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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림의 부인이 보낸 편지

최근 집에서 자료를 정리하다가 한동안 행방을 몰랐던 편지 한 통을 우연히 찾았습니다. 편지 수신일자가 1999년 1월 19일로 돼 있으니 햇수로 12년이 넘은 것입니다. 편지봉투 겉면을 보니 제가 보낸 편지에서 제 주소를 잘라 되붙였는데, 당시 제 소속이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편집국 문화부'로 돼 있군요.        

이야기는 지금부터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박정희 일대기' 연재를 하면서 만주군관학교 동창생들을 더러 인터뷰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군관학교 1기 후배인 최주종(작고, 육군 소장 예편) 전 주공 사장이었습니다. 최 사장을 만나러 구 반포 주공아파트 자택을 방문했다가 숙군 당시 박정희와 함께 처벌받았던 김학림(金鶴林)의 부인이 일본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최 사장 부인에게서 들었습니다.

 숙군 때 처형된 김학림의 아내 강아무개씨가 필자에게 보낸 답장편지 겉봉투
 숙군 때 처형된 김학림의 아내 강아무개씨가 필자에게 보낸 답장편지 겉봉투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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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은 숙군 때 유죄를 받은 '좌익전력' 때문에 두고두고 논란이 돼 왔습니다. 그래서 이와 관련한 얘기도 들어볼 겸해서 김학림의 아내 강아무개씨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지금 기억으로 질문 내용은 남편 김학림의 구속 전후 사정과 박정희 등 주변 인사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편지 속에는 그간 강씨의 개인사는 물론 놀라운 내용들이 상당히 많이 들어 있었는데, 주목할 만한 내용은 김학림과 박정희의 관계, 박정희 동거녀 이현란의 출산이었습니다.

첫 결혼 후 협의 이혼... 한국전쟁 중 육영수 만나 재혼

박정희는 대구사범 4학년 때인 1935년 여름 부친의 강권으로 억지 결혼을 했습니다. 당시 대구사범 교칙에 재학생은 결혼하지 못하도록 돼 있어 비밀결혼을 한 셈이죠. 상대는 선산군 도개면에 사는 김호남(金浩南, 1920~1990)으로 그보다 세 살 아래였습니다.

두 사람은 부부 사이가 그리 원만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입학 후 여름방학이 돼 귀국해서도 처자가 있는 고향집 대신에 교사 시절에 머물렀던 문경 하숙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돌아가곤 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1950년 11월 협의 이혼하였는데, 그 사이에 딸을 하나 두었습니다. 박재옥(朴在玉, 74)이 그 주인공인데, 박재옥의 남편 한병기(韓丙基, 80)씨는 3공 시절 민주공화당 국회의원과 UN대사 등을 지내며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맏딸인 박재옥씨와 남편 한병기씨가 박 전 대통령 사진 앞에 서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맏딸인 박재옥씨와 남편 한병기씨가 박 전 대통령 사진 앞에 서 있다.

박정희가 두 번째 부인인 육영수 여사를 만난 것은 한국전쟁 중이었습니다. 1950년 8월 하순 피난지 부산에서 송재천(宋在千) 소위의 소개로 맞선을 보았는데, 4개월 뒤인 그해 12월 대구 계산성당에서 허억 당시 대구시장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박정희-육영수 두 사람의 결혼식에는 일화가 몇 가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우선 육 여사 부친의 불참으로 박정희의 대구사범 스승이 대신 신부를 인도했습니다. 또 주례가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은…"이라며 신랑신부의 이름을 바꿔 불러 식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으며, 또 신부의 예물반지를 갖고 있던 송재천이 이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김재춘이 급히 나가서 새로 하나 사오기도 했습니다. 박-육 두 사람 사이에서는 근혜, 근영, 지만 등 2녀1남을 두었습니다.

 1950년 12월 12일 대구 계산성당에서 열린 박정희-육영수 결혼식
 1950년 12월 12일 대구 계산성당에서 열린 박정희-육영수 결혼식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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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시절 박정희-육영수 부부와 자녀들
 청와대 시절 박정희-육영수 부부와 자녀들

육영수와 결혼하기 전 여대생과 동거

한편 박정희는 육영수와 결혼하기 직전에 한 여대생과 동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원산 루시여고 출신으로 당시 이화여대 1학년이던 이현란(당시 24세)이 그 주인공인데, 이현란은 이국적인 외모에다 키도 크고 성격도 쾌활해 박정희 눈에 든 모양입니다.

이들 두 사람은 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약 3년가량 사실혼 관계에 있었는데요, 1947년 12월 경리장교였던 박경원(朴璟遠, 작고)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박정희는 육군 대위로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현란과 약혼한 후 곧 이현란을 용산 관사로 데리고 와서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여순사건에 연루돼 감옥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갔으며, 이후 이현란이 수차례의 가출과 방황을 해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됐습니다. 박정희와 동거녀 이현란에 대해 그간 알려진 내용은 이 정도가 대부분입니다.

