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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머니가 입원해 계시는 병실에서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다. 그 따님께서 임종을 지켜보겠다고 뜬눈으로 지내다시피 했지만 결국 지켜보지는 못했다. 환자 보호자가 앉아 있을 만한 자리가 없는 병실 구조 때문이었다. 자리가 없는 까닭에 사흘이나 뜬눈으로 보내다시피 해온 그녀는 잠시 눈 좀 붙이고 온다고 1층 로비의 대기실 의자에 앉았다가 그만 잠에 푹 빠지고 말았다.

 

정신없이 자다가 깜짝 깨어 올라갔을 때, 그때 그녀의 친정 어머니는 이미 운명하신 뒤였다. 그녀는 "내가 죽일 년"이라고 울부짖으며 가슴을 쳤지만, 환자 보호자를 배려하지 않는 병원 당국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효자병동이었으니까. 효자병동은 보호자를 배제하되 간병인들이 교대로 환자의 기저귀도 갈아주고 밥도 먹여주고 하면서도 비용은 저렴하다는 것을 입원 당시에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어머니가 누워 계시는 병실은 병상이 9개인 9인실이다. 환자가 아홉 명이니 그에 따른 이야기도 아홉 개일 것 같은데 아니다. 한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 다른 이야기가 나오고, 거기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게 나오고, 또 나오고 하다 보니 지난 17일 동안 내가 들은 이야기가 벌써 몇 개인지 헤아릴 수조차 없게 되었다.

 

뜬금없이 나를 장가보내 주겠다는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

 

그 중에서도 어머니와 바로 이웃한 환자분의 따님께서 들려준 그들의 가족사는 두고두고 새겨볼 만했다. 그녀는 뜬금없이 나를 장가보내 주겠다고 해서 한참이나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머니가 퇴원하시면 아들 혼자서는 아무래도 어렵지 않겠느냐고, 그러니까 아내가 있어야 하는데 그 아내를 자신이 소개해 준다는 것이었다.

 

원 세상에 무슨 그런 엄청난 친절을…. "지금 세상에 그런 여자가 어디에 있기나 하겠습니까" 했더니 자신의 사촌언니가 지금 남편이 없이 혼자 살고 있다고, 그러니까 좋다고만 하면 언제라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병원 출입을 오래 하시다 보니 모두가 내 마음 같아 보이시나 봅니다?"

"그럴까요? 아닌데, 우리 사촌언니는 겁나게 착해서 그러자고 할 수도 있는데?"

 

희생을 착함으로, 착함을 희생으로 파악하는 민심은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아니 어쩌면 병원이기에 그런 터무니없는 착각이 더 심하게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병원을 자주 드나들다 보니 내 마음가짐도 많이 이상해졌다. 세상이 온통 죽음 직전의 환자들인 것만 같고, '그 사람'이 죽기 전에 내가 극진한 친절을 베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될 것 같은 안타까운 초조감조차도 있다. 옆 병상에 누군가 문병이라도 올라치면 그 사람이 천사 같아서 내가 그만 감격해져 버리기도 한다.

 

병동이 노인들만 따로 집중적으로 간병인을 배치해서 관리하는 곳이다 보니 문병을 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항상 북적거리는 아래층의 일반병동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예식장이나 장례식장의 부조금이 그렇듯이, 문병도 일종의 품앗이요, 비즈니스 개념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실감나게 와 닿는 장면이었다. 

 

나를 장가 보내겠다는 등 과도한 친절을 베푼 그녀는 저 멀리 인천에서 왔다고 했다. 친정 부모가 재산을 죄다 아들들에게 떼줘 버리고 쓸쓸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당뇨합병증으로 통원치료를 받다가 결국 입원을 했단다. 그날로 최종선고를 받았는데 그게 벌써 50여 일 전이라고 했다. 50일 전에 내려와서 아직까지 올라갈 엄두를 못 내고 있다는 거였다.

 

"아니 그러면, 집은 어떻게 하시고…. 아이들이랑, 남편도, 시댁에서는 또…."

"저도 물론, 누군가 와서 교대를 하자고 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은 있죠. 그런데 아무도 안 오네요. 왔다가도 교대하잘까 봐 겁나서 그러는지 후딱 가 버리고…."

 

"아, 음…."

"그렇지만 뭐, 이 정도는 괜찮아요. 내 어머니인데, 누구한테 봐달라고 하겠어요. 시댁의 눈치가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그래요. 제가요, 그런 게 좀 있어요. 21년 전에 시어머니가 여자들 자주 걸리는 암 수술을 했는데, 그때 제가 석 달 동안 병원을 떠나지 않고 지켰어요. 그게 하필 제가 큰애를 낳고 다섯 달쯤 뒤였는데, 딸이었거든요.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없어서였겠지만, 건강하니까 잘 자라겠거니 여기고 시어머니한테만 매달렸던가 봐요. 갑자기 아이가 폐렴이 걸리고, 그리고 보름도 안 돼서 가 버렸는데, 그때 저는 시어머니가 당신의 가슴이라도 쥐어뜯을까 봐, 너무 슬퍼하다가 병이 악화될까 봐 울지도 못했어요. 그때 울지 못한 것이 가슴속에 아직도 납덩이처럼 있는데, 남편이나 시어머니나 그것을 다 알고 있어요."

