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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특별하다. 가족끼리는 서로 허물을 감싸주고 웬만한 잘못은 눈감아준다. 법도 이런 사정을 감안하여 특별하게 대우해준다. 하지만 가족끼리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선을 넘었다가는 죄가 될 수도 있다. 대법원 판결 중에서 가족 사이에 일어난 아주 중요한 사건 2가지를 소개한다.

아들이 아버지 지갑을 훔쳤다면 어떻게 될까. 범죄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처벌은 되지 않는다. 이른바 형법의 '친족상도례' 때문이다(자세한 사항은 상자글 참조). 우리 정서와 상식에도 맞지 않다. 직계혈족, 동거가족 간 재산범죄는 형을 면제한다. 그럼 이런 경우는 어떨까.

할아버지 통장에 손을 댄 손자, 법정에 서다

[사례 1] 전백수(가명)씨는 직장도 없이 가족들의 도움으로 살고 있었다. 돈이 필요했지만 가족들에게 자꾸 손 벌리기가 미안했던 그는 우연히 안방에서 할아버지 전만원(가명)씨의 예금통장을 보게 되었다. 할아버지에게 미안했지만 돈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는 통장을 들고 나와서 A은행 현금자동지급기로 향했다. 통장을 집어넣고 50만원을 자기 명의로 된 B은행 계좌로 이체하였다. 돈이 없어진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된 만원씨는 노발대발하여 은행에서 따지다가 조사 끝에 손자가 통장에 손댄 사실을 알고 멋쩍어졌다. 만원씨는 손자 백수씨가 범인으로 밝혀진 만큼 그냥 넘어가길 원했으나 사건은 결국 법정에까지 오게 됐다.

현금자동지급기
 현금자동지급기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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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 법원은 친족상도례를 적용, 백수씨의 형을 면제했다. 백수씨의 절도 행위가 죄는 될 수 있겠지만 피해자가 할아버지인 만큼 '직계가족 사이의 절도는 처벌불가'라는 것이 판결의 요지였다. 1심에 이어 2심도 같은 결론으로 사건은 종결되나 싶었다.

그런데 검사가 상고하여 대법원까지 가게 됐다. 대법원은 단순절도가 아니라 중간에 은행이 개입된 사건인 만큼 피해자가 누구인지 다시 한 번 따져보자고 했다.

형법 347조의 2(컴퓨터등 사용사기)
컴퓨터등 정보처리장치에 허위의 정보 또는 부정한 명령을 입력하거나 권한 없이 정보를 입력·변경하여 정보처리를 하게 함으로써 재산상의 이득을 취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취득하게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 2심은 만원씨를 피해자로 보았지만 대법원의 생각은 달랐다. 대법원은 백수씨가 권한없이 현금자동지급기를 통해 자기계좌로 이체했더라도 만원씨는 손해본 게 없다고 판단했다.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갔더라도 은행 예금 반환채권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피해자가 A은행이 된다는 말이다. 이어지는 대법원의 설명.

"A은행은 만원씨에 대한 예금반환 채무를 여전히 부담하면서도 B은행에 이체자금(50만원) 결제채무를 추가 부담함으로써 채무를 이중으로 지급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피해자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이중채무 부담하게 된 은행"

만일 백수씨가 할아버지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갔다면 문제가 안 된다. 그런데 백수씨는 할아버지의 예금계좌에서 자기 계좌(B은행 계좌)로 돈을 옮겨갔다. 따라서 A은행은 B은행에 일단 돈을 지급해야 한다. 게다가 만원씨 통장에서 만원씨 뜻과는 무관하게 돈이 잘못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므로 A은행은 다시 만원씨에게 돈을 돌려줘야 한다.

여기서 의문 한가지. 손자가 몰래 사고친 50만 원에 대해 예금주인 만원씨가 손해를 감수하겠다고 나서거나 만원씨의 통장관리 소홀을 문제 삼아서 A은행이 채무를 면하게 되면 만원씨의 피해로 볼 수 있지 않나. 하지만 대법원은 "피해가 최종적으로 할아버지에게 적용될 수 있다고 하여 컴퓨터등 사용사기죄의 피해자가 달라질 수는 없다"며 친족상도례를 적용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컴퓨터등 사용사기죄로 볼 때 이 사건의 피해자는 B은행과 만원씨에게 이중으로 지급해야 하는 A은행이므로 친족 사이의 범행이 아니다. 따라서 백수씨는 유죄다. 이것이 대법원의 결론이었다.