 강아무개씨가 보낸 편지 본문(6장)
 강아무개씨가 보낸 편지 본문(6장)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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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림의 아내 강씨가 필자에게 보낸 편지는 본문 6장, 추신 1장 등 총 7장인데 본문 가운데 박정희와 그의 동거녀 이현란 관련 부분을 골라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망한 아이는 용산 관사 뒷산에 암매장"

어느 날 신성모 국방장관의 명령으로 3개월 만에 부산을 떠나서 저희는 태릉 육사(陸士)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살림집은 초가집 건넛방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생남(生男) 하였지만 군인 장교들이 초가집 건넛방에서 출퇴근 하였습니다. 순서대로 황택림(黃澤林) 고(故) 박정희도 초가집 건넛방에서 살았는데, 이대생(梨大生)이었던 이여사(李女史/이현란)가 매일은 아니지만 같이 살았었고, 그 다음에 박(朴)근서-숙청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그 다음의 군인 가족이 저희들이었고, 그 다음의 초가집도 장교였습니다.

이 동네에서 약 1년 쯤 지난 후에 명령으로 용산(龍山) 군인 관사로 이사했었는데 관사 입구 제일 가까운 데는 고(故) 강문봉(姜文奉)이 자리잡았었고, 고(故) 박정희, 황엽(黃燁) 장군, 저희들 세 식구는 깊숙이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었는데 이 때에도 이여사(李女史) 하고 고(故) 박정희는 아주 사이좋게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고(故) 남편과 고(故) 박정희는 태릉 초가집 동네에서 살 때부터 자주 만나는 것을 알았었는데, 고(故) 남편이 저한테 아무 얘기도 안하고 비밀로 한 것 같았었는데 나이도 어리고 아무 것도 몰랐었습니다. 그저 친구니까 친하게 지내는 걸로만 알았었습니다. 고(故) 남편이 이 관사에서 3일 동안 소식이 없이 집에 안 돌아왔었는데 이여사(李女史)가 저희 집에 와서 우리 남편도 소식이 없다고 하면서 걱정을 하였는데 나중에 체포된 사실을 알고 어찌 할 바를 몰랐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여사(李女史)가 출산(出産)하게 되어서 광화문(光化門) 산부인과에 가서 생남(生男)하여서 제가 며칠 같이 있다가 퇴원하여서 이여사(李女史)는 육아(育兒)에 전념하였으나 약 6개월 후 병명(病名)은 몰랐었지만 사망(死亡)했었습니다. 작명(作名)도 안했었습니다. 그 때 이여사(李女史)가 한 말이 너는 무슨 기구한 운명으로 애비 얼굴도 모르고 죽었느냐고 하면서 슬피 울었었습니다.

그 후에 소문인데 신당동에서 재혼(再婚)하여서 자식 낳고 잘 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또 소문은 이여사(李女史)의 남동생이 청와대 출입기자여서 이여사(李女史)의 소식을 고(故) 박정희에게 전하여 주고 서로 연락이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또 소문에 의하면 육여사(陸女史)하고 결혼하라고 중매를 했을 때도 이여사(李女史)의 미련(未練) 때문에 오랫동안(몇 年) 망설였다고 합니다. 이여사(李女史)는 미인(美人)이고 애교가 있고 매력이 있었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김학림 대위
 김학림 대위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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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관사에서 나와서 갈 곳이 없어서 태릉 육사 앞에 있는 육아원(育兒院)에 들어가서 보모(保姆) 노릇을 하다가 고(故) 남편이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서대문형무소로 아이를 안고 면회(面會)를 갔었습니다. 고(故) 남편을 만나자마자 목에 메이고 눈물이 쏟아져서 말도 못했습니다. 어떻게 사느냐고 물어 보길래 육아원에서 보모를 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그 때 저의 아이를 안아본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고(故) 남편이 하는 말이 나는 주모자(主謀者)가 아니기 때문에 재심(再審)이 있는 데 그 때 풀려나가니까 걱정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공주(公州)로 이감(移監)했다는 소식을 듣고 1950년 6월 25일이 일요일이었으므로 원장(院長)에게서 외출 승낙을 얻어서 면회를 가려고 했었는데 사변(事變)이 나서 못갔으니 서대문에서의 면회가 마지막이 된 것입니다. 고(故) 박정희에 대한 저의 원한은 영원합니다.

