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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렁댐의 대가답게 내 특기는 버스 잘못 타기.  이 특기 덕분에 대학 시절 여러 번 엉뚱한 곳에 가게 된 적이 많았다. 분명 집에 가는 버스를 탔는데, 내가 알고 있는 방향과 전혀 다르게 가는 버스. 그런데도 나는 늘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은 채, 매번 집까지 가는 새로운 버스 경로가 개통된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다. 버스를 갈아타는 게 너무 귀찮은 게으름도 악착같은 착석을 부추겼다. 안타까운 것은 그 믿음이  매번 거짓으로 판명 났다는 점.  버스 잘못 타기의 경험은, 그러나 뜻하지 않은 생각의 변화를 가져왔다. 몇 번 경험이 쌓이다보니, 지금 현재 어떤 방향으로 버스가 가든지 내가 가야할 목적지는 집이므로,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되돌아갈 수 있다는 배짱이 생긴 것.

종점이 교도소인 버스 덕분에 교도소 앞에서 혼자 내린 적도 있었고, 운 좋게도(?) 군부대 앞까지 다녀온 적도 있다. 내가 아는 길 밖에도 멋진 세상은 얼마든지 있고,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갈 것인지 확신만 있다면 절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개똥철학의 완성은, 어쩌면  버스 잘못 타기의 습성이 가져다준 열매였다.

일본 오사카에 갔을 때, 도톰보리 지역의 광경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오사카의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도톰보리 거리를 들어서면 양 옆으로 인형 뽑기 가게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퇴근 시간이 되면, 가게 안이 직장인들로 가득 메워진다는 거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날 일정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온 후 밤에 일본 현지 라멘을 먹어보겠다고 다시 가보니, 인형 뽑기에 열광하는 현지인들이 많았다. 인형 뽑기에 도전할 돈으로 차라리 갖고 싶은 인형을 사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는데, 단지 '재미'를 위한 공간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인형 뽑기 가게들은 성행 중이었다.

엉뚱하게도 나는 인형 뽑기 가게에서 불확실성으로부터의 도피를 생각했다. 인형 뽑기는 다른 게임과 달리 갖고 싶은 실물이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눈에 보이는데다가, 성공하면 직접 그 인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인형을 뽑는 과정 중간 중간 목표가 눈에 뚜렷이 들어오니 불확실성은 결단코 마음속으로 꿰차고 들어올 수 없다. 

더구나 다른 이들과 협력할 필요 없이 전적으로 자기 혼자의 손기술만으로도 얼마든지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마저 재인식할 수 있는 장점까지 있다.  살면서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것인지, 꾸준히 하다 보면 정말 목표를 성취할 수 있을지, 다른 사람 도움 없이도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수도 없이 몰려온다. 불확실성을 떠나 확실성을 붙들고 싶은 집착이 인형 뽑기 가게를 끊임없이 서성이게 하는 것 아닐까 하는 허튼 생각을 한참 했었다.

사이판에서도 확실성에 대한 갈망이 어떻게 현실을 지배하는지 간접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반나절이면 섬 둘레를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섬에 한인들이 꽤 많이 살았다. 한인들이 많이 오면서 살림살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가이드에게,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사이판을 못 떠나는지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내용. 사이판은 미국령이기 때문에 후에 자녀가 특별 전형으로 국내 대학에 입학하거나 편입할 때 도움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대학입학의 확실성을 선점(?)하기 위하여, 따져보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졌는데도, 사이판을 떠날 수 없다는 답변에 괜스레 씁쓸해졌던 기억이 난다.

엊그제 채명이(가명)가 사는 게 불확실해서 싫다며, 공부도 못하고, 남자친구와도 헤어졌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죽으려 했는데, 슬퍼하실 엄마 얼굴이 떠올라 그만 뒀다며 찾아왔다. 요지는 확실한 뭔가가 있으면 좋겠는데, 미치겠다는 거다.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라고, 돌팔이 진단을 내리며, 내 미래 계획을 살짝 이야기했더니  놀란다. 이 무능한 김지학 교사는 대한민국 교육 발전에 저해만 되므로, 더 이상 교직에 두어서 안 된다고 국가가 결정하면, 유럽에 가서 라면을 팔 거라는 일급비밀(?)을 이야기해 줬다. 우리 인스턴트 라면이 보통 6,7천 원에 팔리니 도전해 볼만한 사업이라고. 잘 살고 있는 것 같은 어른들의 미래도 불확실하다는 것과 덧붙여, 공부 못하는 아이만 가질 수 있는 확실성의 장점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되짚어줬다.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은 모두가 다 잘하는 아이들이다 보니, 한 번의 실수로 엄청난 결과가 몰려오지만,  꼴찌는 더 내려가고 싶어도 0점이라는 확실한 기반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귀금속 공예를 하고 싶다는 확실한 목표도 있고, 나를 끔찍이 사랑하는 가족도 있고, 지금은 잘생긴 남자 친구가 떠난 게 아쉽지만, 유럽에 가면 윙크하고 소리 지르는 꽃미남들이 너무 많아 인기 걱정해야 할 거라고.

불확실성을 도피하려는 욕망 때문에, 아직 찾아오지도 않는 미래의 확실성을 붙들기 위해, 현재를 스스로 저당 잡으며 자기 위안을 하는 삶이라니! 불확실성의 중심부로 뚜벅뚜벅 들어가 뒹굴고, 들이키고, 씨름하며 발버둥치는 것, 그게 천하보다 귀하다는 우리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아이들도, 나도 삶의 불확실성과 친해지면서, 신나게 살았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보건교사, #불확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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