할아버지의 통장을 훔친 건 처벌할 수 없겠지만 그 통장으로 계좌이체를 하였다면 절도죄가 아니라 컴퓨터등 사용절도죄로 처벌받는다는 사실. 잘 납득이 안 가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2007년 대법원 판결이다. 2년 전에는 어머니의 현금카드를 훔쳐서 계좌이체한 아들이 같은 이유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형 대신 '음주 뺑소니' 허위 자수한 착한 동생

[사례 2] 차사고(가명)씨는 운전 때문에 별(?)을 여러 개 달았다. 음주운전과 뺑소니는 기본이었고 면허정지 또는 취소 상태에서 사고를 낸 적도 부지기수였다. 사고씨는 기어이 또 한번 일을 저질렀다. 무면허 운전을 하다가 화물차를 들이받아서 적발된 것이다. 엄청난 처벌은 불보듯 훤했다. 고민끝에 친동생 차대신(가명)씨에게 간곡하게 부탁을 한다.

"대신아, 형이 감옥가게 생겼다. 너도 알다시피 형이 과거가 화려하잖니. 너는 면허증도 있고 전과도 없잖아. 너는 나처럼 감옥에 갈 일은 없을 테니 나 대신 네가 교통사고 냈다고 자수하면 안 되겠니? 형 좀 살려다오."

마음 착한 대신씨는 형의 간곡한 부탁을 안 들어줄 수 없었다. 대신씨는 경찰에 출석하여 자기가 교통사고의 범인이라고 거짓진술을 하였다. 하지만 경찰조사 과정에서 진범이 사고씨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다.

음주단속 현장
 음주단속 현장
ⓒ 윤봉렬(서울중부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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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는 어떻게 되었을까. 법 적용이 조금 복잡하다. 형법은 범인을 숨겨주거나 도망가게 해준 사람을 범인은닉(도피)죄로 처벌한다. 범인이 있는데도 자기가 대신 처벌받기 위해 자기가 범인이라고 허위 진술한 것도 범인 은닉에 해당한다.

그런데 친족 또는 동거의 가족이 본인(범죄자)을 위하여 범인은닉죄를 저질렀을 땐 가족 간의 특수성을 인정하여 처벌하지 않는다. 따라서 동생 대신씨는 처벌할 수가 없게 된다.

다음은 사고씨다. 사고씨는 자기 처벌을 면하기 위해 동생에게 자백을 하도록 시켰다. 제3자에게 범죄를 시켰다면 시킨 사람은 교사죄(다른 사람에게 범죄를 결의하게 하여 실행하도록 하는 것을 교사라고 한다)로 처벌받는 게 당연하다.

문제는 교통사고 범인과 허위자백을 한 사람이 형제 사이라는 점이다. 2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법으로 처벌을 받지 않는 동생에게 시킨 일이기 때문에 죄가 아니다. 둘째 범인이 자기 죄를 숨기려고 허위자백을 시킨 건 명백한 범죄이고, 형제 사이라도 마찬가지다.

"형이 동생에게 허위 자백시킨 것은 방어권 남용"

1, 2심을 맡은 대전지법은 첫째 해석을 따랐다. 범인이 제3자를 끌여들였다면 몰라도, 스스로 도피하거나 형제를 이용한 행위까지 처벌하기엔 무리라는 판단이었다. 대전지법은 사고씨에게 무면허운전은 유죄를, 범인도피교사는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심각한 의문을 던져준다. 만일 누군가 죄를 저질렀다고 치자. 그 사람은 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가족들은 경찰에 자기가 범죄자라고 거짓으로 자백한다. 그래도 죄가 되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 대신, 형이 동생 대신 죄를 뒤집어쓰겠노라고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정상적인 범죄 수사는 불가능해보인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대법원은 판단을 뒤집었다. 둘째 해석이 타당하다고 본 것이다.

