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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덮인 경포대해수욕장.
 눈 덮인 경포대해수욕장.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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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그 '경포대'가 그 '경포대'인 줄 몰랐다. 3월 22일 강원도에 때 아니게 폭설주의보가 내려진 날 강릉에 갔다가, 난 분분하게 내리는 눈 때문에 어디 멀리 가보지도 못하고 '경포호' 주변을 맴돌았다. 그 덕에 경포대가 내가 아는 경포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눈은 점심 무렵에 그쳤다. 그 사이 쌓인 눈이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다.

갑자기 내린 눈 때문에 경포대해수욕장(경포해변)에는 오가는 차 몇 대 보이지 않고, 관광객들은 더욱 더 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눈발을 헤치고 나타난 관광객 몇 명이 눈 덮인 해변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백사장이 말 그대로 진짜 새하얀 백사장이 되어서 보기 드문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3월에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게 다 강원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경포호 한가운데, 새바위 위에 올라앉은 월파정의 그림 같은 풍경. 멀리 오른쪽으로 보이는 누각이 '경포대'다.
 경포호 한가운데, 새바위 위에 올라앉은 월파정의 그림 같은 풍경. 멀리 오른쪽으로 보이는 누각이 '경포대'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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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히 해변을 떠나, 경포호 주변의 눈 덮인 풍광에 이끌려 경포대가 있는 곳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경포호 자전거도로 위를 달려가는 길에, 도로 너머 높게 솟은 언덕 위에 멋들어지게 올라앉은 누각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저건 뭐지?' 생각하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도로 위로 유적 표시가 그려진 '경포대' 표지판이 보였다. 화살표가 바닷가쪽이 아닌 언덕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경포대해수욕장을 그냥 '경포대'로만 알고 있었던 나는, 그 표지판을 보고 나서 내가 알고 있는 경포대가 경포대해수욕장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왜 진작 경포대가 경포호 주변에 있는 누각이나 정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의아했다.

 경포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경포대.
 경포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경포대.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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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에 정자만 12개, 옛날에는 얼마나 더 많았을까?

경포대는 경포호 서쪽 호숫가에 위치해 있는 누각이다. 경포대는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관동팔경에 경포대를 비롯해 삼척의 죽서루 등 6개의 누각과 정자가 포함이 되어 있다. 그 정자들 모두가 그 장소에 어울리는 멋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경포대가 가장 돋보이는 정자라고 할 수 있다.

경포대에 올라서면 발 아래로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경포호를 감상하는 데 이보다 더 적합해 보이는 장소도 없다. 경포대는 호수와 어우러지는 풍경뿐만 아니라, 형식면에서도 여느 정자와는 상당히 많이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누각 내부에 호수를 마주하고 양쪽으로 마루를 낸 것도 독특하다.

 경포대에서 내려다 본 경포호. 호수 끝으로 일자로 펼쳐진 소나무숲이 보이는데 그 너머가 경포대해수욕장이다.
 경포대에서 내려다 본 경포호. 호수 끝으로 일자로 펼쳐진 소나무숲이 보이는데 그 너머가 경포대해수욕장이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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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각의 반쪽을 나무판으로 돌려막은 것도 다른 정자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다. 그렇지만 누각의 한쪽 면을 판자로 막은 것은 우리 고유의 형식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우리나라 정자는 사방에 바람이 통하도록 트여 있는데, 뒷면을 판자로 막은 것과 그 안쪽에 용상 단을 만든 것은 '전형적인 일본식 건축수법'이라는 것이다. 복원이 잘못 됐다는 얘기다.

경포대는 '1326년(충숙왕 13)에 안무사 박숙정이 현 방해정 북쪽'에 세웠으나, '1508년(중종 3)에 부사 한급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방해정 역시 경포호 호숫가에 지어진 정자다. 하지만 방해정은 경포대와 달리 수면에서 그리 높지 않은 평지에 세워졌다. 방해정을 보고 나면, 경포대를 현재의 위치로 옮긴 이유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방해정.
 방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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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에 가서 경포대를 보았다면, 이번에는 경포호 주변의 또 다른 정자들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역시 눈 내리는 이 봄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지만, 경포호 주변에는 유달리 정자가 많다. 정자가 어찌나 많은지, 예전엔 그야말로 한 집 건너 한 집이 정자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경포호 주변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정자만 대략 12개다. 활래정, 해운정, 금란정, 방해정, 호해정, 천하정, 상영정, 창랑정, 경호정, 석란정, 취영정, 월파정 등이 그 이름들이다. 이 중에는 해운정 같이 호수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쉽게 찾아보기 힘든 정자도 있다. 호숫가에 이렇듯 정자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것도 보기 드문 풍경이다.

