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월 22일은 아침에 다소 센바람이 불었고, 나는 록시지역의 은행에 성공적으로 다녀왔으며, 따뜻한 오후즈음에는 아파트주민들이 다시 모여 일대를 청소한 일 외에 이렇다할 뉴스는 없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그 많던 탱크들도 부대 안으로 철수를 했고, 부대 담장 위로 올라가 시내를 향해 총을 세우던 군인들은 다시 게이트 앞으로 내려와 서있었다. 대통령궁 앞의 대로도 이제는 마음대로 통행할 수 있었고 더 이상 바리케이드도 보이지 않았다.

 

헬리오폴리스의 환전소들도 하나둘 다시 영업을 재기하기 시작했다. 환율은 여전히 오르고, 이집트 파운드화의 가치는 날마다 내리막길을 걷고 있지만, 이집트는 산유국이라서 인접국인 리비아의 내전에도 불구하고 유가가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날은 뉴질랜드에 강도 6.3의 지진이 닥친 날이기도 했으며, 리비아의 외국인들이 안전에 크게 위협을 받고 있다는 외신이 줄지어 보도된 날이기도 했다.

 

이른 오후 나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모방송국 기자였는데 리비아교민들이 국경으로 탈출할 예정이니 차량과 통역을 주선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마침 이집트군이 국경마을인 살렘에 난민캠프를 마련했다는 뉴스를 접한 후였던지라 안전을 신신당부하며 차량 등을 연결해주었다.

 

미처 탈출하지 못한 리비아 교민들은 앞으로도 계속 국경을 통해서 이집트로 들어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리비아의 공항들이 정부군과 시위대 사이에서 상당히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리비아와 예멘과 수단의 움직임을 접하는 이집트인들은 꽤 열심히 각 나라의 국민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당신들도 우리처럼 될 수 있어."

 

이집트인들은 아직도 단 18일만에 30년 철권통치가 무너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것같았다. 그들은 다윗이 정말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해보인 것이다.

 

어디에나 불편한 실체들이 있다

 

21일 차기 대권주자로 가장 인기있고 존경받고 있다는, 아랍연맹의 사무총장이기도한 아무르 무사가 매우 놀라운 발언을 했다.

 

"무바라크 전 대통령은 기소될 이유가 없다. (정부는) 그가 전직 대통령으로서 남은 삶 동안 예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6개월 안에 이집트가 완전히 바뀌지는 못한다. (개혁은) 아주 긴 과정을 거쳐야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밝힌 것이지만 듣고 있던 국민들은 그에게서 뒤통수를 맞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전날 군최고위원회가 '무바라크를 법정에 세울 계획이 전혀 없으며, 그는 이집트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게될 것'이라고 했던 발표를 지원사격한 셈이었다.

 

이전의 기사에서도 언급했듯이 서방과 매스컴의 포장을 그대로 믿은 일부의 국민들만이 아무르 무사를 절대 지지하는 것이다. 나는 무바라크 정권 아래에서 탄탄대로를 달려왔고, 아랍연맹의 사무총장에까지 오른 '모범적인 공무원'타이틀의 그의 실체를 어째서 아무도 의심하려들지 않는지 현지인들에게 물었었다.

 

"왜지?"

 

아무도 대답해주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은 아무르 무사를 좋아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군당국과 아무르 무사같은 차기 대선주자까지도 그러한 입장(무바라크를 비호하는)을 고수한다는 사실을 온국민이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참다못한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이 제일 먼저 "정부는 화장만 고쳤을뿐이다, 그들은 혁명을 모독했다"고 중앙일간지를 통해 일갈했다.

 

지난 <분노의 날> 이후 가장 인기있는 일간지가 된 <알 마스리 알윰>은 이집트 국내에 무려 388개의 학교가 무바라크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고, 160개교는 무바라크의 처인 수잔의 이름을, 그리고 1개교는 무바라크의 차남이며 차기대권주자였던 가말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들 학교의 관계자들은 '자신들의 후손을 위해서' 학교이름을 바꾸어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고도 보도했다. 22일은 그렇게 술렁이는 채 흘러갔다.

 

2월 23일 아침에 일어나니 엄청난 뉴스들이 쏟아져나와 있었다.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를 할지 한참을 고민해야만 했다.

 

시민들과 군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군최고위원회는 이집트의 새로운 내각에 3인의 전 정권 인사가 포함되어있음을 밝혔다. 당국의 발표가 나오자마자 이집트 국내일간지들은 일제히 '그 3인은 모두 뇌물죄로 기소중인 자들'이라는 사실을 폭로해 불만족스런 당국의 태도에 응수했다.