"범인이 '타인'에게 허위자백을 하도록 시켜 범인도피죄를 범하게 하는 행위는 방어권 남용이다. '타인'이 친족, 동거가족에 해당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사고씨는 결국 범인도피교사죄까지 처벌을 받게 되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자수하기보다 일단 도망가려고 한다. 당연한 반응이다. 가족 중에 범인이 있으면 일단 숨겨주려는 행위 역시 당연하다. 법에서도 이런 행동까지 처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족이나 친족을 내세워 허위자백을 하는 방식으로 진실을 가리려는 사람까지 용납할 수는 없다는 게 판결의 교훈이다.

가족간의 특별한 법률관계
가족간의 특별한 법률 관계

1. 친족상도례
-친족 간 재산분쟁은 되도록 알아서 해결하라

아내 지갑에서 몰래 돈을 빼가는 남편을 절도죄로 처벌할 수 있나.
사업한다고 아버지에게 돈을 받아놓고 유흥비로 탕진한 아들을 사기죄로 처벌할 수 있나. 

처벌할 수 없다. 이유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친족이기 때문이다. 친족 간의 재산 범죄는 당사자끼리 해결하고 되도록 법이 개입하지 않는 게 좋다. 이것을 형법에서는 '친족상도례'라고 한다. 형법에서는 친족 간 재산 범죄(강도, 손괴는 제외)는 형을 면제하거나 고소가 있어야 기소할 수 있는 특례가 인정된다.

형을 면제하는 대상은 직계혈족, 배우자, 동거친족, 동거가족 또는 그 배우자이고 그 외의 친족은 고소가 있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다. 친족상도례는 절도죄를 비롯, 권리행사방해죄, 사기, 공갈, 횡령, 배임, 장물죄에 적용된다.

쉽게 설명하자면 부모, 자식, 부부 사이에는 돈을 훔치거나 사기를 쳐도 문제가 되지 않고, 그밖에 8촌 정도까지는 처벌해달라는 고소가 있을 때 비로소 법이 개입한다는 말이다.

2.친족 간 범인은닉죄의 특례
- 친족끼리는 숨겨주어도 괜찮다

범죄자를 숨겨주면 처벌받는다. 범인 은닉, 도피죄다. 도피자금을 주거나 은신처를 제공하는 행위가 대표적이다.

형법 151조
①벌금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자를 은닉 또는 도피하게 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하지만 친족 간에도 처벌한다면 너무 가혹하다. 그래서 이런 조항도 있다.

②친족 또는 동거의 가족이 본인을 위하여 전항의 죄를 범한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

친족 간에 숨겨주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수배중인 아들을 아버지가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법의 심판을 받게 한다면 너무 가혹하다. 이 조항 역시 법률상 친족 또는 동거 가족만 해당하므로 친한 친구나 애인 사이, 사실혼 관계는 해당하지 않는다.

단 예외가 있다. 국가보안법에 따르면 반국가단체 구성 가입, 목적수행, 자진지원 등의 죄를 범한 걸 알면서도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았다가는 불고지죄가 된다. 다만 친족관계에서는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한다.

3. 직계존속 고소 금지
-부모는 자식을 고소해도 자식은 부모를 고소 못한다

부모는 자식을 고소할 수 있다. 법적으로 제한이 없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법이 막고 있다. 

형사소송법 224조(고소의 제한)
자기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을 고소하지 못한다

이 조문에 따르면 부모나 (외)조부모, 장인, 장모를 고소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불효라고 생각해서일까. 법에도 전통질서가 자리잡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부모가 자식을 고소하거나 형제 간 고소, 부부 간 고소는 제한없이 가능하다.

한편 세상이 바뀐 만큼 부모도 죄를 지었다면 고소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지만 2011년 헌법재판소는 위헌이 아니라는 결정을 내렸다. 다만 성폭력범죄에 대해서는 특별법에 따라 자기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을 고소할 수 있다.


태그:#친족상도례,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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