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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대표 시인, 허만하 시인
 우리시대의 대표 시인, 허만하 시인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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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골목길 뛰어노는 꼬맹이들의 옷빛깔에서도 완연한 봄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골목길을 향한 봉창을 열면 봄향기 물씬하고 골목 담장에도 활짝 핀 목련, 벚꽃, 개나리에 완연한 봄을 느낀다. 그러나 사방이 콘크리트 숲에 갇혀 있더라도 시인의 봄의 서정이 물씬 풍기는 시 한 편 속에서도 물씬 봄을 느낄 수 있겠다. 먼지 쌓인 서재에 꽂혀 있는 많은 시집 중에서 허만하 시인의 봄시 한 편 반갑게 찾았다.

이 산비탈과 저 골짝 사이 산벚꽃 피는 시간이 한 열흘쯤
차가 나지요. 열흘이란 시간의 팽팽한 긴장을 보지 못하고
지나는 차의 속도.


연둣빛 부드러운 일렁임 가운데 외롭게 더러는 무더기로
서서 두 팔을 쳐들고 왼 몸으로 지르는 산벚나무 고함소리
가 보인다. 운문사(雲門寺) 가는 길. 몸을 틀며 지르는 해맑
은 고함소리.


풀리는 물소리 이켠과 저켠. 꽃기운이 건너는 데 걸리는
열흘. 그 열흘의 산자락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편다. 사물의
윤곽이 환한 햇살이 되어 부서지는 4월, 하늘은 흩날리는
꽃잎으로 가득하다. 눈부신 설레임.


- 허만하 시 <복사꽃 한그루-고호의 눈 5> 일부

시인이란 정말 보들레르의 말처럼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사이의 은밀한 소통의 회로를 찾아내는 존재'란 말이 맞는 것같다. 시를 통해 저 너머'에 있는 불가시의 세계와의 교감(correspondances)을 끝없이 시도하여 지상에 존재하는 '천상의 봄'을 찾아내려고 24시간 감각의 안테나를 세우고 있는 자는 아닐까 싶다.

나는 보고 있는 나를 나는 보고 있지만, 나의 시선 끝에는 내가 한 번도 본적 없는 풍경의 빛과 그늘이 있다. 나의 숲에서는 새가 지저귀지 않고 계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고독한 나무들이 철새처럼 무리지어 조용히 강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의 시선은 호수 수면에 비치는 물 그늘의 떨림이 아니라, 빛과 그늘의 경계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비치는 눈동자의 심연이다. - 허만하 시 <눈동자의 거울(현대시학. 2010. 7월호)> 일부

"위의 시는 허시인의 <눈동자의 거울>의 3연이다. 이 시를 읽으면 '유리의 두께 위에 묻어 있는 쓸쓸한 기억'같은 풍경이 떠오른다. 그 풍경은 오랫동안 암각화로 남았다가 점차 풍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1978년 이른 여름 전봉건, 이영걸 시인이 부산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때 허만하, 김규태, 이수익 시인 등이 어울려, 수평선과 땅의 틈새에 있는 오영수의 <갯마을>의 무대인 일광의 송림에서 술 마시고 사진 찍고 돌밭에 나가 마음을 풀던 기억을 돌아본다.
사진의 왼쪽부터 허만하, 차한수, 김석규,이수익 ,전봉건, 김규태 시인 외
 사진의 왼쪽부터 허만하, 차한수, 김석규,이수익 ,전봉건, 김규태 시인 외
ⓒ 차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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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 속의 허 시인의 내부에서, 또는 그 눈에서 '구름의 모습'과 '오렌지 빛 그늘'을 본 기억이 새삼스럽다. 허 시인의 그런 시선이 '빛과 오늘의 경계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비치는 눈동자의 심연'이었다는 것을 돌아보면서,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말을 연상해 본다. <허만하에 대한 기억>중 - (차한수)"

기자는 근일(近日) 위의 글을 모(某) 잡지에서 읽었다. 그리고 문득 허 만하 선생님께 안부겸 할 얘기가 있어 전화를 걸었다. 이편에서 "건강하세요 ?" 하고 묻자, 저편의 대답은 "나는 건강합니다"고 대답이 왔다.

전화 끊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간 너무 적조했다. 아니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간 것이다. 오랜만에 통화에 허 만하 시인의 특유의 목소리(영혼)의 빛깔에서, 늘 염려했던 건강에 대한 걱정이 사뭇 엷어지고 있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을 더듬어보면, 허만하 시인과의 인연은 부산의 대표 시 전문지 <시와 사상>의 편집장 역할에서 비롯된다.

