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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기합을 받고 있는 학생들.
 집단기합을 받고 있는 학생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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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AD 354~430)는 <신국론>에서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받은 체벌의 기억을 고통스럽게 회상한다.  

배우는 데 게으르면 매를 맞곤 했습니다. 어른들은 이런 일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이전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삶을 살면서, 고통스러운 이 방식을 선례로 남겼습니다. 우리는 그 선례를 따르도록 강요당하였고, 아담의 아들들에게 노동과 고통을 더욱 증가시켰습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적지 않은 정성으로 학교에서 매 맞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1577년 율곡 이이(李珥)가 편찬한 <격몽요결>은 학문을 시작하는 유소년을 위한 입문 교재인데, '격몽요결'이라는 제목이 흥미롭다. 여기서 '격몽, 擊蒙'이란 '어리석고 어두운 것'을 '쳐서' 가르친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피교육생을 훈육 또는 통제의 대상으로 삼아 체벌을 가할 수 있다는 교육관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정당한 것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체벌의 신화'를 가진 사람들

서울시와 경기도 등의 교육청에서 내린 '학교체벌 전면금지령'에 대응하여, 교육과학기술
부에서 1월 17일 내놓은 '학교문화선진화방안'에서는 간접체벌을 허용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다시 한 차례 체벌논란이 일고 있다. 때를 맞춰 20일 밤 MBC <100분 토론>에서는 체벌논란을 방영하여 학교체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증폭시켰다.

체벌이란 '관습적인 권위관계에 있는 친권자 또는 교사가 훈육을 목적으로 자신의 보호 하에 있는 아이들에게 의도적으로 신체적 고통을 주려는 일체의 시도'로 정의된다(김은경, <한국사회학'>제34집). 이에 따르면 이번 교육과학기술부에서 간접체벌의 유형으로 제시한 '손들기' '운동장돌기' '팔굽혀펴기' 등도 분명히 체벌에 해당된다. 이에 대해 어떤 고등학생은 '간접흡연도 흡연이듯이 간접체벌도 체벌'이라는 글을 올렸다고 한다.

교육학자 김은경은 체벌 찬성론자들은 몇 가지 신화를 간직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중 중요한 두 가지만 소개하면, '부적절한 체벌이 문제이지 절제된 매 때리기는 훈육 효과가 있다'는 신화, 그리고 '만일 체벌이 금지된다면 학교는 혼돈 상태가 될 것'이라는 신화 등이 그것이다.

'교편'과 '사랑의 매'

교문앞 체벌
 교문앞 체벌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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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이 정당한 것인지 부당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자 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전제를 살펴야 한다. 첫째 '체벌은 폭력인가 아니면 선의의 훈육수단인가'. 둘째, '학생은 인권의 주체인가 아니면 훈육·보호통제의 대상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결과 체벌은 폭력이고 학생은 인권의 주체라는 판단이 선다면 우리는 미련 없이 체벌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교편, 敎鞭을 잡는다'는 말이 있다. 주지하듯이 여기서 '교편'이란 '가르치는 채찍'을 의미한다. 그런데 당연히 채찍은 폭력의 도구이다. 이것은 마소를 부릴 때나 쓰던  것이었는데 인류는 편리하게도 이것을 노예나 미성년자를 깨우치는 수단으로 전용한 것이다.

'사랑의 매'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제 아무리 사랑의 매일지라도 그것은 때리는 사람의 추상적인 관념일 뿐이다. 정작 구체적으로 매를 맞는 것은 학생이므로 학생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단연 더 중요한 것이다. 교사는 사랑의 매를 때렸는데 학생은 그것을 '증오의 매'로 받아들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사실 '미움의 매'건 '사랑의 매'건, 매는 매일 따름이며, 이것 역시 폭력의 도구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일견 그럴듯한  '교편'이니 '사랑의 매' 따위의 말들도 모두 체벌을 미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에 불과하다. 모든 체벌은, 설령 그것이 선의의 것이라고 해도, 마땅히 폭력의 범주에 들어가야 한다.

