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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입은 잉글, 1953년경 군산의료원에서.
▲ 잉글 한복입은 잉글, 1953년경 군산의료원에서.
ⓒ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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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잉글(Ingle Wright: 1923-1997)을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1년 전인 1990년 5월, 영국 런던의 한 컨퍼런스에서였다.

쉬는 시간에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60대 후반의 나이 지긋한 한 영국여성이 내게 다가와 한국말로 다정하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나는 반가우면서도 놀라왔다. 잉글은 내 이름표에 한국 국적이 적혀있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그 다음 그녀의 말이 더 놀라웠는데 "함석헌 아세요?"라고 묻는 것이다. 이국에서 만난 너무 반가운 질문에 우리는 시간 지나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잉글에 대해 이런 사연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동시대 영국여성들로서는 드물게 캠브리지대에서 공부한 병리학 박사였다. 2차 세계 대전 중과 전후에 그녀는 의학을 공부하여 50년대 초반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의학연구원으로 일하다가 1953년, 한국전쟁 직후 폐허가 된 한국에 갈 의료팀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그녀는 선뜻 지원했다.

"당시 나는 30세에 불과했는데 내 지도교수님은 내게 왜 연구를 더하지 전쟁 후 폐허밖에 안 남은 나라에 가서 세월을 낭비하려고 하나?라고 핀잔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잉글에게 물었다.

"왜 지도교수 말씀대로 연구를 더 안 하고 한국행을 지원했나요?"
"글쎄, 2차대전 중 공부만하고 사회를 위해 한 것이 거의 없어서 항상 뭔가 부채의식이 있었지요. 그래서 그런 광고를 보자 두 생각하지 않고 얼른 지원한 것이지요."

그 길로 잉글은 1953년부터 1955년까지 2년 동안 당시 군산도립의원(현 원광대병원)에서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 버려진 이 땅의 과부와 고아들을 위해 지도교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의료봉사를 했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아주 열악했다. 한번은 잉글이 자다가 베개 속에서 하도 냄새가 나서 자세히 베개 속을 들여다보니 죽은 쥐가 들어있더란다. 또 당시 영국에서와는 달리 샤워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온수도 없었지만 그녀는 보람과 부채의식으로 열심히 기쁘게 일했다고 한다.

함석헌을 만난 한 영국여성

군산의료원 근무중인 잉글 1955년경
▲ 잉글 군산의료원 근무중인 잉글 1955년경
ⓒ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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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잉글은 30세였는데 50대 초반의 한국 기독교 사상가 함석헌(1901-1989)을 만나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전쟁 후 척박한 폐허 위에서 만난 함석헌의 단아한 모습이 마치 "동양의 신비스러운 현자(sage)"와 같았다고 표현했다.

함석헌도 훗날 그가 처음 만난 영국과 미국의 퀘이커들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6·25 직후 우리나라 복구사업을 하는데 퀘이커교에서 영·미 합작으로 수십 명의 사람을 보내왔었지요. 그들이 군산에서 파괴된 도립병원 복구공사를 했는데 거기에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참가해서 처음으로 퀘이커를 알게 되었어요. 나는 그들의 신앙에 참 감동했어요. 그들 때문에 나는 퀘이커리즘에 흥미를 느끼게 됐어요."

함석헌도 당시 잉글 박사와 그 동료들을 만났던 것 같다. 다만 그녀의 이름을 기억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영국에 살면서 알게 된 것인데 잉글처럼 1920년대에 태어난 영국여성들 중엔 결혼을 아예 못한 여성들이 많았다. 많은 영국 남성들이 2차세계대전 중에 전사했기 때문에 1945년 전후 남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잉글도 그 때문이었는지 50세가 다 된 1973년 선배 동료의사와 만혼했고 당시 신혼여행을 한국으로 왔다. 그러나 만혼 때문인지 그녀는 평생 자식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그 짧은 대화 중에도 나를 아주 다정하게 마치 친자식 대하듯 대해 주었다. 휴식시간이 끝나갈 즈음에 우리는 서로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990년 8월, 나는 영국 중부도시 맨체스터에 있는 잉글의 집을 찾았다. 9월에 영국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약 3주 동안을 나는 그녀 집에 머물렀다. 내가 잉글  집에 도착 했을 때 큰 정원에서 그녀의 남편 존 로렌스 박사는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존은 자기는 퀘이커교도가 아니라 태양신을 숭배한다고 말했다. 그 말은 햇볕이 귀한 영국에서 그가 일광욕을 교회 가는 것보다 좋아한다는 말이었다.