 

그녀가 50여 일 동안이나 집으로 선뜻 못 가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했다. 친정 어머니의 삶이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친정 아버지가 과거의 천석군 부자 기질이 아직도 있어서 당신 손으로는 라면 하나도 끓여먹을 줄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우리가 육남 일녀, 칠남매거든요.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자식들이 그렇게도 많아요. 아들 여섯은 모두 대학을 나오고, 일부는 대학원도, 유학까지도 다녀왔어요. 하나 있는 딸년은, 고명딸이라고 그렇게도 이뻐하고, 깨물어 먹을 듯이 하면서도 학교는 안 보내주더라고요.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시집가서 고생한다고, 그래서 고등학교 마치고 관뒀는데, 시집가서 결국 소원풀이는 했죠. 남편이 야간대를 다니라고 해서, 그랬는데…."

 

이 대목에서 그녀는 갑자기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게 창피했는지 벌떡 일어서더니 병실을 나가 버렸다.

 

다음날 다시 만난 그녀의 다른 이야기

 

그리고 다음날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띄엄띄엄, 간간이 얻어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의 친정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모든 것을 걸었던 모양이었다.

 

300마지가 넘는 논밭이 아들 하나 대학 들어갈 때마다 줄어들고, 유학 떠날 때 줄어들고, 결혼해서 집 장만한다고 줄어들고, 사업자금이 모자란다고 해서 또 줄어들고, 그렇게 줄고 줄다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팔순을 즈음해서 완전히 정리가 되었다고 했다. 남은 재산을 모두 처분해서 큰아들이 얼마, 둘째가 얼마 하는 식으로 최종 분배가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때 어머니와 저는 강력히 반대했었죠. 이건 뭔가 잘못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러자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애원을 했죠. 밭 세 마지기만 고추농사라도 짓게 남겨 달라고, 사정사정, 애원애원, 그렇게도 애절하게 부탁을 해서 겨우 밭 세 마지기 남았어요. 그것으로 지난 칠 년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가 먹고 살아오신 거죠. 노령연금 몇푼 보태고 해서…."

 

"그러니까 이게, 무슨 얘기죠? 아버지께서 당신 부부의 거처를 아들네로 옮기겠다는 생각으로 재산을 모두 처분해서 분배해 줬는데 그게 잘 안 되었다, 그래서 고추 농사 세 마지기로 연명해 오셨다, 그런 말씀이신가요?"

 

"그랬던 거죠, 뭐. 아버지도 자존심이 있으니까, 누구 하나 콕 찍어서 나 내일부터 너한테 가겠다, 하지를 못했으니까, 아들들은 서로의 눈치나 살피면서 나름대로 전전긍긍했겠죠. 물론 부모를 모셔오자, 안 된다 하는 그런 부부싸움도 어지간히 했을 거고, 알아요, 나도, 그 정도는. 어쨌든 아무도 부모님을 자기 집으로 오시라고 먼저 나선 자식은 없었으니까. 가끔 내려와서 용돈이나 내놓고 돌아갔을 뿐. 우리 어머니가 미래를 잘 내다봤던 거죠. 그놈의 고추밭 세 마지기라도 없었다면 어쨌을까…."

 

실제로 그녀의 어머니는 거의 온종일 혼미한 정신으로 숨을 헐떡이면서도 순간순간 정신이 돌아오면 그때마다 고추밭 걱정을 하고 계셨다. 얼른 가서 고추모종 해야 하는데 이게 무슨 쓸데없는 호강이냐면서 안 그래도 가쁜 숨을 더욱 가쁘게 몰아쉬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거의 말이 없었다.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그렇게 매일 두 차례 출근을 해서 병상 앞에 가만히 선 채로 삼사 분 정도 할머니를 쳐다보고 있다가 돌아서곤 했다. 연세가 아흔이 다 됐는데도 허리 하나 굽지 않았고, 머리에 쓴 베이지색 중절모와 손에 든 검정 지팡이가 어쩌면 그렇게 잘 어울릴까 싶을 정도의, 이를테면 꼿꼿하게 자존심 강한 노신사 풍이었다. 그런 노신사를 상대로 그녀는 어느 하루 싸움을 걸었다.

