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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회용 생리대.
 일회용 생리대.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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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에는 늘 어떤 고정된 영상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동네 아줌마들을 모아 놓고 온갖 얘기꽃을 피우고 있는 엄마와, 햇빛 한 점 들지 않았던 우물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커다란 빨래 함지박에 손을 담그고 오전 시간을 보내곤 했던 언니. 언니의 아침나절은 일 년 내내 빨래 함지박이 놓인 우물가였다. 정오 무렵에 빨래가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만큼 아홉 식구의 빨래는 늘 언니의 아침나절을 빼앗아 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아이고 그놈의 지지바가 글시, 아 어찌나 칠칠치가 못헌지 그 자것을 그냥 훌러덩 훌러덩 암치께나 빼 던져 놓는 통에 내가 성이 가셔서 못살겄당게요. 성님."

콘크리트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물물을 같이 쓰고 있던 현정 엄마의 목소리였다. 그 시절 내 눈에 비친 현정이는 대책이 안 설 정도로 천방지축인 아이였다. 그런 현정이는 내 또래였거나 어쩌면 나보다 두어 살 쯤 더 나이가 들어 있었다고 기억한다.

"잉 그려? 근디 우리 큰딸은 아직도 그노매 서답이 없어야."  

엄마의 목소리였다.

"아이고 성님도 참, 성님 큰딸이 올해 몇 살인디 그것이 없어라우? 스물한살이지 아매?"
"긍게 말여, 그런디 참말로 그렇당게."

은근 자랑스럽기까지 한 엄마의 목소리엔 웃음기마저 배어 있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며 언니는 말없이 우물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빨래를 했다.

언니가 5년간 꼭꼭 생리를 숨겨야 했던 이유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유OOOO라고 하는 회사에서 생리대를 홍보하기 위해 학교로 직원들이 가끔 왔었다. 아마 가정 과목 수업 시간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가정 선생님의 배려였을까 싶기도 한데 아무튼 그 시절엔 그런 일도 있었다. 그들은 생리에 대한 이런저런 것들을 자세히 설명해주기도 하고 강의가 끝나고 돌아갈 때는 생리대 샘플을 두어 개씩 거저 나눠 주기도 했었다.

돌아보면 미래의 고객들인 어린 소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한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생리가 없었던 나는 샘플로 얻어 온 생리대를 언니에게 가져다 주곤 했다. 그러고 있는 중인데도 엄마는 우리 딸은 아직도 서답이 없다고 은근히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현정이 엄마한테 자랑 아닌 자랑을 하고 있었다.

늘 언니와 방을 같이 쓰며 잠을 잤던 나는 낮에 들린 엄마와 동네 아줌마 얘기가 하도 이상해서 저녁 잠자리에 누운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도 낮에 엄마가 한 말 들었지?"
"딸이 생리 시작한 지가 언제적인데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게 뭔 자랑이라고."

발치께에 있던 이불을 당겨 내 어깨에 덮어 주며 언니는 나를 당겨 안았다. 그 시절의 언니는 늘 나를 자신의 팔 안에 안고 잠을 잤었다. 잠결에 가끔씩 어떤 소리에 잠을 깨곤 했는데 언니는 나를 안은 채 울고 있는 날이 많았다.

"그날이 하필 음력으로 12월 17일 할머니 제삿날이었어야. 날은 춥고, 하루 종일 제사 준비로 허리가 끊어질 지경이었는데, 밤에 자다가 요강에 오줌을 누었는데 그만, 핏방울 하나가 떨어진 모양이더라. 그게 내 첫 생리였던 셈이지." 

그때가 언니 나이 열여섯 살이었다고 했다. 이튿날, 새벽에 일어난 언니가 새 속옷으로 갈아입고 아침밥을 하느라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불을 때고 있는데 느닷없이 나타난 엄마가 언니의 어깨를 잡아채며 방으로 끌고 들어와 요강에 있는 게 뭐냐고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숨소리까지 급해진 엄마의 눈에 퍼렇게 불이 켜져 있는 듯 보였다고 했다. 얼마나 사납고 무섭게 종주먹을 대는지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자신도 모르게 아니라고, 모르는 일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됐단다. 언니의 거짓 해명을 듣고 나서야 엄마는 그때까지 사납게 쥐고 있던 언니의 어깨를 풀어 주며 겨우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고 했다.

한두 번 들은 얘기도 아니건만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가슴이 아파 말이 안 나왔다. 아무렴, 아빠도 아닌 엄마가 딸의 여자로서의 첫 시작을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까지 부정하고 싶어 했는지. 엄마의 딸로 살았던 스물 여섯해 동안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엄마의 모습 때문에 참 많은 가슴앓이를 했었다.

어쩌다 딸아이에게 이모의 첫 생리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생리를 시작했다고 생일날처럼 케이크에 촛불까지 켜고 축하를 받은 요즘 아이인지라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알아듣지를 못했다. 딸아이의 이해할 수 없어 하는 모습에 힘을 얻은 내가 어느 날 엄마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엄마, 그때 언니한테 왜 그랬어?"
"내가 언제? 야야 난 모른다."

정말로 아무 기억도 없다는 듯한 엄마의 얼굴을 보고난 뒤론 더 이상 아무것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을 겪은 후로 5년여 동안을 언니는 엄마에게 달거리를 감추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고 했다. 그렇게도 많은 빨래를 날마다 해 대면서도 그 달거리포만은 언제나 숨어서 빨아야 했단다. 내 기억으론 재래식 부엌 연탄 아궁이 위에 가로로 길게 줄을 하나 쳐 놓은 게 있었는데 언니는 가끔 그곳에 행주를 삶아서 널어놓곤 했었다. 그 행주들 밑에는 언니의 그것도 같이 숨어서 말라가고 있었다.

