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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룡산과 화왕산을 찾게 된 사연은

 

지난달 말 산악회 카페에 4월 정기산행 공지가 올라왔다. 제목이 '진달래 만발한 화왕산으로...'였다. 날짜는 4월 17일 일요일이었다. 그동안 일에 쫓겨 산행을 거의 못했는데 이번만은 꼭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봄꽃의 계절 4월을 놓치면 진정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놓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관룡산에는 정말 괜찮은 절 관룡사가 있다. 절을 보러 한두 번 간 적은 있지만, 이번에는 관룡산, 화왕산 꽃 산행을 제대로 하고 싶다.

 

'관룡사'하면 사람들은 용선대 석불을 떠올린다. 용선대 석불은 관룡사 서쪽 바위 위에 앉아있는 부처님으로 공식명칭은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이다. 관룡산 지맥이 내려오다 멈춘 바위 위에 자리 잡고 앉아 옥천리 계곡을 내려다 보고 있다. 말없이 우리에게 극락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는 듯하다. 사실 극락이 따로 없다, 용선대가 바로 극락이다. 관룡산은 왼쪽으로 웅장한 바위산이 이어져 좌청룡이 강한 편이다. 관룡산의 지맥은 정상부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다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화왕산으로 이어진다.

 

이번에는 관룡사뿐만 아니라 이 절을 감싸고 있는 관룡산과 화왕산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거기다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진달래까지 볼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일야봉 산장 주변에는 개나리를 심어 개나리와 진달래가 뒤섞인 묘한 풍경도 볼 수 있었다. 산행 기점인 옥천리와 산행 종점인 말흘리 주변에서는 아직 벚꽃도 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진달래, 개나리, 벚꽃을 함께 즐기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옥천사지를 지나며

 

올해는 지난 겨울의 추위 때문인지 계절 변화가 상당히 느린 편이다. 개나리와 진달래, 목련이 4월 초에 피기 시작했고, 중부지방의 벚꽃은 이제야 피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남쪽으로부터 올라오는 소식에 따르면, 관룡산과 화왕산에도 이제야 진달래가 피었다고 한다. 올해는 진달래 개화가 늦을 뿐만 아니라 꽃의 푸짐함도 덜한 편이라고 한다. 식물 전문가인 이순욱 산악회장은 "지난 해에 비해 꽃대가 한 마디 덜 올라왔다"고 했다.

 

아침 일찍 버스에 오르니 함께 산행할 회원들로 가득하다. 사람이 많아 24인승 중형버스를 한 대 더 빌렸다고 한다. 함께 하는 회원은 60명이다. 차는 선산휴게소에서 한 번 쉬고, 바로 옥천리 관룡사 아래 주차장에 닿는다. 이곳에서부터 산행이 시작된다. 간단하게 몸을 풀고 각자 짐을 챙겨 관룡사로 향한다. 관룡사까지는 30분쯤 걸린다. 길은 버스와 승용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잘 나 있다. 차를 가지고 가는 사람도 간간이 보인다.

 

10분쯤 갔을까? 옥천사지(玉泉寺址)가 나타난다. 안내판에는 흥미로운 사실이 적혀 있다. 옥천사지에서 고려말의 승려 신돈(辛旽: ?-1371)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신돈) 어미가 계성현(桂城縣:昌寧) 옥천사 노비였다"는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노비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승려가 되어 편조(遍照)라는 법명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주류에 끼지를 못하고 늘 산방에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신돈이 창녕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가 어떤 경로를 거쳐 당시 개경의 주류세력과 연결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는 1358년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궁중에 드나들기 시작했으며 1364년 왕의 사부가 되어 국정에 참여했다. 그는 청한(淸閑)거사라는 법호를 받았을 뿐 아니라 진평후(眞平侯)라는 봉작을 받고 개혁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그는 권문세족과 갈등을 일으키고 그들의 벽을 넘지 못해 1371년 결국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 결과 모든 기록에는 신돈이 요승(정도를 어지럽히는 요사스러운 중)으로 나와 있다. 그렇지만 사실은 공민왕이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개혁을 하던 중 그 선봉에 신돈을 세웠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려 왕조가 몰락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신돈이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말세에는 항상 개혁이나 혁명이 일어나지만 그 성공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하다. 그 결과 개혁자는 죽거나 불명예 퇴진하는 경향이 있다.

 

관룡사 입구에서 만난 돌장승

 

옥천사지에서 다시 10여 분을 가니 관룡사 입구에 닿는다. 한 무리의 신도들이 버스에서 내린다. 나는 그들과 함께 차로가 아닌 오솔길로 관룡사로 향한다. 조금 올라가니 오솔길 양쪽으로 한 쌍의 돌장승이 서 있다. 오랜만에 보는 돌장승이다. 벅수라고도 하는데 절의 경계를 표시하고 잡귀의 출입을 막는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절에 들어오는 잡귀를 쫓아내는 일은 사천왕이 맡고 있지만, 민간신앙에서는 장승이 담당한다. 그러고 보니 관룡사에는 천왕문이 없다.