잉글의 집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 때인 19세기 말 붉은 벽돌로 지은 큰 3층집 저택이었다. 잘 다듬은 푸른 정원은 아주 커서 테니스도 칠 수 있을 정도였다. 거실은 아주 컸지만 무척 어두웠고 여러 가지 책, 서류, 잡동사니가 여기저기 혼돈스럽게 널려 있었다. 이 어둡고 혼란한 거실에 들어가며 나는 <창세기> 1장이 떠올랐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잉글은 영국인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상당히 다혈질이었고 그래서 본의 아니게 남편 존과 다른 친구 분들에게도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 세대로서는 드문 '커리어 우먼'으로서 상당히 통이 크고 선이 굵은 분이었다. 1923년 생 여성으로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남편을 포함한 다른 남성들과 의료분야에서 어깨를 겨루는 세월을 오랫동안 살아오셔서 그런지 독립심과 지적욕구도 상당히 강하셨다. 

영국 '어머니'를 만나다

잉글과 나 맨체스타 퀘이커모임집에서 1993년
▲ 잉글과 나 잉글과 나 맨체스타 퀘이커모임집에서 1993년
ⓒ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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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과 약 3주를 머무르는 동안 나는 거의 매일과 매주말 그녀와 여러 종류의 세미나와 컨퍼런스에 참여하고 많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가졌다. 잉글은 나를 위해 모든 컨퍼런스와 세미나 참가비, 숙박비, 교재비 등을 전부 지불해 주었다. 그러고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성수에게 이런 세미나는 아주 가치 있고 소중한 경험이 될 거에요. 훗날 공부 끝나고 한국에 돌아가면 성수가 다른 한국 사람들을 위해 이런 세미나를 기획하고 개최하세요."

나는 점차 잉글이 나를 마치 자기 아들처럼 아끼고 돌봐준다는 것을 느꼈다. 아마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는 자기 자식이 없어서 나를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그 사랑을 내게 주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타국에서 타향살이를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느꼈고 잉글의 집이 마치 나의 친부모님 집처럼 편안하게 여겨졌다.

나는 방학이나 명절 때마다 잉글의 집을 방문했고 그 후 잉글은 내게 어머니와 같은 사랑과 애정뿐 아니라 장학금 추천 등 재정적으로도 내 유학생활을 적극 지원해 주셨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영국에 유학 온 이래 잉글의 열렬한 도움과 지원 덕에 결국 박사 학위까지 받게 된다.

잉글의 이웃집 친구가 북아일랜드의 신구교 간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북아일랜드로 떠나는 날, 나는 그녀와 함께 떠나는 친구 집에 갔다. 잉글이 선물을 갖고 작별인사를 하러 안에 들어간 동안 나는 차에서 한동안을 기다렸다. 몇 분 후 잉글은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차로 돌아왔다. 그러나 갑자기 뜨거운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난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곧 잉글이 인간에 대해 상당한 애정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이분이 상당히 외로운 분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던 중 1996년 5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5년 전, 잉글보다 15살 연상의 남편 존이 88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존은 에든버러 의과대학을 나온 스코틀랜드 분으로 류머티즘에 의학적 공헌을 남겼다. 존의 사후에 맨체스터 대학교 의학대학 도서관은 존의 이름을 따서 '존 스튜어트 로렌스 라이브러리'로 그 명패를 짓기도 했을 정도였고 일간신문에 존의 생애에 대한 기사도 나왔다.

나는 아들처럼 존의 관을 어깨에 메고 장례를 치렀다. 존의 죽음 후에 잉글은 점점 더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얼굴도 전보다 더 어두워져 갔다. 그래서 나도 한 달에 한번 잉글을 방문하던 것을 격주에 한번씩 방문하기 시작했다.

남몰래 흘리던 눈물

존의 죽음 후에 나는 더 자주 잉글의 눈물을 볼 기회가 있었다. 어떤 날 잉글은 동네에 혼자 사는 메이라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혼자서 독백으로 하며 "우리 불쌍한 메이, 우리 불쌍한…" 하고 말을 잊지 못했다. 얼마 후에 알았는데 잉글은 주변의 어려운 노인들이나 생활이 곤란한 사람들에게 수시로 경제적 지원을 해주었다.

때때로 나는 잉글이 남몰래 혼자 우는 것을 본 적도 있다. 그녀는 자신이 여러 사람들을 도와줌에도 불구하고 가끔 자신의 통제되지 않은 다혈질적 성격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상처받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모두가 나를 미워해, 모두가 나를 미워해!" 하고 그녀가 독백을 하며 눈물을 펑펑 쏟는 것을 나는 종종 보았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밤 잉글이 내 하숙집에 전화했다. 내일 토요일은 내가 잉글 집에 가는 날이다. 잉글은 "성수,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일찍 자야겠어요. 내일 우리 집 오기 전 내 대신 친구 집에 가서 책 좀 가져다주세요" 그래서 나는 다음 날인 토요일 친구 집에서 책을 찾은 후 잉글 집으로 갔다.

