양반 출신 광대 비기비가 된 인물, 그의 이름은 권삼득이다.

삼득이, 처음 들었을 때 좀 촌스럽고 없어 보인다 싶지만 이것은 정조로부터 하사받은 귀하디귀한 이름이다. 정조는 하늘, 땅, 사람의 소리 즉 새, 짐승, 사람의 소리를 모두 얻었다 하여 그에게 '삼득이'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참고로 삼득 명창이 새타령을 부르면 부근의 숲 속에서 새가 날아들었다는 이야기가 인증으로 전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권삼득 명창의 인생에 노래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살펴볼 차례인데. 성미 급한 이들을 위해 권삼득 명창의 묘비를 먼저 살펴보라 권하고 싶다.

소리가 좋아
소리 위해 태어난 인생이라.
양반도 싫고 벼슬도 싫어
오직 소리와 더불어 살다 가신
비가비 명창
국창 권삼득 명창
한 많은 그 세상
맺히고 서린 애환을 접고 두고
여기 이목정에 고이 쉬시나니
영령 앞에 귀 기울이며
흥보가 덜렁게 한 마당이
생시인 듯 쩌렁하여라

권삼득 명창은 정조, 순조 때 활약한 최초의 비가비 명창이다. 여기서 잠깐 인터넷 국어사전에서 비가비의 뜻을 찾아보면 "조선 후기에, 학식 있는 상민으로서 판소리를 배우는 사람을 이르던 말"이라 나온다. 권삼득은 그저 학식 있는 상민의 자제가 아니고 권세 높은 안동 권씨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말하자면 날 때부터 금수저 하나 입에 물고 나온 셈인데, 이것은 도리어 그 시대 명창에게는 삶의 굴레가 되었던 것이다.

권세 높은 양반가에서 글공부 대신 소리 공부를 한다고 하니, 굳이 상상의 나래를 펴지 않아도 권삼득 명창이 부모에게 어떤 소리를 들었을지는 쉬 짐작할 수 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허락할 수 없다' 혹은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고얀 놈' 같은 사극 톤의 대사가 그치지 않았을 터. 하지만 그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도 판소리를 버리지 못하니 그 끝은 멍석말이였다.

사람을 멍석에 말아 물을 뿌려대며 때리는 멍석말이를 당하면 자칫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기 십상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기에 자식을 멍석말이를 해서 때려죽일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건지.

허나 여기서 드라마틱한 반전이 있었으니 삼득 명창이(이때는 '삼득'이라는 이름을 얻기 전이니 '권정희'라는 본명으로 불렸을 게다) 이런 명대사를 날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리나 한 번 하게 해 주십시오."

허위의식에 가득한 양반이라고는 하나, 그들 역시 심장이 있는 사람인지라 그 마지막 애원마저 뿌리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삼득 명창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노래했다.

곡명은 <춘향가> 중 '십장가'. 옥에 갇힌 춘향이가 집장사령에게 매를 맞으면서 그 숫자에 맞추어 자신의 절개를 읊은 노래였으니, 과연 탁월한 선곡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듣는 이의 애간장을 단숨에 녹여 버릴 정도의 절절하고 통절한 노래. 그 비장한 소리는 집안 어른들의 얼음장 같은 마음을 움직였으니 그를 죽이는 대신 족보에서 빼고 쫓아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시간의 강을 건너서도 여전히 유효한 말은?

석개와 권삼득 명창의 소리, 그것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는 심금을 울리는 경지였던 것이다. 임재범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린 우리 여러분들 역시도 심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지 싶다. 노래에 바뀐 드라마틱한 삶의 풍경. 그것이 보통의 경지는 넘어서는 일이라 할 만하다.

이제 기꺼이 임재범의 '여러분'이 된 나는 그가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하차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번 주 일요일에 틀림없이 텔레비전 앞에 앉을 생각이다. 다음 주에도 누군가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 노래를 부르리라 믿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그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나가수> 제작진들이 내게 한마디만 할 수 있게 허락해 준다면, 그동안 뒤적였던 책에서 찾은 한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전방 보는 사람이 어찌 모본단(模本緞)만 가지고 장사를 하겠느냐?"

명창 송만갑(宋萬甲, 1866년~1939년)이 한 말이다. 옷감가게에 온 사람이 비단을 원하면 비단을 팔고, 무명을 원하면 무명을 팔듯이 청중이 원하는 소리를 자유롭게 불러 들려 주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대중의 눈높이를 알고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예술관, 시간의 강을 건너서도 여전히 유효한 말이지 싶다.


태그:#나가수, #석개, #권삼득, #명창, #임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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