96년 7월 어느날 <시안의 시, 시 밖의 시>란 제목 하에 배광훈 시인과 허만하 시인의 대담이 있었다. 이 대담이 게재된 먼지 폴폴 날리는 책을 펼치니, 고(故) 정영태 의사 시인의 얼굴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당시 허만하 시인은 부산 송도 해수욕장 부근 고신대학교에 근무하였고, 고 정영태 의사 시인의 병원은 다대포였다. 두 분이 만나면 꼭 정영태 시인이 애써 기자를 불러 허 시인과 식사와 차도 많이 나누었던 것 같다.

그리고 부산에 한국 시단의 거목이라고 할 수 있는 김종길 시인이 부산나들이 오면 허만하 시인과 더러 귀한 시간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갑게도 허 시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몸이 불편하다.

사실 허 시인은 1990년 4월 어느 날 갑작스럽게 뇌졸중으로 입원하게 되어, 부산시인협회가 제정한 제1회 부산시협상의 수상자로 선정되고도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이다.
허 시인은 당시 참석하지 못한 심경을 아래 같이 말한 바 있다.

"그 무렵 많은 시인들이 찾아와 위로 격려해 준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후 삶의 새로운 의미를 깨닫고 있습니다. (...) 아직도 강직성 좌반신 마비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에 제한이 많습니다.

(...) 저희가 학교를 다닐 때는 중학교가 6년제였습니다. 선택과가 이과였고 자연 과학자가 되는 것이 저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6. 25 후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 의과대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 그 무렵 저는 음악을 상당히 좋아했습니다. '르네상스'란 음악다방이 향촌동에 있었는데 전봉건 시인이 그 다방에서 디스크자키를 하던 때입니다. 그 이후 르네상스가 서울로 이사를 가는 통에 그 이웃에 있는 '녹향'이란 지하다방으로 음악을 들으러 나갔습니다. 이 다방은 저에게 많은 만남을 마련해 준 다방이기도 합니다.

(...)청마 선생과의 만남은 이렇습니다. 경북대학에 계시던 박목월 선생이 서울로 올라가시고 나서 후임자로 유치환 선생님이 대구에 오셨습니다. 의대생이었던 내가 단골로 다니던 음악다방 녹향 옆에 있는 백구 세탁소 2층에서 하숙을 혼자하시면서 경북대학 문리과에서 시론을 강의하셨는데, 그 무렵 김종길 선생님이 저를 유치환 선생님께 소개를 해주셔 인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청마시집>이라는 방대한 시집의 출판 기념회 자리가 경북대학 의과대학에서 있었습니다. 거기서 김종길 선생이 청마 시인의 시를 낭랑히 낭송하는데서 이미 감동을 받은 뒤라서 그분에 대한 흠모가 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삶이 워낙 드라마틱해서 그를 통해서 인생의 모습을 엿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야심 또한 없지 않았습니다.

이형기가 부산에 있을 때 저녁이면 서로 만나는 것이 즐거움이었지요. 서로 시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지요. 또 김규태랑은 오래도록 사귀고 있지요 (...) 시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곧 시를 파괴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가 이런 것이라고 굳이 말하라면 시는 체험이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릴케의 말이기도 합니다.

시는 언어의 춤이지요. '언어를 가지고 말로 말하지 못할 것을 말로 쓴다.' 이것이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이 시인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시로서 메시지 전달은 해 본적이 거의 없습니다. 저는 시는 언어의 미학이라고 봅니다.(시와 사상(96년 여름호 발췌) "

인적 없는 해안선 물가를 걷고 있는 지금 아득한 탄생의 중심에서 밀려드는 파도가 남색 엷은 껍질을 찢고 흰 속살을 드러내며 격렬하게 쓰러지고 있는 다른 별의 바닷가를 걸으면서 누군가 나를 닮은 겨울 나그네가 나와 꼭 같은 발자국을 밀물에 지우고 있는 것이 보이는 군청색 바다 마른번개 - 허만하 시 <겨울 동해 나들이> 부분

우리 시대의 대표 시인, 허만하 시인(가운데)
 우리 시대의 대표 시인, 허만하 시인(가운데)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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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시인의 이름은 한자로 '만(萬)'자와 '하(夏)'자이다. '만' 자는 '일만' 혹 '많다'는 뜻. '하'는 '여름'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시인에게서 이름(필명)은 중요하다. 허만하 시인의 함자(銜字)를 떠올릴 때마다 정말 시인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개의 여름'이란 이름을 가진 허만하 시인은, 그 이름처럼 나이를 느낄 수 없는 분이라 하겠다. 한 번이라도 허 시인을 만나거나 그의 시를 읽은 독자라면 이런 느낌을 갖게 될 터다. 뿐만 아니다. 그의 산문은 더 매혹적이다.