그런데 도착하자 잉글 집 문 앞에 사람들이 서성거렸다. 나를 보더니 한 이웃여성이 내 손을 잡고 막 운다. 나에게 전화를 하고 곧 잠들은 잉글은 수면 중 급성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단다. 나는 뜻밖의 충격에 할 말을 잃었다. 어젯밤에 전화로 듣던 목소리가 잉글의 마지막 목소리가 될 줄이야! 그때가 1997년 3월 8일이었다.

"모두가 당신을 미워하진 않아요!"

잉글이 갑자기 돌아가신 때가 내 유학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때 같다. 잉글이 돌아가시고 나자 나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그동안 7년간 영국에서 타향살이를 해도 '어머니' 같은 잉글이 있어서 나는 비교적 안정된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잉글은 나를 우연히 만난 1990년부터 갑자기 돌아가신 1997년까지 7년간 온 정성과 사랑으로 나를 마치 친어머니처럼 아끼고 도와주었다.

상당히 지성적인 분이었기 때문에 내가 쓴 박사 논문 초안 (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도 많은 유용한 비평을 해주셨다. 잉글이 없었다면 나는 중도에 학위를 포기하고 한국에 돌아왔을 것이다. 그녀의 물심양면의 애정 어린 지원이 없었다면 나의 영국 유학생활은 '실패담'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1980년대 중반 함석헌 선생님 때문에 한국 퀘이커모임에 나가게 되었고 1996년 잉글 때문에 영국 퀘이커모임 회원이 되었다. 내가 영국 퀘이커회 회원이 되었을 때 잉글은 마치 내가 올림픽 선수라도 되서 무슨 금상을 받은 것처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나는 영국 퀘이커회에서 '젊은 피'에 속했다. 잉글과 내가 다니던 한 퀘이커 모임은 연로한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그 모임을 폐쇄하느냐 마느냐 논의 하던 중 어떤 이가 잉글에게 물었다. "잉글, 당신이 나가는 모임에 70세 이하의 퀘이커 교도가 있나요?" 잉글은 큰 소리로 당당하게 외쳤다. "물론이지요, 성수가 70세 이하요!"

잉글이 갑자기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잉글, 모두가 당신을 미워하진 않아요!" 그러나 나는 결국 잉글이 생존해 계셨을 때는 전혀 이 말을 못했다. 나는 지금도 이 말을 잉글에게 못하고 그녀를 저 세상에 보내게 된 것을 깊이 후회한다.

잉글은 1950년대는 한국전쟁 후 폐허 속에 있던 군산도립의료원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며 한국을 도왔고 1990년대는 무작정 유학 온 한 한국의 젊은이를 친자식처럼 도왔다. 나는 지금도 잉글이 한국과 한국인을 돕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잉글이 1953년부터 1955년까지 한국군산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떠날 당시 <군산일보> 1955년 5월 24일자는 이렇게 보도했다.

"여러 업적 뒤로하고 영국인 여성의사 잉글 라이트 박사 출국

영국인 여성의사 잉글 라이트 박사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다. 잉글 박사는 31세의 미혼으로 영국 퀘이커 봉사단에 의해 군산도립의료원으로 2년 전에 왔다. 잉글 박사는 한국 간호원들을 교육하는 등 군산도립의료원을 향상시키기 위해 그동안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잉글 박사는 내과, 외과, 산부인과를 망라하며 오래된 군산의료원의 시설물들을 새것으로 교체했고 의료원 도서관에 새로운 외국의학 서적을 들여오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잉글 박사가 2년 동안의 의료봉사를 마치고 이제 6월 초에 한국을 떠난다는 소식은 한국인들을 아주 슬프게 한다."

잉글의 인도주의적인 활동은 그녀는 몰랐지만 1950년대 당시 함석헌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그래서 함석헌은 결국 퀘이커 교도가 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잉글의 애정 어린 물심양면의 지원이 없었다면 나는 <함석헌평전>을 집필하지 못했을 것이다. 잉글은 한국에 퀘이커리즘의 씨앗을 뿌렸고 1953년부터 1955년까지 2만 여명의 한국전쟁 피난민들을 도와주었다.

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중의 하나로 소말리아나 에티오피아보다도 못살고 들쥐와 병균이 득실거리는 혼돈하고 어둠에 뒤덮인 나라였다. 나는 창세기 1장이 다시 떠오른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가족, 아이들 중간이름을 '잉글'로 지었다
▲ 가족 가족, 아이들 중간이름을 '잉글'로 지었다
ⓒ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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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잉글이 죽고 난 2개월 후,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1997년 5월, 한 영국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 후 8개월 후인 1998년 1월 우리는 영국에서 결혼했다. 아내와 나 사이엔 1남 1녀가 있고 우리는 아이들의 중간이름을 '잉글'로 지었다. 

잉글, 한국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에 감사합니다.


태그:#어머니, #잉글, #퀘이커, #김성수, #함석헌, #어버이날, 군산도립의원, 원광대병원, 6.25 , 씨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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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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