 

화요일인 23일에는 무려 4000여 명의 시민들이 타흐리르 광장에 모여 아흐메드 샤피크 총리가 이끄는 현정부를 믿을 수 없다며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국가안전부의 해산과 정치범석방을 강력히 요청했다. 당국은 국립 고등학교와 대학의 2학기 개강을 1주일 더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군당국은 또 국가안전부는 계속 존속하되 현재 국가안전부의 수장인 압델 라흐만 장군을 비롯하여 일부 간부들을 퇴진시키고 새로운 인물들로 교체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집트의 국가안전부는 왕정시대의 정치경찰을 대신하여 1952년 혁명이후 탄생한 내무부 산하의 막강기구였다.

 

이집트인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무소불위의 힘으로 사람들에 대한 고문과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고 했다. 기구가 그대로 유지되는데 수장을 교체한다고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느냐는 비관적인 시각들이 지배적이었다.

 

비슷한 시각 카이로 시내에서는 경찰간부들이 내무부청사 난입을 시도했다. '분노의 날' 직후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었던 경찰들이었다. 그들은 복직을 요청하며 내무부청사 앞에 몰려들었지만 군의 강한 저지를 받았다. 청사난입에 실패한 50여 명의 경찰간부들은 차량을 불태웠으며 청사에도 불을 질렀다. 부대가 그들을 '강력하게 제압'했다는 보도에는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군과 시민들의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조심스런 부언이 곁들여져있었다.

 

종교적 분쟁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와중에 카이로 남쪽 아시우트시에서 콥틱사제가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22일 밤에 귀가하다가 살해되었으며, 누군가 "알라 아크바(신은 위대하다)"를 외쳤다는 소리를 그즈음 그 부근의 사람들이 '들었다'는 모호한 보도가 나왔다.

 

분노한 아시우트의 콥트교도(이집트 기독교인들)들은 눈에 띄는 무슬림들은 닥치는 대로 공격했고 경찰서를 불태웠다. 카이로에서는 콥트교의 수장이 '매우 유감스런 일'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나는 문득 이 순간 이들의 충돌을 보며 웃음 지을 사람들이 분명히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의심이 들었다.

 

지난 1월 25일 '분노의 날'로부터 무바라크 하야까지 무려 18일간이나 '우리는 하나'라며 서로를 보호했던 이집트인들이었다. 종교적인 분쟁을 '굳이' 일으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 2월 11일 '카이로의 봄'을 맞이한 이집트인들의 마음가짐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트위터에 '사랑하는 나의 이집트인들, 나의 친구들에게'라는 메시지를 수차례 올렸다. 나는 또한 '누구를 판단하기 전에 이를 바라던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하라. 그들을 찾아내라. 분쟁하지 말라. 당신들은 하나이다'라는 나의 메시지를 텔레그라피지에도 실어보냈다. 이렇게 국민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서는 안 되지 않은가 말이다. '카이로의 봄'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2월 23일 오후에는 사막지역인 바하리야에서 군대가 콥트교 수도원의 담장을 '차량으로 허물었다'는 뉴스가 터졌다. 당시 군이 저지하는 사제들과 일꾼들을 해산시키기 위하여 공중에 실탄을 쏘았다는 목격자들도 나왔다. 군최고위원회는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매스컴에 '자신들은 불법도로점유물들을 철거하라고 각 주에 명령을 내렸을뿐'이라고 대답했다.

 

이집트는 앓고 있다

 

농산물개발회사에서 1800여 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했고, 동부델타전력회사에서는 생산담당책임자의 교체를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다. 국립철도청직원 300여 명은 재취업을 요구하다 군에 의해 저지당했으며, 로크마 파이프공장 노동자 1500여 명은 50여 명의 직원을 인질로 잡고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수잔 무바라크의 고향이기도한 마니아시에서는 시위대가 마니아와 아스완간 고속도로를 점유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샤키아시에서는 카이로와 이스마일리아간 고속도로가 시위대에 의해 점유되기도 했다. 23일은 하루 종일 이집트 국내에서 새로운 양상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듯한 날이었다.

 

그리고 23일이 저물어갈 무렵, 뒤통수에 결정타를 가하는 기사 한 줄이 국내 일간지를 통해 보도되었다. 바로 무바라크 전 대통령이 무려 10만 에이커(약 4만468㏊)의 땅을(물론 이집트 땅이다) 사우디 왕자 알 왈리드 빈 탈란에게 팔았다는 계약서가 농산부자료에서 밝혀졌다는 내용이었다.

 

이 계약서에 따르면 빈 탈란 왕자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어떤 방법으로든' 이 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 되어있다. 내일 아마도 이집트 국내는 이 한 줄의 기사로 들썩이며 시작될 것이다. 혹시 이 모든 것이 군과 무바라크가 두는 장기판이 아닐까. 이미 목숨 보전의 대가로 재산동결처분을 수락한 무바라크 아닌가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서주 기자는 현재 이집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교민입니다. 이 기사는 네이버의 <마담 아미라의 이집트여행> 카페에도 실리는 글입니다. 


태그:#이집트민주화, #카이로의봄, #서주선생, #이집트군최고위원회, #무바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