'풍경을 찾으러 길을 떠나기도 하고 또 풍경에 관한 문헌도 수집'하는 허만하 시인은 여행을 좋아한다. 그리하여 허만하 시인은 '독자들도 나에게는 하나의 풍경일지도 모른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문득 수채빛 같은 봄의 풍경 저편, 거동이 불편한 허만하 시인을 모시고 해운대 송정 해수욕장의 찻집에서 '가시철조망 넘어 바라보아야 했던 노을의 주홍색 깊이'와 '자욱한 안개에 쌓여 있는 숲과 같은' 풍경이 그리움처럼 피어난다.

그리고 문학 모임 등에서 몇 번인가 뵌 사모님(유치환 선생님의 주례로 결혼)의 해맑은 얼굴이 떠오르고, 허 시인의 정년 퇴임식에서 처음 만났던 박태일 시인의 얼굴과 그 여러 개의 추억의 풍경 위에 박태일 시인의 신랄한 비평으로 떠들썩했던 시단의 몇몇 풍경들도 중첩된다.

"허만하 시인은 과작이었다. 1969년 첫 시집 <해조>를 낸 지 스무해 만인 1999년 두 번 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를 낼 때까지 매체에 크게 이름을 오르내리지 않았던 이다. 부산 지역 시 자리에서 보자면 최계락이 유명을 달리하고, 이형기, 이수익이 서울로 썰물처럼 나가버린 뒷자리를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웠으리라.

게다가 1980년대 젊은 시인들이 벌인 활발한 활동과 시대 변화는 1950년대 끝머리 시인 허만하가 맡았던 역할을 느슨하게 만드는데 일조를 했다. (...) 허만하의 시를 읽는 다른 한 고리는 시어다. 우리 근대시에서 시어는 크게 두 흐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토박이말 지향과 외래어 지향이 그것이다. 앞은 될 수 있는 대로 노래 시로 나아간 길이다. 거기에 견주어 뒤는 근대어로서 왜풍 한자어나 서양말을 전 경화하는 문자시로 나아간 길이다.

그 둘 사이 너른 지장 위에 특별한 언어 관습으로서 우리 근대시가 놓여 있다. (...) 이상, 김광균, 유치환과 같은 이들은 문자시로서 우리말을 닦았다. 1950년대 전후 시인들이나 1960년대 <현대시>동인은 어김없이 이 길에 뿌리를 둔다. (...) 근대 일반지식언어라는 이름으로 들어앉은 외래 관념어나 추상어휘는 사실 근대어로서 한글이 겪은 식민성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허만하 시도 뒤선 경우에 그 뿌리를 둔다.

읽는 문자시‧ 인쇄시로서 근대시가 내달을 수밖에 없었을 길이다. 말이 지닌 바 현존감을 글로써 얻어내기 위해 마련한 강렬한 묘사 욕구와 개성 오롯한 구체성 획득은 허만하 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거듭되는 꾸밈말 첨가와 현란한 되풀이로 얻게 되는 바 묵직한 언어 질량감이 그것이다.<현대시, 03. 2월호>-  박태일)발췌>"

위의 글로 인해 부산의 <국제신문> 지면을 통해 수회의 논쟁의 글들이 게재되고, 이에 허 시인의 시는 전국 독자들의 시선을 집중케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국 현대 문예 비평사를 잠시만 훑어보면, 비평사의 주요한 맥의 하나가 논쟁사임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문학의 활성화뿐만 아니라, 비평사의 풍성함을 위해서는 논쟁의 필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중략) 그동안 허만하 시인의 작품을 두고 계속 되어 온 시인 박태일(경남대)교수와 문학평론가 구모룡(한국해양대)교수 사이의 논쟁이 갖는 의미는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지나치지 않는다. <국제신문, 03. 4.  8 일자, 남송우 문학평론가>발췌 "

허만하 시인에 대하여
허만하 시인/ 1932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대학원 병리학 박사, 2009년 동리목월문학상(목월문학상 수상), 2006년 제3회 육사시문학상 ,2004년 제5회 청마문학상 외

그렇다. 존엄한 시는 그 어떤 논쟁에 의해서도 변형되지도 변질되지도 않을 터다. '시란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의 논리의 손가락 사이를 새어나가는 모래(<꽃과 P-허만하 산문집>)>'같은 것. 혹은 '벙어리 소녀의 눈빛과 같은 것<낙타의 물냄새-허만하 산문집>'이 아닐지. 아무리 시의 옷을 벗겨도 시는 독자에게 알몸을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시로여는 세상(2011년, 봄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허만하, #시로 여는 세상, #시와 사상, #목월문학상, #시인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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