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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괴된 건물을 복구한 군산 도립의원 본관(1954년). 한 때는 군산의 명물이었습니다.
 파괴된 건물을 복구한 군산 도립의원 본관(1954년). 한 때는 군산의 명물이었습니다.
ⓒ 군산도립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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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도립의원은 해방(1945년)과 함께 한국인 운영체제로 바뀐다. 그해 11월 쌍천 이영춘 박사는 전북 군정청 지사(정일사)와 보건후생국장(노윤모)의 간청으로 원장을 겸임한다. 이 박사는 6개월에 걸쳐 병원 업무를 수습하고 원산 출신 이상기 의사에게 원장직을 인계한다.

일제강점기(1922년)에 완공된 병원 건물은 한국전쟁(1950년) 때 폭격으로 대부분 파괴된다. 당시 영국인 의사 '잉글 라이트'(Ingle Wright) 박사를 포함한 미·영 '퀘이커(Quaker)'들은 난민들을 위한 의료 봉사를 하면서 건물 복구공사에도 참여한다.

 난민들 의료와 건물 복구사업에도 참여했던 퀘이커 봉사단들. 가족이 모두 참여한 퀘이커도 있었다고 합니다.
 난민들 의료와 건물 복구사업에도 참여했던 퀘이커 봉사단들. 가족이 모두 참여한 퀘이커도 있었다고 합니다.
ⓒ 이영춘박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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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영 퀘이커 봉사단과 한국인 봉사자들 기념사진.
 미·영 퀘이커 봉사단과 한국인 봉사자들 기념사진.
ⓒ 이영춘박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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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가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은 시기는 휴전협정이 이루어지던 1953년. 당시 의사, 간호사, 사회사업가 등으로 이루어진 퀘이커 소속 봉사단이 군산 도립의원에서 구제활동을 하면서 한국에서 첫 퀘이커가 탄생한다. 주인공은 대한 적십자사 총재를 지낸 이윤구(전 인제대총장) 박사.

한국인 최초로 퀘이커가 된 이 박사는 자신이 쓴 경험담에서 "1956년 여름이었어요. 그때는 군산 도립병원에서 일하는 외국인 봉사자들과 한국인 의사, 간호사들이 주말에 교대로 대천 해수욕장에 가서 지친 몸을 쉬는 제도가 있었어요"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장로교 신자였던 바보새 함석헌(1901-1989)도 1961년 1월부터 퀘이커 모임에 나가기 시작한다. 함석헌은 훗날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됐나>라는 글에서 일요모임 회원이었던 이윤구 박사를 통해 퀘이커를 알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6·25 직후 우리나라 복구 사업을 하는데 퀘이커교에서 영·미 합작으로 수십 명의 사람을 보내왔었지요. 그들이 군산에서 파괴된 도립병원 복구공사를 했는데 거기에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참가해서 처음으로 퀘이커를 알게 되었어요. 나는 그들의 신앙에 참 감동했어요. 그들로 인해서 나는 퀘이커리즘에 흥미를 느끼게 됐어요." (<함석헌 평전> 142쪽)

 도내 대학에 의예과가 없던 시절 개정 간호학교 학생들이 실습하는 모습.(50년대 외국인이 촬영한 사진으로 추정됩니다)
 도내 대학에 의예과가 없던 시절 개정 간호학교 학생들이 실습하는 모습.(50년대 외국인이 촬영한 사진으로 추정됩니다)
ⓒ 김성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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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천 길재단' 이길여 회장은 자신의 저서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하라>에서 군산 도립의원에서의 수련의 시절(1957-1958)을 회상했다. 이회장은 군산이 고향이고 외국인 의료진이 파견 나와 있는 병원이어서 수련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퀘이커 봉사단 소속 영국인 의사 '골든'이 폐렴환자의 입과 코에서 흐르는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는 모습을 보는 순간 하얀 가운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면서 그때 충격을 받고 '진정한 봉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퀘이커봉사단은 1958년 여름에 본국으로 돌아간다.

한때는 월명공원과 함께 명소가 되기도

군산 도립의원은 한때 외지인들도 즐겨 찾던 명소였다. 나무가 숲처럼 우거진 정원에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은 정신을 맑게 해주었고, 잘 가꾸어진 넓은 잔디는 환자는 물론 간호사와 일반인들에게도 좋은 휴식 공간이 되어주었다.

 군산 도립의원 정문에서 월명공원 가는 길. 높은 가시철망이 눈길을 끕니다. (1965년 2월 촬영)
 군산 도립의원 정문에서 월명공원 가는 길. 높은 가시철망이 눈길을 끕니다. (1965년 2월 촬영)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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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정문에서 왼쪽 길로 조금 올라가면 일제강점기 군산부사 건물과 군산신사가 있던 자리가 나오는데 숲이 우거져 새벽 산책길로 사랑을 받았다. 긴 돌담을 끼고 비릿한 바다냄새를 맡으며 미팅을 즐기던 중고등학생들에게도 추억의 기념사진 촬영지로 인기가 좋았다.

특히 붉은색 벽돌로 쌓은 대리석 2층 본관 건물은 시내에서 고층 건물을 보기 어려웠던 60-70년대 상춘객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해주었다. 50년대 자유당 시절 대통령이 방문했던 병원이라는 소문은 시골 노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도선장 가는 길목이었던 병원 인근에는 시영 테니스코트와 해망굴, 흥천사, 등나무 숲, 어린이 놀이터가 자리하고 있어서 봄이면 상춘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외지 사람들이 환자 병문안을 관광 겸해서 올 정도였다.