 

관룡사를 향해 왼쪽에 있는 장승이 남장승이고 오른쪽에 있는 것이 여장승이다. 남장승은 높이가 220㎝로, 상투를 얹은 듯한 둥근 머리에 관모를 쓰고 있다. 툭 튀어 나온 커다란 눈, 콧구멍이 뚫려있는 주먹코가 남방식이다. 여장승은 높이가 250㎝로, 사다리꼴 모양의 받침돌 위에 구멍을 파서 세웠다. 상투 모양이 조각되어 있지만 남장승과는 달리 관모가 없다. 두 장승이 상당히 다른 모습이지만 어울리는 한 쌍이다.

 

 
 
 
 
 
 
 
 
 
 
 
 
 
 
 
 
 
함께 오르던 신도들이 두 손을 공손히 잡고 장승 앞에 예를 표한다. 참 보기가 좋다. 이들을 인도하는 여승이 장승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한다. 장승을 지나자 범종루가 눈에 들어온다. 2층 누각으로 2층에 범종과 법고가 모셔져 있다. 중국의 절에는 종루와 고루가 따로 있는데 국내 사찰에는 대부분 이들이 합쳐져 있다. 관룡사 안으로 들어가려면 축대를 돌아 동쪽으로 간 다음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계단 한 가운데 쪽문이 있어 이곳을 지나가도록 되어 있다.

 

쪽문을 들어가면 몇 개의 비석이 서 있는데, 그 중 환몽화상(幻夢和尙) 유공비가 눈에 띈다. 비문을 보니 대웅전, 약사전, 요사채 등을 지은 스님이다. 그렇다면 대웅전과 약사전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겠다. 비석군을 지나 관룡사 정문 앞에 서니 화왕산관룡사(火旺山觀龍寺)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화왕은 '불꽃이 타올라 빛난다'는 뜻이다. 이름으로 봐서는 이 산의 화기가 대단할 것 같다.

 

그렇다면 이 화기를 누르기 위해 관룡사가 세워진 걸까? 전설에 따르면 원효가 제자 송파와 함께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다가 연못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용을 보았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관룡사'라 하고, 산 이름을 구룡산(741m)이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는 용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관룡사, 구룡산, 천룡암, 관룡산, 용선대. 이번 산행은 관룡사 동쪽 능선을 따라 구룡산에 오른 다음, 암릉을 타고 관룡산까지 계속될 것이다. 천룡암과 용선대는 가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약사전

 

절 안으로 들어가니 왼쪽으로 범종루가 보인다. 그런데 법고가 참 특이하다. 사자 위에 올려놓은 형상이다. 사자의 표정이 아주 해학적이다. 나는 종루를 지나 약사전(보물 제146호)으로 간다. 약사전 안에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19호)이 모셔져 있고, 밖에는 3층석탑(경남 유형문화재 제11호)이 세워져 있다. 먼저 3층석탑을 본다. 2층 기단에 3층으로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 양식이나, 조각수법이나 미적 감각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기 작품으로 여겨진다.

 

약사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아담하기 이를 데 없다. 조선 전기 건축으로 도갑사 해탈문, 송광사 국사전과 같은 양식이라고 한다. 양쪽 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전각 안에는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원래라면 약사여래가 있어야 한다. 석조여래가 나중에 이곳에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용선대에 있는 석조여래좌상과 비슷한 기법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실내에 있어서 그런지 마모가 훨씬 덜해 나발과 육계, 옷주름 등이 더 선명하다.

 

약사전에서 눈을 동북쪽으로 돌리면 관룡사 최고의 전경을 볼 수 있다. 원음각과 대웅전 사이 마당 너머로 구룡산 줄기를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당 가장자리로 진달래가 피어 있고, 자목련도 아직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대웅전 앞에는 동백꽃도 보인다. 5월 10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연등도 걸리기 시작했다. 회원들도 여기저기 절집을 둘러보느라 바쁘다. 

 

대웅전

 

이제 원음각 앞을 지나 대웅전으로 간다. 원음각에는 화엄경의 문구가 주련으로 걸려 있다. 내용을 보니 '불지광대동허공(佛智廣大同虛空), 보변일체중생심(普徧一切衆生心), 일념실지삼세법(一念悉知三世法), 역료일체중생근(亦了一切衆生根)'이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부처님에 대한 일종의 찬가다.

 

부처님의 지혜가 허공처럼 크고 넓어서

모든 중생의 마음에 두루 하시고

한 생각에 삼세의 법을 다 아시고

일체 중생의 고뇌도 모두 통달하셨네.

 

원음각 맞은 편에는 대웅전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관룡사의 중심전각인 대웅전은 보물 제2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태종 때 처음 지어졌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중창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웅장한 멋이 있다. 전각 안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있다. 눈이 가는 것은 이들 부처님보다 그 앞에 있는 제대 장식이다. 나무로 만들어 조각을 새긴 다음 색칠을 했는데 예술성이 대단하다.

 

 

해오라비가 연지에서 물고기와 놀고, 고양이가 매화나무 꽃 사이에서 뛰논다. 천녀가 피리를 불며 하늘나라로 올라가고, 새들이 모란꽃 사이에서 춤춘다. 연꽃 사이에서는 게와 물고기가 놀고 있고, 연잎에서는 개구리와 매미가 여유를 즐기고 있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제대 앞에서는 스님이 염불을 드리고 중생들은 이에 맞춰 소원을 빌면서 절을 올린다. 부처님 오신 날이 가까워서인지 절에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이제 우리는 절을 나와 본격적인 산행길로 접어든다.

 

 


태그:#화왕산, #관룡산, #관룡사, #약사전과 대웅전, #돌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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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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