 금란정
 금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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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자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정자 하나하나 다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고, 정자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또한 다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정말 다채롭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풍경도 어쩌면 일부분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에는 호수 주변으로 더 많은 정자가 있었을 것이다. 호수 밑바닥에 토사가 쌓이기 전에는 호수 둘레가 지금보다 3배는 더 길었다고 한다. 그러니 예전엔 얼마나 더 많은 정자가 있었을지, 얼마나 더 다채로운 풍경을 보여주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상영정 툇마루에 걸터앉아 호수를 내려다보면서, 정자가 지어질 당시의 풍경을 떠올려 본다. 하지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정자 아래로 도로가 지나가고 눈앞으로 여러 가닥의 전선이 가로 놓여 있어 경포호를 온전히 감상하는 일이 쉽지 않다. 결국 옛날이야기를 통해서 과거의 경포호를 회상해 보는 수밖에 없다. 경포호는 '수면이 거울 같이 맑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경포호 너머 멀리 눈덮인 설악산이 올려다 보인다.
 경포호 너머 멀리 눈덮인 설악산이 올려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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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에도 달이 뜬다

옛날의 경포호는 꽤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던 모양이다. '신선이 노니는 곳'이라도 했고,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오는 곳'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경포호는 특히 달과 떨어트려 이야기할 수 없는 호수다. 그 정취가 얼마나 감상적이었던지 선조들은 경포호가 내려다보이는 정자 위에서 다섯 개의 달을 보았다.

그 달들이 '하늘'과 '바다'와 '호수'에 뜬 달, 그리고 '술잔'과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에 뜬 달이다. '호수에 달빛이 비치면, 그 모양이 꼭 탑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 달빛을 월탑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쯤 되면 경포대에서 바라다보는 달빛이 어떤 것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경포대는 달맞이를 하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정자들이 모두 호숫가를 돌아가는 아스팔트 도로 뒤로 한 발짝 물러서 있는 게 좀 의아할 수도 있다. 그건 세월이 지나면서 호수 둘레가 서서히 줄어든 탓이다. 예전엔 12km에 달했던 호수 둘레가 지금은 4km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정자를 지을 당시만 해도 정자를 올려 세운 주춧돌 아래로 호수 물이 찰랑거렸을 것이다.

 경포호를 한 바퀴 도는 자전거도로와 산책로.
 경포호를 한 바퀴 도는 자전거도로와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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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경포호 주변을 두 바퀴 돈다. 한 바퀴는 정자가 자리를 잡고 있는 주변 도로를 따라서, 한 바퀴는 호숫가 자전거도로를 따라서. 정자를 감상하는데, 한 번은 코앞에 두고서, 또 한 번은 먼발치서 바라다본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당히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 정자들을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뜰에서부터 하늘로 살짝 휘어져 올라간 처마 끝까지 모두 낡고 퇴락한 분위기를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빛이 바랜 낡은 정자일수록 오래 묵은 장처럼 깊게 삭은 맛이 배어나오기 마련인지라 낡고 퇴락한 모습조차 정겹게 느껴진다. 마침 아침나절 펑펑 퍼붓던 눈이 막 그친 뒤라, 정자 지붕을 덮은 하얀 눈이 더욱 눈부시다.

타고난 시인이었으나, 규방 속 한많은 삶을 살다 간 허난설헌

 허난설헌 생가. 연기가 피워오르는 굴뚝.
 허난설헌 생가. 연기가 피워오르는 굴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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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호를 돌고 나서 '허난설헌 생가'로 발길을 돌린다. 사방이 탁 트여 있는 정자가 활동이 자유로운 남자들을 위한 공간이라면, 허난설헌 생가는 조선시대 한평생 '규방' 속에 갇혀 살아야 했던 여자들의 갇힌 세계를 떠올린다. 두 공간이 담장 너머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모르긴 해도, 규방 속 여자들이 느껴야 했을 갈증이 경포호만큼이나 깊고 넓었을 것이다.

허난설헌 생가는 호수 동쪽 다리 건너 울창한 솔밭에 터를 잡고 있다. 솔밭 사이로 난 좁은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면, 그리 크지 않은 기와집이 한 채 나온다. 이 집이 허난설헌이 태어나 7세가 될 때까지 살던 곳이다.

허난설헌은 초당 허엽의 딸로, 아버지와 형제들이 모두 문장으로 이름이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8세에 시를 짓는 등 천재적인 시재를 타고 났다고 전한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그의 동생이다. 허난설헌은 그 시대 남자로 태어났다면 허균 못잖은 문장가가 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남성 중심 사회인 조선시대에 여자로 태어난 죄, 시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현실도피적인 삶을 살다 간다.

 허난설헌 초상화
 허난설헌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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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에 여성의 이름으로 시를 짓는다는 건 일종의 사회적 일탈이었다. 그는 결국 1589년(선조22년) 27세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다. 조선에서는 별다른 빛을 보지 못했던 시들이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명나라에서 <난설헌집>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돼 격찬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시에서는 젊은 나이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한 조선 여인의 애상이 진하게 묻어난다.

허난설헌의 비극적인 생애 때문인지 그의 생가를 찾을 때마다 쓸쓸한 상념에 젖곤 했다. 그런데 이날 그의 생가를 찾았을 때는 또 다른 느낌을 받는다. 누군가 어두운 부엌에 들어앉아 아궁이에 벌겋게 불을 지피고 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동안 허난설헌 생가를 사실상 버려진 집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누군가 또 다른 삶을 이어가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의 집 뒤뜰에서 굴뚝 위로 울컥울컥 연기가 새어나오는 광경을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그 굴뚝이 무언가 가슴 속에 맺힌 것을 하늘 위로 격하게 쏟아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어쩐 일인지 이날, 방 안에 모셔진 허난설헌의 초상화가 유난히 따듯해 보인다 싶었다.

 허난설헌 생가 뒷뜰에 핀 살구나무꽃.
 허난설헌 생가 뒷뜰에 핀 살구나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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