결국 체벌이란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기제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직접체벌이 폭력이라면 간접체벌은 고문이나 학대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폭력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시범 케이스', 그 혐오스러운 언어

다음으로 학생은 인권의 주체인지 아니면 훈육과 보호통제의 대상인지를 살펴보자. 이것은 양자택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당연히 학생은 인간이므로 인권의 주체가 된다. 동시에 미성년자인 학생은 훈육과 보호 통제의 대상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인권의 주체이기 때문에 보호통제의 대상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고대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체벌이 정당화된 것은 미성년자를 인권의 주체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벌을 두둔하는 교육자들과 일부 학생들은 체벌을 하지 않을 경우 수업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한다. 그들은 '교실붕괴'라는 과대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문제 학생을 골라 본보기로 체벌을 가함으로써 수업 질서를 바로잡는 일이 시급하고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이른바 '시범 케이스' 논리인데, 사실 이런 논리야말로 학생의 인권을 수단 삼는 부도덕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우선 이 말은 학생을 처단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저돌적인 권위의식이 배어 있는 것 같아 혐오스럽다. 우리는 학창시절 '시범 케이스' 운운했던  교사치고 과연 제대로 된 교사가 있었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국의 중등교육이 파행을 빚고 있는 것은 체벌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한국에서 대학입시의 강박증으로부터 자유로운 중고생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름 아닌 입시 위주의 강제주입식 교육이 부단히 체벌의 신화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대다수 고교생들은 과도한 정규수업 이외에도 자율학습이라는 위장된 명목의 감금 자습을 강요당하고 있다. 그들의 하루에는 말 그대로 '세븐-일레븐'의 혹독한 일정밖에는 없다. 일단 교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 시간이 인간의 체력 한계를 벗어난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방학도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이 와중에 수업시간에 졸지 않는 학생이 있다면 오히려 그런 학생이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지경이다. 우리 아이들을 이런 지경에까지 몰아세우고는 그것을 체벌로 통제하겠다는 발상부터가 비교육적인 것이다.

무엇이 체벌의 신화를 조장하는가

영화 <투사부일체>의 한 장면.
 영화 <투사부일체>의 한 장면.
ⓒ (주)시네마 제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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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그 자체로도 나쁜 것이지만 그것이 가지는 전염성 때문에 더욱 위험한 것이다. 폭력은 연쇄적으로 폭력을 잉태한다. 체벌에 찬성하는 교사 중에 군대 체험을 한 남교사가 많다는 점, 그리고 여교사일지라도 폭력 부모를 둔 경우가 많다는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폭력 행사가 일상화되는 상황에서는 폭력 자체가 그 행사 주체와 목적으로부터 분리되며, 따라서 폭력 자체가 정당화되면서 다른 사회관계나 친구관계에까지 확장되어 행사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공격은 반격을 낳게 하며, 교사에게 반격을 하지 못하면 자기보다 약한 대상을 구해서 반격하게 되는 사도매조키즘(sado masochism)적 행태가 강화된다.
- 김은경 '체벌의 신화와 실제' <한국사회학> 제34집 수록 논문 중에서

일찍이 폭력의 전염성을 문제시한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저서 <폭력과 성스러움>
에서 인류 공동체의 문명 자체가 폭력을 기반으로 하여 구축되었다고 주장한다.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인류는 폭력을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또 다른 폭력을 이용해 왔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근대 이후의 제국주의 침략 역사는 서구문명의 폭력적 성격을 십분 증명하고도 남는다. 유럽 여러 나라와 일본이 일찍이 19세기 말에 학교 체벌을 법으로 금지한 것은 그들 스스로 자행한 폭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일찌감치 체감했기 때문인 면도 있다고 본다.

폭력은 가해자건 피해자건 모두를 전염시키는 속성을 띠고 있다. 또한 전염은 중독으로 고착된다. 체벌의 효용을 신뢰하는 것은 폭력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며 체벌이 없어진 후의  현상에 경악하는 것은 그것이 일시적인 금단현상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체벌을 옹호하는 것은 그 사람이 '폭력의 추억'에 젖어 있다는 증거가 된다.

한국인은 식민지와 분단전쟁 그리고 군부독재라는 '3중 폭력'에 노출된 과거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 우리 모두에게는 폭력의 추억이 잠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로 되돌아가 본다.

만약 어린 아이 시절에, 혹은 청소년 시절에 우리가 우리 부모에게 혹은 교사에게 매질을 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여 체벌을 당하지 않았다면, 우리들 중 제대로 된 성인으로 성장하였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우리들 중 누가 그 무엇이라도 제대로 배울 수 있었겠는가? 그러한 체벌은 잔인함에서가 아니라 선견지명을 가지고 이루어졌던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서한집>)

이 글은 놀랍게도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성인도 얼마든지 폭력에 전염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어린 시절 그토록 끔찍하게 체험했던 학교체벌을 마치 아름다운 추억처럼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인간인 이상 누구도 폭력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체벌을 극도로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태그:#체벌, #격몽요결, #아우구스티누스, #교편, #시범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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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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