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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연곡사를 찾아서

깊은 계곡
▲ 지리산 피아골 깊은 계곡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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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를 나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지리산 피아골의 연곡사였다. 처음에는 노고단을 오르는 길에 천은사를 우선 들를까도 생각했지만, 예전에 이미 가 본 적도 있는데다 쌍계사 벚꽃십리길에 얼마나 많은 상춘객이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구례에서 하동으로 내려가는 길에 위치한 연곡사에 들르기로 했다.

지리산을 방문할 때마다 꼭 한 번 가리라 마음먹고도 항상 가 보지 못했던 연곡사. 그것은 나의 게으름 탓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연곡사가 다름 아닌 피아골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피아골의 빨치산 루트를 따라 지리산을 타보겠다는 욕심 때문에 연곡사를 채 가 보지 못한 곳으로 남겨 놓았던 것이다.

피아골.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저려 오는 곳. 비록 그 이름은 계곡에 피밭이 많아 피밭골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지만, 근현대 역사를 거치면서 피아골은 다른 해석을 갖게 된다. 멀게는 임진왜란서부터 가까이는 구한말 의병전쟁과 한국전쟁 빨치산까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 피아골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기에 또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산기슭의 마을들
▲ 피아골의 마을 산기슭의 마을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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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단풍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하여 지리산8경 중 하나라는 피아골 단풍. 그 역사를 알게 된다면 그 선홍빛 단풍 색깔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넋들의 붉은 피를 연상시키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섬진강을 따라 만개한 벚꽃들을 보다가 연곡사 안내판에 좌회전을 한 뒤 물줄기를 따라 깊은 계곡으로 한량없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곳은 지리산 토지면. 섬진강변에서 보면 금방이라도 깎아지는 경사가 시작될 줄만 알았건만 계곡은 매우 깊었다. 끊길 듯 끊길 듯 길을 따라 한 굽이를 지나면 또 다른 마을이 있었고 그때마다 풍경은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좁고 깊은 피아골을 직접 들어가 보니 왜 이곳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피아골은 여느 계곡보다 밖에서부터 들어오기는 어렵지만 의외로 계곡을 따라 많은 이들을 품을 수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의병이나 빨치산 모두 이곳에다 비교적 큰 아지트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고, 또 그만큼 많은 죽음들을 지켜봐야 할 수밖에.

아스라한 꽃터널을 지나면 보인다
▲ 연곡사 대웅전 아스라한 꽃터널을 지나면 보인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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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연곡사의 봄

얼마나 올라갔을까. 도로의 끝에 국립공원 경계에 선 마지막 마을이 보였고 연곡사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개인적으로는 참 오랫동안 기다려 오게 된 피아골 연곡사.

모든 관광객들은 쌍계사 벚꽃십리길을 찾아갔는지 주변은 조용했고 오로지 산새 소리만이 우리의 귀를 간질이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일주문은 공사 중이었는데, 다행히 오늘은 공사를 쉬는지 산사의 고요함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즈넉한 산사
▲ 매화와 전각 고즈넉한 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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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피기 시작한 봄꽃
▲ 산사의 봄 이제 피기 시작한 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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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게 필 봄꽃
▲ 지금쯤 아름다울 그곳 흐드러지게 필 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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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는 다른 사찰들과 달리 일주문을 지나니 곧바로 대웅전이 보였는데, 금강문이나 천왕문이 세워져 있어야 할 그곳에는 대신 매화꽃과  산수유 그리고 벚꽃이 자리하여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4월 초, 피어나는 벚꽃과 점점 지고 있는 매화와 산수유가 어울려 만들어내는 그 묘한 조화로움. 혹자들은 절정에 선 매화꽃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한 풀 꺾인 매화와 만개하기 시작한 벚꽃의 앙상블도 꽤 볼 만한 봄의 풍경이었다. 

아침에 워낙 큰 규모의 화엄사를 보았기 때문일까, 연곡사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전각도 얼마 없었고 으레 큰 사찰에 딸린 암자도 보이지 않았으며, 오직 국보급 부도들만이 큰 사찰의 명색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깊은 피아골 계곡의 사찰인데 왜 이 정도 규모밖에 되지 않을까.

4월의 연곡사
▲ 연곡사의 매화 4월의 연곡사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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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은 연곡사에 대한 안내판을 보면서 쉽게 풀어졌다. 545년(신라 진평왕 6)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된 연곡사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이르기까지 선도량(禪道場)으로 유명했던 곳이었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복원되었고, 1910년 고광순의 의병이 이곳에서 왜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다시 불타버렸고, 그 뒤 곧 중건했으나 한국전쟁 때 다시 폐사되었다고 한다.

이후 1965년과 1981에년 대웅전이 지어져 오늘에 이르지만 연곡사의 사세가 예전만 같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다. 전통과 유적을 돈으로 환산하는 이 시대, 모든 것이 불타 아무것도 남겨진 바 없는 연곡사가 대중들의 관심을 받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피아골의 고찰이라는 명분만 존재할 뿐.

결국 연곡사의 흥망성쇠는 우리 역사의 굴곡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곳 사람들은 연곡사의 부침을 보며 시대를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쇠락한 연곡사가 안쓰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대신 지금의 연곡사는 찾아오는 이들에게 안식을 선사하고 있지 않은가. 크고 웅장한 대신 조용하고 고즈넉한 산사. 그곳은 따뜻한 봄볕을 쬐며 명상하기에 최상의 공간이었다. 예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더라면 절대 상상할 수 없었을 평화로움을 작은 연곡사는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죽을 때까지 우상을 부정했던 부처가 진정 바랐던 모습일지도 모른다.

피안의 봄
▲ 봄볕을 즐기는 모자 피안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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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꽃잎을 즈리밟고 있는 까꿍이
▲ 아이의 피안 떨어진 꽃잎을 즈리밟고 있는 까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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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섬진강변의 번잡한 차량이 없어서 좋은지 땅에 흩뿌려져 있는 꽃잎들을 지르밟으며 나름 따뜻한 봄볕을 즐기는 듯 했고, 화엄사에서는 그 엄청난 규모에 마냥 감탄하기 바빴던 아내도 연곡사에서는 연신 움직이기 싫다는 투정 아닌 투정과 함께 산사의 평화로움을 만끽했다. 지금 당장 연곡사는 우리 가족에게 피안 그 자체였다.

따뜻한 봄볕을 얼마나 쬐었던가. 계속 연곡사에 머무를 수는 없는 법. 피안을 나와 다시금 홍세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따뜻한 봄볕으로 노곤해진 몸을 가누지 못해, 차마 구경할 수 없었던 국보급 부도들이 나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지만 훗날을 기약했다. 어차피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불변의 진리인 이상, 내가 지금 부도를 보면 '아~이게 국보구나' 수준 밖에 되지 않겠는가. 다음에는 꼭 부도를 공부한 뒤 피아골 빨치산 루트를 통해 지리산 종주를 해 보리라.

조화로움
▲ 매화, 산수유, 벚꽃 조화로움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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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세의 번잡함에 심난한 분들에게 연곡사의 고요함을 권한다. 거기 아랫마을 섬진강변은 너무 번잡하지 않은가.


태그:#연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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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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