"엄마 왜 그래?"... "갱년기인가봐"

난 언니 덕분에 첫 행사를 치르면서도 별다른 어려움을 몰랐다. 그렇지만 여자들에게만 지워진 그 무겁고 버거운 일이 끔찍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기다리지 않아도 거르는 법 없던 불청객이 50이 될 무렵부터는 서너 달에 한 번 삐죽 얼굴을 내밀다가, 또 훌쩍 집을 나가 버리기를 몇 번씩 되풀이 하더니 지난 가을부터는 말끔하게 아무런 소식이 없다. 행여 민망한 일이라도 생기게 될까봐 늘 가방에 두어 개의 패드를 넣고 다니다가 이젠 그만 폐기해 버려야 되는 건 아닌가 그러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기다리는 소식이 없는 대신 다른 낯선 증상들이 시작됐는데 느닷없이 등에 후끈 열이 오르다가 스르르 그만 두기를 하루에도 예닐곱 번씩을 하는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영 좋지가 않다. 그러다 보니 좀 우울해져서 잘 웃지를 않는 내가 심상치 않았는지 저녁 식탁 앞에 앉아서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던 딸아이가 "엄마 왜 그래?" 묻는데 "갱년기 증상인가 봐"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퇴근을 하고 있는데 학교로 저를 데리러 올 수 없냐는 전화를 받았다. "뭐 딸년이 오라는데 모시러 가야지" 농담을 하면서 학교 앞에 차를 댔는데 이 녀석이 학교 옆 한약방 앞에 차를 대라고 성화를 댄다. 얼결에 차를 세워놓고 억지로 끌려들어가 폐경인 것 같다는 선고를 받고, 딸년 등쌀에 덜컥 38만 원씩이나 되는 약을 지어들고 돌아왔는데 기분이 참 묘하다. 언제나 성가시다는 생각이나 했지 그다지 반가운 친구가 아니었던 달거리가 오랜 세월 함께했던 동기간과 헤어지고 돌아왔을 때처럼 영 쓸쓸하다.

저녁을 챙겨 주고 마음이 심란해서 방으로 들어와 서울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는 그때 어땠어?"
"폐경? 난 자궁 근종이라 통째로 수술해 들어내면서 폐경이고 뭐고 없이 그냥 끝났잖아."
"아아, 참 그랬지." 
"난 시작도 그랬지만 끝도 좋지가 않았어. 그놈의 자궁에 혹이 생겨서는 피를 보름 동안 한말씩이나 쏟고 기어이 자궁까지 들어내 버리고 보니깐 그냥 뭔지 모르게 지긋지긋하더라, 여자라는 게."

그랬겠지. 정말 언니에게 여자라는 성으로 산다는 건 그랬을 것이다.

"난 사람들 속에 섞여서 폐경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 없이 지나와 버렸는데 넌 사람도 그다지 안 좋아하는데 어쩌냐."
"그러게, 어쩌다 이러고 살아버렸는지 모르겠네." 
"그래도 니가 하는 일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그치?"
"그런데 형부랑은 어때?"
"각방 쓴 지가 하두 오래라 완전 남남이지 뭐." 

"한 집에 살아도 안지 않으면 남남, 부부란 그런 건가봐"

여자와 남자는 왜 딴 방을 쓰면 남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더 있다. 광주에 내려와 일 년 쯤이나 되었을까? 그 당시엔 단독주택 2층집에 살았는데 그 앞집에 사는 애 엄마랑 꽤 친하게 지냈었다. 그 여자 이름이 경자였는데 나는 누구 엄마, 그렇게 부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질 않아서 이름을 곧잘 불렀다.

그 경자씨가 어느 날 그랬었다. 자궁에 뭔 고장이 붙었는지 20일 동안 내리 생리처럼 하혈을 했는데 참 사람이란 족속이 그렇게 간사할 수가 없더란다. 자기는 원인모를 하혈을 하느라 죽을 지경인데 이놈의 남편이란 작자는 안을 수 없는 마누라가 남처럼 느껴진다고 하소연을 하더란다. 그 말을 듣고 그냥 가만히 있었냐고 열을 올리는 내게 경자씨의 한마디가 더 서글펐다.

"야야, 나도 남편이 남처럼 서먹서먹하더라. 부부란 그런 건가봐. 한 집에 살아도 안지 않으면 서먹해져 버리는. 그래서 부부는 돌아누우면 남이라는 옛말이 있는 것 같더라고.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사실인 걸 어떡허냐. 웃기지? 응?"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아무리, 그럴 리가, 그러고 넘어갔었는데 이즈음 내가 경자씨 생각을 참 많이 하고 있다. 평소에도 그다지 부부 사이가 좋았던 것도 아니면서 이제 폐경이라는 것까지 맞이하고 보니 모든 게 다 귀찮기만 하다. 이제 남편과 부부이기보다는 친구로 지내야 할 세월만 남아있는 것 같은데 앞으로 길게는 20년도 더 넘는 시간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지 좀 막막하다.

"뭣이고 니 앞에 다 당해야."

엄마는 늘 사람살이를 그렇게 간단한 한 마디로 겁을 주곤 하셨다. 정말 누구에게나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게 이 삶에는 있는 것 같다. 그나저나 저 놈의 한약을 한 달 이상 먹게 생겼는데 커피도 드시지 마세요. 술도 마시지 마세요, 하던 한의사 말이 생각나 맘이 심란하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한숨 돌리며 찾던 것들인데.


태그:#달거리포, #폐경, #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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