어떻게 운영했는지 해마다 적자 못 면해

 군산 도립의원 산부인과 과장이었던 황선주 박사
 군산 도립의원 산부인과 과장이었던 황선주 박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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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전남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산 도립의원 수련의를 거쳐 산부인과 과장으로 근무했던 황선주(76) 박사를 만났다. 황 박사는 1972년 시내 개복동에 개원해서 진료에 임하다 7년 전부터 쉬고 있다고 말했다. 

- 고향이 전남으로 아는데, 군산으로 오시게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요?
뭐시냐, 나는 처음에 여수로 갈라고 했지라. 그런데 존경하는 과장님이 군산으로 가라는 거라. 누구 말이라고 거역하겠어, 멋모르고 오게 됐지. 전북대학교가 의대 개설을 앞두고 있을 때여서 군산에는 서울 세브란스(연세대 의대)하고 전남의대 출신 의사가 많았어요.  

- 당시 병원 분위기는 어땠는지요?
극빈자들은 무료로 치료해주었지. 그들을 위한 병동이 따로 있었는데 귀신 나올 것처럼 음침했지라. 꼭 거지 촌 같았어요. 일반 환자들도 잡목이나, 석유난로에 밥을 해먹응께 굉장히 불편했어요. 그래도 그때는 나도 잘 나가고, 군산도 잘 나갔어요. 바다에 고기가 펄떡펄떡 뛰어댕기고 대단했죠. 그려서 그냥 주저앉았지라. 지금까지.(웃음)

황 박사는 병원 바로 앞에 병원 원장과 서무과장 사택이 있었고, 입원실을 칸칸이 막아서 살림도 할 수 있도록 과장(의사)들에게 숙소를 제공해주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충청도 등 외지에서도 환자가 많이 왔는데, 어떻게 운영했는지 적자를 면하지 못했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콜레라 확산으로 곤욕 치르기도

1969년 가을에는 콜레라 확산으로 환자 1백 60여 명을 한꺼번에 수용하느라 곤욕을 치른다. 일본선적 '긴세이 마루'호 선원(시마사키 씨지에)이 심한 설사와 탈수 증상으로 6일간 입원치료를 받고 출항한 후 군산시와 옥구군 미면 일대까지 콜레라가 번졌던 것.

환자 대부분이 가난한 부두 노무자와 그 가족들이었다. 당시 정부는 콜레라 방역 특별대책본부를 설치했고, 국방부는 군산, 옥구 지역에 휴가나 외출을 일절 금지시켰다. 특히 군산항에 입항한 해군 함정은 군인들의 육지 상륙을 막을 정도로 악몽의 상황이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1970년에는 지역주민의 보건향상을 위해 간호보조원 양성소를 개설하여 전문 간호인력을 배출하기 시작했으며, 1972년에는 혈액원을 설치하여 군산 지역의 응급환자에게 부족한 혈액을 공급하면서 질 높은 진료에 일익을 담당한다.

고등학생 때부터 병원 약국에서 근무했다는 김성겸(60세) 현 군산의료원 기획팀장에게 1969년 11월 콜레라 사태와 70년대 의료상항을 들어보았다.

"콜레라 사태가 나던 69년은 제가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근무할 때인데요. 입원실이 부족해서 병원 복도에 야전침대를 깔고 환자를 받았습니다. 환자를 돌보던 저도 감염되어 죽을 뻔했어요. 60-70년대만 해도 의료시설이 빈약했고, 입원실 환경도 열악하기 짝이 없었거든요. 그 속에서도 77년 익산역 폭발사고 때는 절반이 넘는 환자를 수용했습니다.

80년대 초까지는 입원실이 어른 허리높이의 온돌방으로 되어 있어서 환자 가족이 불을 지펴서 밥을 해먹었지요. 청구목제나 한국합판에서 나오는 잡목을 병원 매점에서 팔았어요. 새끼줄로 묶은 잡목 한 단에 20원-30원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불을 땔 때는 연기가 자욱해서 수술환자 '뜨레싱'을 다니지 못할 정도였어요. 다 지나간 옛날 얘깁니다."

1977년 11월11일 익산역 폭발사고로 부상당한 가수 하춘화가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온 기자들과 사인을 요구하는 팬들의 성화로 의사들이 진료를 못할 정도였다는 김 팀장 설명은 당시만 해도 전주·익산의 종합병원들보다 규모가 컸음을 방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지방공사 '군산의료원'으로 새 출발

군산 도립의원은 지역주민의 인지도가 향상되면서 병실 등 부대시설이 부족할 정도로 환자가 늘어난다. 1981년 11월에는 100병상의 인가를 얻어 본관 신축공사를 마무리한다. 그러나 2년 뒤인 1983년 7월1일 지방공사 전라북도 '군산의료원'으로 전환된다.

 군산시 지곡동에 자리한 ‘군산의료원’
 군산시 지곡동에 자리한 ‘군산의료원’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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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공사로 바뀐 군산의료원은 1988년 5월20일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1995년까지 병동을 세 차례 중축한다. 1996년 1월 정밀안전진단 결과 신축 권유로 신축이전 계획을 수립하고, 1997년 8월 14일 지금의 자리(지곡동 146번지 45필지)를 병원 부지로 결정한다.

1997년 5월1일 진료과 20개에서 21개 과로 증설한 군산의료원은 1998년 11월 원광대학교 병원으로 위·수탁을 계약 체결하고, 2002년 4월 한방병원 개원과 함께 신축병원 건물(400병상)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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