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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이가 처음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때가 생각난다. 학교를 보내고 잘 적응할까 노심초사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일 년도 훌쩍 지났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나도 학부모의 위치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한 살 한 살 커가는 아이에게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할지 뚜렷한 소신을 갖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정도의 소신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소신이 슬그머니 사라진 걸 느꼈다. 표현이 좀 그렇지만, 나도 '그냥 그런 학부모'가 되어 있었다.

각 지역 초등학교마다 조금씩 다른데,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1학년 2학기부터 시험을 본다. 국어·수학·바른생활·슬기로운생활 이렇게 네 과목이나 본다. 거기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받아쓰기 시험을 본다. 그리고 수학 한 단원이 끝날 때마다 단원평가라는 시험을 본다. 시험의 홍수다.

나도 모르게 '그냥 그런 학부모'가 돼 있었다

아이도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이 끝나 2학기가 되었고 드디어 중간평가시험을 보게 되었다. 그때 난 동네에서 조그마한 옷가게를 하고 있었다. 사랑방이 되어버린 가게엔 아이 친구 엄마들이 지나가다가 종종 들러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시험 준비 잘하고 있어요?"
"준비는 뭘. 이제 좀 시켜야지요"
"A는 좀 시켰어요?"
"시키긴 뭘 시켜요. 애들이 시킨다고 하나요."

그런데, 다음날 다른 친구 엄마 이야기를 들으면 A는 문제집을 몇 권 풀렸고, B는 일주일간 학원도 안 보내고 시험 준비를 시킨다고 하고, C는 오후 11시 이전엔 잠도 못 잔다는 등 겉으로는 안 시키는 척했지만 알고 보니 다들 아이들 시험준비에 무척 열을 올리고 있었다.

평소 초등학교 때는 좀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던 터라,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던 나는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도 뭔가 아이를 위해(?)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제야 난 문제집을 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서점에 갔다. 시험이 닷새 정도 남았는데, 서점에 가니 문제집이 벌써 동났다.

서점 직원 말로는 근방의 모든 서점에 1학년 문제집이 한 권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를 애처롭게 쳐다보더니 "미리 사두셨어야지요, 시험이 며칠 안 남았잖아요""라며 "1학년 문제집은 많이 찍어 내지 않아 금방 품절돼요"라고 말했다. 

문제집을 사지 못하니 더 불안했다. 그런다고 구해질 문제집이 아니었다. 마침 친한 엄마가 있어 이야기했더니, 아직 풀지 않은 문제집을 일일이 복사해 주었다. 그렇게 아이의 첫 시험을 준비했다. 아이는 처음엔 재미있다고 풀더니 나중엔 풀기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난 애써 모른 체 하며 복사해 온 문제집을 시험 전날까지 다 풀게 했다.

시험공부로 문제집을 풀고 있는 아이
▲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 시험공부로 문제집을 풀고 있는 아이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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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렇게 아이는 초등학교에서의 첫 중간평가 시험을 치렀다. 며칠 후 결과가 나왔다. 네 과목에서 5개 틀렸다. 나는 진심으로 잘 보았다고 생각했고, 아이에게 "정말 잘했다"고 칭찬해줬다. 네 과목에서 5개면, 한 과목당 평균 1개 조금 넘게 틀린 것 아닌가. 그 정도면 잘했지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 다른 아이들의 시험 점수도 알게 되었다. 누구는 '올백'이고, 누구는 1개 틀리고, 누구는 2개 틀리고…. 알고 보니 내 아이 점수는 중간도 안 되는 점수였다. 나는 그날 정말 깜짝 놀랐다. 어떻게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이 이렇게 잘 할 수 있는지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몹쓸 마음이 생겨 버렸다. 나도 기말평가 시험에서는 아이에게 문제집을 좀 더 많이 풀게 하겠다는.

기말평가 시험이 다가오기 전, 나는 문제집부터 샀다. 서점 직원의 조언대로 이번엔 미리 샀다. 무려 문제집 3권을 챙겼다. 그리고 안 시키는 척하면서 문제집 3권을 다 풀게 했다. 기말평가 시험날이 되었고, 아이는 지난번 중간평가 때보다 '무려' 2개나 덜 틀렸다. 훌륭한 점수였다. 하지만, 몹쓸마음이 생겨버린 나에겐 훌륭한 점수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나의 공부 '닦달'... 딸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아이에게 "잘 했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부아가 치밀었다. 문제집을 3권이나 풀었는데 왜 3개씩이나 틀렸나 싶었다. 우습게도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나마 모두 백점을 맞은 아이가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속으로 부아가 난 것을 아이에게 철저히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아이는 욕심 많은 몹쓸 내 마음을 다 읽고 있었다. 아이는 나에게 "다음번엔 꼭 올백을 맞겠다"고 다짐했다. 난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엄마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 무척 미안했다.

그렇게 겨울방학을 맞이했고, 주변에서 사람들은 선행학습을 어떻게 하라고 조언도 해 주었다. 내 게으름 탓도 있지만 굳이 선행학습을 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즐겁게 놀게 놔두었다. 그래도 한 번씩 갈등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럴 때마다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즈음해서 난 옷가게를 정리했다. 옷가게를 할 때처럼 많은 사람 이야기를 자주 듣지 않게 된 것도, 나를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데 도움을 줬다.

며칠 전, 아이는 2학년 1학기 중간평가를 치렀다. 1학년 때처럼 과하게 열을 올리며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평소에 조금씩 아이의 공부를 봐주었다. 4과목 중 3과목이 100점이고, 1과목에서 2개 틀렸다. 난 진심으로 아이에게 "너무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번 시험은 좀 쉬워서 한 반에 올백이 서너 명이나 된다고 했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1~2개 틀린 아이도 아주 많을 것이다. 

2학년 중간평가시험 후 아이가 받아온 성적표
▲ 아이가 받아온 성적표 2학년 중간평가시험 후 아이가 받아온 성적표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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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때와 달리 그 사실을 알았어도, 나는 진심으로 내 딸이 너무 훌륭하고 자랑스럽다는 마음엔 변함이 없었다. 담뿍 칭찬을 받은 아이는 그날 일기를 썼다. 아이가 자는 사이에 슬쩍 펴보니 "2개나 틀렸는데도 엄마가 시험을 너무 잘 봤다고 칭찬을 해주셔서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고 쓰여 있었다. 내 기분도 날아갈 것 같은 밤이었다.

덧붙이는 글 | 소신을 지키는 건 참 힘든 일입니다. 더구나 어릴때부터 경쟁에 노출되어 있는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더 힘든 일이지요. 늘상 갈등속에서 아이를 키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언제쯤 그 갈등이 소신으로 자리매김 하게 될까요?



태그:#1학년, #시험, #중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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