 

할머니가 산소호흡기를 부착하기 하루 전날 오후 8시 즈음이었다. 직원들도 모두 퇴근하고, 환자 보호자들도 몇 명 안 남아 있는 1층 로비의 대기실 의자들 사이에서 그녀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날카롭게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그 많은 재산에서 십 분의 일만, 아니 백분의 일, 천 분의 일만이라도, 예? 그렇게 해서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무한테나 장학금으로 주었어도 오늘 이렇게 아버지가 외로워져 버렸겠어요? 좋은 일 했다고, 잘 살아 오셨다고, 고맙다고 인사 오는 사람이 아마 지금쯤 줄을 섰을 거요. 안 그렇소?"

 

그녀는 차마 아버지를 쳐다보지는 못하고 있었다. 말은 그렇게 모질게 하면서도 고개를 수그린 채 손가락을 정신없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멀리서 희끗거리는 텔레비전 화면만 무연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시방 이것이 뭐예요. 뭐냐고요. 그런 것들을 아들이라고, 아버지의 미래라고 믿고 다 퍼주고 말아요? 차라리 공산당을 믿지. 공산당을 믿었어도 아버지가 오늘 이렇게까지 불쌍하게 됐을 것 같아요? 그럴 것 같냐고요."

"너도 인제 미쳐가는갑다, 내얄 당장 느그집으로 올라가거라."

 

그녀의 아버지는 그 말과 함께 벌떡 일어섰다. 중절모를 벗었다가 다시 쓰고, 지팡이로 바닥을 딱, 딱 소리도 크게 짚어가며 자동으로 열린 문을 빠져 나갔다. 그녀를 미치게 하는 것은, 못 견디게 하는 것은 자신의 친정 어머니가 언감생심 특실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일반병동 2, 3인 실에도 못 들어가고 아홉 명이나 북적이는 거의 '빈민굴' 수준의 병실에서 오직 하나 죽음의 시간만 기다리고 있다는 점인 것 같았다. 어쨌든 그녀의 어머니는 다음날 오전 산소호홉기를 부착하게 되었다.

 

산소호흡기 단 부인을 쳐다보던 할아버지의 한마디 "자네, 얼른 죽으소"

 

저녁 시간이 되어 그녀는 친정 아버지 식사를 챙기러 집으로 가야 했다. 병실을 나서기 전에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계속 그래 왔듯이 핸드폰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자기 어머니에게 무슨 이상한 징조가 보이면 즉각 폴더를 열어서 맨 위의 번호로 연락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내가 만일 자리에 없었다면 다른 사람에게 같은 부탁을 했을 터였다.

 

그녀가 그렇게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할아버지가 병실로 출근을 했다. 삼사 분 정도 가만히 선 채로 부인을 쳐다보던 할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말없이 돌아섰다. 돌아섰다 싶은 순간 다시 홱 돌아서서 한 걸음 바싹 다가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자네, 얼른 죽으소."

 

잠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산소호흡기를 손으로 툭 쳤다.

 

"이것이 뭐인가. 이것을 달고 있으면 자네가 살아나는가? 아니잖어. 얼른 죽으소. 자식 새끼 하나 있는 것 먼저 보내고 뒤따라 갈라고 이러고 있는가? 얼른 죽으소. 얼른 죽으란 말이시."

 

마지막 한 마디에서 울음이 터졌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중절모를 벗어서 눈가를 거칠게 문질러대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움직일 때면 항상 딱, 딱 하고 들리던 지팡이 소리가 이번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는 지팡이로 자신의 몸을 의지하지 않고 손에 그냥 든 채로 질질 끌면서도 잘 걷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온전히 사라진 뒤에서야 하신 말씀이 좀 이상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 새끼"라는 말씀. 그 순간의 할아버지는 아마 여섯이나 되는 아들들의 존재를 일시적으로 망각해 버렸던 모양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사십여 분쯤 뒤에 그녀가 돌아왔다. 들어서는 그녀의 눈은 이미 퉁퉁 부어 있었다. 아버지의 저녁을 챙기고 집에서 병원까지 오는 동안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얼마나 많은 흙먼지가 그 눈물 속으로 섞여 들었는지 흡사 아이들이 마스카라 같은 것으로 장난질을 쳐놓은 것 같았다.

 

물어보지 않아도 할아버지는 아마 집에서 자신의 밥을 짓고 있는 '딸년'에게 소리를 질렀을 터였다. 어서 빨리 산소 호흡기 그놈의 것 떼어 버리라고. 그리고 딸은 그에 맞서 또한 소리를 질렀을 터이었다. 아버지가 직접 떼고 오시지 왜 집에 와서 큰소리냐고.

 

병상 앞에 우두커니 선 채로, 목에서 나오는 끅, 끅 소리를 어쩌지 못한 채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다른 여덟 명의 환자와 간병인들, 그리고 마침 문병을 왔다가 이상한 기척에 얼굴을 내민 다른 병실 사람들이 오랜 시간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태그:#노인병동, #산소호흡기, #아버지와딸, #어머니,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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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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