이어 덧붙인 '추신(追伸)' 가운데 박정희와 이현란 관련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여사(李女史)의 사망(死亡)한 아이는 황(黃)장군 부인(고 故 최 장군 부인하고 동창 同窓인데 지금은 고인故人입니다)하고 같이 용산(龍山) 관사의 뒷산에 저녁때에 가서 암매장을 하였습니다.(입관入棺하여서)"

 '추신'에는 이현란이 낳은 아이가 생후 6개월 만에 죽자 용산 관사 뒷산에 암매장했다는 증언(붉은 상자 내)이 실려 있다.
 '추신'에는 이현란이 낳은 아이가 생후 6개월 만에 죽자 용산 관사 뒷산에 암매장했다는 증언(붉은 상자 내)이 실려 있다.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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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편지내용과 관련해서 전후사정에 대한 설명을 보탤 필요를 느낍니다. 우선 강씨는 최주종 장군의 부인(이씨)과 만주 용정에서 같은 여고를 다녔으며, 백선엽(白善燁)의 권고로 1946년 12월 부산 중앙교회에서 김학림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강씨에 따르면, 남편과 백선엽은 '의형제'였으며 군인 관사에서 이웃해 살기도 했답니다. 부산 생활 3개월 만에 김학림이 육사로 발령이 나면서 이듬해 봄 태릉으로 이사하였구요.

한편 박정희도 춘천 8연대 근무를 마치고 대위로 승진해 1947년 9월 육사로 옮겼는데, 당시 박정희(대위)는 제1중대장, 김학림(대위)은 제2중대 2구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태릉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는데, 이 때 이미 박정희는 포섭됐던 것 같습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잠시 여순반란토벌사령부로 파견됐던 박정희는 육사로 복귀한 직후인 그해 11월 11일 김창룡이 지휘하는 방첩대에 체포됐습니다. 이후 남산 근방의 헌병사령부에서 며칠 취조를 당한 후 서대무형무소로 넘겨졌습니다.

한편 박정희는 체포되자마자 "이럴 때가 올 줄 알았다"며 자술서를 쫙 써내려갔는데, 평소 자신이 알고 있던 군부 내 남로당 조직원 명단을 전부 털어놓았습니다. 군 수사당국은 이 명단을 통해 육사는 물론 군부 내 좌익분자들을 대거 체포하였는데, 명단 제공 공로로 박정희는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도 목숨을 건졌습니다. 김창룡 팀으로부터 몇 차례 신문을 받은 후 박정희는 그해 연말에 석방됐습니다.

편지내용과 관련해 한가지 덧붙이자면 강씨의 편지 말미에 '고(故) 박정희에 대한 저의 원한은 영원합니다'라고 적었는데 왜 원한을 가졌는지 궁금하나 편지만으로는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습니다.

박정희가 구속되기 서너 달 전에 아이 출산

'장군' 박정희  좌익전력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능력과 주변의 도움으로 박정희는 장군으로 진급(1953.11.25)했다. 사진은 육군대학 졸업(1957.3.20)후 포천 주둔 6군단 부군단장 시절(준장)의 박정희. '장군' 박정희  좌익전력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능력과 주변의 도움으로 박정희는 장군으로 진급(1953.11.25)했다. 사진은 육군대학 졸업(1957.3.20)후 포천 주둔 6군단 부군단장 시절(준장)의 박정희.
▲ 장군 박정희 좌익전력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능력과 주변의 도움으로 박정희는 장군으로 진급(1953.11.25)했다. 사진은 육군대학 졸업(1957.3.20)후 포천 주둔 6군단 부군단장 시절(준장)의 박정희.
그렇다면 박정희는 동거녀 이현란의 임신 및 출산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아이가 죽자 이현란이 '너는 무슨 기구한 운명으로 애비 얼굴도 모르고 죽었느냐'고 했다는 강씨의 증언으로 볼 때 이현란이 출산한 시점은 1948년 11월 중순~12월말 사이로 보입니다. 바로 이 기간동안 박정희는 좌익혐의로 체포돼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사망한 시점이 생후 6개월이 지난 시점이라는 점은 의문입니다. 그렇다면 박정희가 구속되기 서너 달 전에 이현란이 출산을 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동거녀 이현란의 존재에 대해서는 박정희 생존 시절부터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위 편지의 내용처럼 이현란의 남동생이 청와대 출입기자를 지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현란의 출산설에 대해서는 그간 어떤 사람도 이런 주장을 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강씨의 증언이 구체적인 점 등으로 봐 믿을만한 사실로 추정됩니다. 출산한 병원명이나 사후 입관 여부 및 매장지 등을 자세히 언급한 점이 그것입니다. 혹 강씨가 아이의 정확한 사망 시점을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생후 6개월만에 죽었고, 또 이름도 짓지 않아 호적에도 당연히 오르지 않았겠지만, 동거녀 이현란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핏줄이라면 그리 단순히 생각할 사안은 아닙니다. 30대 초반 청년장교 시절 박정희는 이현란에게 빠져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그러던 둘 사이가 박정희가 좌익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면서 틈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이현란은 여러 차례 가출을 했고, 박정희는 그때마다 찾으러 다니곤 했습니다. 그 때 이현란이 낳은 '남아'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올해로 만 63세가 되는데, 만약 그랬다면 이후 박정희 집안의 가계는 현재와는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이현란 역으로 출연한 배우 김애경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이현란 역으로 출연한 배우 김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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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