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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7번 국도를 따라 통일전망대에서 경북 울진까지 이어지는 여행을 나흘 간 다녀왔다. 여행 첫날 찾은 강원도에서 본 덕장에 걸린 황태는 혹한에 꽁꽁 언 탓에 흡사 화석 같았다. '황태의 고향'이라는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를 지나 진부령을 힘겹게 올랐다. 해발 529미터. 천 몇 백 미터의 고봉들이 즐비한 산줄기를 가르며 동서를 이어주는 '야트막한' 고갯길이다.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더 나아갈 수 없는 백두대간 종주의 종착점이기도 하다.


비교적 완만하게 올랐던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급경사의 꼬부랑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동해 바다까지는 오십 리가 넘는 거리이지만, 차창을 내리면 시린 겨울바람에도 바다 냄새가 흠씬 묻어난다. 서해나 남해 바다에서의 짭조름하고 비릿한 갯내음과는 다른 청량하고 알싸한 냄새다. 광활한 황톳빛 갯벌과 눈이 시릴 만큼 푸른 수평선만큼의 차이다.


진부령이 백두대간 종주의 종착점이듯, 고갯길 넘어 다다른 강원도 고성은 자동차 드라이브를 즐기는 여행자들의 여전한 '로망', 7번 국도 여행의 종착점이다. 도로 표지판마다 부산과 연해주, 시베리아를 잇는 '아시안 하이웨이'라며 대문짝하게 걸어놓았지만, 정작 부산에서 시베리아를 향해 내달릴 수 있는 곳은 이곳까지다.

 

남북 통일, 7번 국도가 '아시안 하이웨이'될 날을 꿈꾸며

 

육로를 통한 금강산 관광이 한창이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원도 고성은 명실상부한 '통일촌'으로 우뚝 설 수 있다는 기대와 설렘으로 들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디 고성의 군청소재지는 금강산에 인접한 북한 지역이다. 하지만 휴전선으로 허리가 잘린 뒤 남한의 경우 간성읍에 고성군청을 따로 두면서 '두 집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비록 한반도의 현실을 축소해놓은 듯 허리가 잘린 채 둘로 쪼개져 있지만 고성이라는 이름은 남북 모두 버리지 않았다. 강원도 고성이라는 행정구역이 통일될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꿋꿋이 버티고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금강산 육로 관광의 기점인 동해선 남북출입관리사무소는 올 겨울 날씨만큼이나 매서운 남북 갈등의 한파에 꽁꽁 얼어붙었다. 인적은 끊긴 지 오래고 주변에 잡초만 무성하다. 완공돼 운영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새 것이지만,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건물은 짓다 만 철골 구조물 마냥 을씨년스럽다.


이곳과 연결될 7번 국도 4차선 도로 확장 공사도 모두 멈춰 섰다. 공사장 주변으로 그 흔한 굴삭기나 덤프트럭 한 대 보이지 않고 되레 주변에 잡풀이 듬성듬성 우거진 것을 보니, 공사가 중단된 지 족히 1~2년은 된 듯하다. 흙을 다져 놓은 도로 공사장에 먼지만 풀풀 나고, 주변 콘크리트 구조물 등은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민통선 출입통제소에 닿았다. 통일전망대에 오르려면 이곳을 거쳐야만 한다. 이곳이 과거 신분증을 맡기고 '출입 허가'를 받는 곳이었다면, 지금은 '입장료'와 '주차료'를 계산해야하는 곳이다. 출입통제소의 직원은 입장권을 건네며 무슨 서명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건립을 청원하는 서명부가 곳곳에 놓여있었다.


과연 몇이나 기꺼이 동참했을까 싶어 서명부를 넘겨보니 그 수가 예상보다 많았다. 초대 대통령으로서 업적과 함께 역사적 과오가 재평가되고 있는 요즘, 분단의 상징인 휴전선 들머리에서 서명운동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 무척 생뚱맞게 느껴졌다. 서명부에 이름을 남긴 그들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역사적 평가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까.


군 초병의 간단한 확인 절차를 거친 후 통일전망대에 올랐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 때 와본 후 20여 년 만이다. 이곳에서 바라본 북녘 땅과 짙푸른 동해바다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푸른 사파이어 위에 다이아몬드 점점이 박힌 듯 아름다운 해금강은 손에 잡힐 듯 가깝고, 아스라이 보이는 금강산은 그 자태만으로도 신비롭다.


그런데도 이곳에 올라서면 자꾸만 군 초소와 섬뜩한 작전 시설 등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하려는 평화롭고 따스한 마음도 위축된다. 당장 가까운 주변을 둘러봐도 안보, 보안, 멸공 등의 서슬 퍼런 글귀가 에워싸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그러나 휴전선 철조망이 걷히고 7번 국도가 진정 '아시안 하이웨이'가 되는 날, 이곳은 그저 하얗게 부서지는 동해 바다의 파도와 해금강의 원경을 감상할 수 있는 경치 좋은 '휴게소'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그때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과거 이곳이 '통일전망대 터'였다면서 역사의 현장으로 소개될 그런 날이 반드시 오지 않을까.

 

화진포 사이에 두고 마주한 이승만-김일성 별장

 

통일전망대를 뒤로 하고 다시 7번 국도를 따라 내려오면서 이 고장이 자랑하는 빼어난 경승인 화진포에 들렀다. 육지를 향해 움푹 들어간 만이 동해 바다의 파도와 조류의 퇴적 작용으로 격리돼 만들어진 큼지막한 석호다. 유명한 속초의 청초호와 영랑호, 강릉의 경포호 등도 모두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빼어난 경치만큼이나 화진포를 유명하게 한 것은 호수를 사이에 두고 분단을 고착화시킨 책임을 피할 수 없는 두 인물, 이승만과 김일성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손짓하며 부르면 들릴 듯한 거리에 다소의 시차는 있지만 서로가 머문 별장 건물이 남아있다. 화진포는 6· 25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38도 선 북쪽인 북한 구역이었다. 그러다 전쟁 후 휴전선이 그어지며 남한으로 편입되었으니, 두 인물의 흔적이 모두 남게 된 셈이다.

