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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귤보다 고춧잎에 비타민C가 훨씬 많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세상이 달라 보였던 기억이 난다. 시퍼렇고, 모양새도 볼품없는 고춧잎의 놀라운 비밀은 유레카의 발견처럼 깊게 뇌리에 박혔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비단 식품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테다.

 

연말 방송대학교 졸업생 모임에 참석했다. 스터디 그룹에 참여해서 꾸준히 공부하지도 못했고, 학생회가 주최하는 특강에 겨우 참석한 정도였는데, 모임을 주최한 학우님께서 꼭 오라고 강권하여 염치 불구하고 달려갔다.

 

그런데 안 갔으면 정말 후회할 뻔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졸업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듣자니, 삶의 자세와 깊이에 대해 한 수 제대로 배웠다고 해야 할까.

 

한 학우님께서는 거의 3년에 한 번씩 새로운 도전을 하신다고 했다. 피터 드러커 교수의 권고를 그대로 실천하고 계셨다. 머리맡에 영어책, 한문책, 교양 도서를 두고 그날 마음에 내키는 책을 보다가 스르륵 잠들 때가 많다는 것. 지금은 영어 학원에 다니시는데, 영어 공부의 뜨거운 목적이 심금(?)을 울렸다. 화끈하고 장난기 많으신 학우님 왈.

 

"태국에 갔을 때, 어떤 외국 남자가 결혼했느냐고 물어보더라구요.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답변하면서 재미있게 대화해 보고 싶었는데 '예스' '노'만 하려니까 너무 재미없더라구. 외국인 남자 친구를 만나려면 공부해야지요."

 

또 대학생 딸과 함께 한자 3급 공부하실 거라는 포부 속에는 열정이 한 가득 실려 있었다.

 

고3 자녀를 둔 아버지 학우님은 어릴 적 눈보라가 치는 날에도 친구들 어깨에 손에 손을 얹고 몇 십리를 걸어 학교에 다녔던 추억을 들려주셨다. 방송대 입학 후 어떻게든 공부를 한 자라도 더 하려고 했는데, 밤늦게 퇴근해서 아침 여섯 시에 출근하려니 집에 오자마자 책을 펴도 몸이 견디지 못했던 날이 많았다고 토로하셨다. '6시간 남짓의 수면 시간을 쪼개 가며 공부하신 셈이구나'하고 깨닫고 나니 가슴에서 뭔가 울컥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아들만 둘 두신 학우님에게는 시어머니 병수발을 하시면서 공부를 했다는 말씀을 듣게 됐다. 시험을 코앞에 두고 시어머님께서 쓰러지신 날이 많아 간호하랴, 공부하랴 힘드셨다고 하시는데, 이렇게 어려운 여건 속에서 공부 하셨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터였다. 특강에서 잠깐 뵈었을 때, 언제나 교수님 바로 앞에 앉으셔서 필기하시고, 조용히 질문하시는 모습만을 뵜었기에, 그저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방송대에서 공부한 시간이 가장 자신에게 진실된 시간이었다고 말씀하신 학우님도 계셨다. 그 전에도 가족과 자신을 위해 살아왔지만, 공부하면서 가장 치열하게 자신과 직면할 수 있었다는 경험담을 들려주셨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모님 아래서 큰 어려움 없이 자라고 대학 졸업해,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인스턴트식 생활'에 젖은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됐다.

 

생의 깊이를 자로 잴 수 있다면, 나의 지금 청년의 때와 학우님들이 겪은 청년의 시절 중 누가 더 깊게 삶 속으로 파고든 것일까. 내가 그 분들의 연배가 되었을 때, 그렇게 뜨겁고 진솔한 모습으로 도전하고, 멋지게 열정을 내뿜을 수 있을까. 어디서 주워들은 세련되고 겉멋만 잔뜩 든 말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 달리고, 버티고, 견뎌내며 터득한 자신의 언어로 '빈둥거리며 불평 많은 어느 청년들을' 가슴 깊이 부끄럽게 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한국방송통신대학교, #방송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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