 


'화진포의 성'이라고 명명된 김일성 별장은 유럽 중세의 성곽 건축을 축소시켜 놓은 모습으로 안쪽으로는 화진포 호수를 바깥쪽으로는 푸른 동해 바다를 끼고 있다. 바다와 호수를 정원 삼은 빼어난 입지다. 오르는 계단 벽에는 김일성과 그 가족이 머물렀다는 사실을 증거라도 하듯,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릴 적 이곳에서 찍은 사진이 걸려있다.


내부에는 북한의 현재 실상을 소개하는 전시관처럼 꾸며져 있는데, 전시된 내용과 구성에 특별하달 게 없어 별장으로 사용되었을 당시의 모습을 기대하고 찾아간 관광객들에게는 큰 아쉬움을 남긴다. 이국풍의 건물이나 내부의 전시물보다는 밖에서 내려다보는 동해 바다와 송림 우거진 화진포 해수욕장의 경관이 김일성 별장의 백미다.


김일성 별장을 내려와 건너편 이승만 별장으로 가는 길 소나무 숲 안에 또 한 사람의 별장이 남아있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2인자 노릇을 했던 이기붕이 와서 머물던 곳이라 한다. 김일성 별장 발아래에 마치 적을 염탐하듯 납작 엎드린 채 숲속에 숨어있는데, 별장의 자리조차 그의 정치 이력을 닮은 것 같아 쓴웃음을 자아낸다.

 

화진포에 있는 김일성 별장이 박제화된 관광상품이라면, 이승만 별장은 어엿한 역사 유적이자 학습의 장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그가 머물렀던 '허름한' 별장 뒤로 그를 기리는 새뜻한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조용하고 아늑한 곳에 쉬면서 정국 구상에 몰두했던 자취인 별장이 그로 인해 조금은 번잡스러워졌다.


별장은 지어졌을 당시 그 모습대로 복원돼 있어 단박에 봐도 50~60년대 건물 같다. 내부 거실에는 이승만과 그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단란한 모습을 나타낸 모형 인형이 놓여있고, 그들이 머물던 침실과 서재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김일성 별장의 화려한 모습과는 달리 건물 안팎이 무척 검박하고 소탈한 느낌을 준다.

 

'이승만 기념관'의 입맛대로 편집한 역사... 부끄럽다

 

별장을 나와 계단을 조금 걸어 오르면 이승만 기념관에 닿는다. 유물 등을 함께 전시한 여느 곳과는 달리 그의 업적을 생애별로 기록해 사진과 함께 덧붙여 소개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그곳에는 그의 '위업'만 기록하고 있을 뿐, '과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조차 없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쓰고 싶은 내용만 썼다고나 할까.


개인의 생애이기에 앞서, 한 시대의 역사를 좌우했던 일국의 초대 대통령의 역사를 이렇게 입맛대로 '편집'해도 되는 것인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에서 쫓겨난 것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한 전명운, 장인환 의사에 대한 변호를 거부했다는 등의 '소소한' 사실을 외면한 것은 그렇다 쳐도, 광복 후의 정치 이력과 6·25 전쟁 당시의 실정을 미화하고, 4·19 혁명에 대해 왜곡하고 폄훼하는 내용이 버젓이 내걸려있는 것에 분노가 솟았다.


심지어 이런 '저질 코미디' 같은 내용도 적혀 있었다. 4·19 혁명 당시 국민들 대다수가 부패한 자유당 정권을 몰아내고자 했지만, 정작 이승만 개인을 반대한 국민은 열 명 중 한 명 남짓뿐이었다고. 차라리 이승만에 대해, 아니 굴곡진 우리 현대사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면 이처럼 안타까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먼저 이곳에 들러 전시된 내용대로 학습하고 '국부'에 대해 경외감을 갖게 된 일부 관광객들이 민통선 출입국통제소에서의 이승만 동상을 세우자는 서명운동에 적극 동참하지 않았을까 싶다. 순간 그때 서명부를 뒤적이며 본 초등학생 몇몇의 이름이 떠올랐다. 이런 '류'의 기념관이라면, 거칠게 말해서, 적어도 미래세대인 아이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다.


화진포를 벗어나 차를 몰아 심란해진 마음을 달랠 요량으로 관동팔경 중의 하나인 청간정으로 향했다. 누각에 올라 내려다본 동해 바다는 그야말로 심란한 마음을 털어내고 가슴을 틔워주기에 충분했다. 과거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마음도 나와 같았던지 누각 곳곳에 정취를 글로 남겨놓았다. 표현만 다를 뿐, 느낌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곳에서조차 이승만과 조우하게 될 줄이야. 그는 이곳에 들러 여느 시인묵객들처럼 느낌을 적어 거는 대신, 자신의 호를 함께 적은 현판을 붙여놓았다. 그 옆에는 신군부에 쫓겨난 최규하 전 대통령의 것도 함께 내걸려있으니, 풍류보다는 정치적 치장에 가깝게 느껴진다. 관동팔경 중 으뜸이라는 청간정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들은 후세가 외람되이 남긴 생채기일지도 모른다.

 


태그:#이승만 동상건립 서명운동, #7번국도, #통일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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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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