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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걸그룹에 의한 '신 한류열풍'이 심상치 않다. 소녀시대가 연속해서 일본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했다는 뉴스도 현해탄을 건너 전해진다. 8년 전 <겨울연가>가 후려친 회오리 바람 못지않은 강풍이다. 특히 8년 전의 강풍이 일본 중년 여성층의 감수성을 자극했다면, 소녀시대와 카라는 10대와 20대의 미적 감각을 흔들었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이러한 예술적 후각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한 마디로 조상 대대로 내려온 풍류정신과 예술적 감수성이 토대를 이루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흔히 유럽 사람들이 한국인을 '극동의 라틴민족'이라고 하지 않는가? 지금부터 400년 전 고산 윤선도는 우연히 닿게 된 '보길도'에서 나름대로 풍류를 즐겼다. 고산의 풍류정신을 찾아 떠나보기로 한다.
 

 

보길도의 '윤선도 명승지'는 행정 구역 상 전남 완도군 보길면에 속한다. 보길도는 주변에 병풍 모양으로 노화도, 소안도, 당사도, 예작도, 횡간도 등으로 빙 둘러싸여 있다. 보길도 가는 길은 해남군 땅끝 마을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30분 정도 달려가 노화도 산양진항에 도착하게 된다. 산양진항에서 차를 타고 보길대교를 건너면 바로 보길도로 접어들게 된다.

 

보길도의 윤선도 문화유적과 천연기념물은 도처에 흩어져 있다. 가장 중요한 윤선도 명승지인 세연정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남쪽으로 격자봉 아래에 곡수당과 낙석재가 자리 잡고 있고 왼편으로 동천석실, 오른 편으로 예송리 상록수림과 갯돌해변이 놓여 있다. 보길도의 오른 쪽 끝 백도리 바닷가에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는 '글씐 바위'가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11월의 주말을 활용하여 전남지역 문화탐방단 40여 명과 함께 남도의 섬들을 찾아 나섰다. 작년부터 외부 강연에서 집중하고 있는 '느림의 미학 - 슬로 시티를 찾아서'를 탐방하여 공부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 중 첫날은 보길도를 찾았다. 물론 보길도는 슬로시티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슬로워킹하기에 가장 좋은 곳임에 틀림이 없고 지역의 특산물도 풍부한 곳이다.

 

보길도는 행정안전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2008 휴양하기 좋은 섬 베스트 30>에 포함됨으로써 엄청난 관광객들이 밀려들고 있다. 먼저 고산이 '부용동'이라고 명했던 세연정부터 찾았다. 고산은 자신의 생애에서 총 7차례 13년간 보길도에서 머무르며 '어부사시사'와 32편의 한시를 창작하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등 풍류를 즐겼다.

 

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 - 1671)는 50세 때인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급하게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등 왕자와 빈궁 및 궁중의 비빈 나인들을 강화도로 피신시킨 후 임금도 그 뒤를 따르려 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영․호남 방면의 수군을 모아 수백의 의병을 모집하고는 배를 타고 서해를 거쳐 강화도로 향했다. 

 

1월 29일 강화도 근처에 이르렀으나 이미 그곳이 청나라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할 수 없이 통곡하며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렸다. 또 왕이 남한산성의 적의 포위망을 뚫고 영남에 몽진(蒙塵)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만약 왕께서 불행이 있으면 서산(西山)의 미(薇), 상산(商山)의 지(芝), 관영(管寧)의 탑(榻), 기자(箕子)의 금(琴)의 종적을 따르고자 하는 비장한 각오를 갖고 2월에 겨우 해남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1637년(인조 15년)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을 접하고는 다시는 이 세상에 나오지 않을 마음을 굳게 먹고 아예 탐라(제주도)에서 살 생각으로 남쪽으로 향하다가 보길도의 절승에 감복하여 "천석(泉石)이 절승하니 참으로 물외(物外)의 가경(佳境)이요, 선경(仙境)"이라 말하고 이곳에 머물기로 작정한다.

 

현재 보길도에는 황원포(潢原浦)라 하여 고산이 제주도로 향하던 중  심한 풍랑을 만나 처음으로 보길도에 배를 정박했던 곳으로 어떤 바람이 불어도 맞지 않는 팔풍지석(八風之席)의 공간이 남아 있다.

 

고산은 자신의 산중 은거생활의 이유를 몇 가지 자료에서 달리 말하고 있다. 고산이 처음 보길도에 들어갔을 때 황익(黃瀷)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산은 자신의 보길도 도피 이유를 자기를 배척하는 세인의 악랄한 훼방에 견디지 못하여 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앞서 영상인 강석기로부터 배척을 받아 성산현감으로 좌천된 경우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어찌되었든 고산은 추잡한 당쟁에서 벗어나 허위가 없는 자연을 벗삼아 일생을 은둔할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산은 이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명명하고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짓고 낙서재라고 편액을 걸어 주자학을 연구하는 등 자연에 심취하여 여생을 보낼 것을 결심한다. 독서하면서 즐거움을 얻고 은둔하려는 고산의 철학이 배어 있는 곳으로 현재는 주춧돌과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을 뿐이고 소은병(小隱屛)이라는 바위만 남아 있다. 이 일대에 고산은 낭음계(朗吟溪), 오운대(五雲臺), 독등대(獨登臺), 상춘대(償春臺), 언선대(偃仙臺) 등 바위에 이름을 붙여 자연과 대화하는 공간을 마련하여 은둔의 삶을 만끽하게 된다.

 

고산이 은둔 도피생활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여러 자료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홍우원(洪宇遠)이 찬한 익장(謚狀)에서 고산은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천석고황(泉石膏肓)의 병이 깊음을 밝히고 있다.

 

고산은 "병자호란 이후 세속에 뜻이 없어 사람들과의 만남도 단절하고 산과 바다를 찾아들어 자연의 아름다움에 탐닉하여 살기로 작정하였다. 물을 끌어 나무를 심고 산수의 즐거움에 우거하면서 거문고를 뜯으면서 가무를 즐기고 희귀한 음률 악조의 완만함과 끊어짐을 익히려고 한다. 때때로 완상하면서 음조를 듣고 그것에 의탁하여 감회에 젖어 심중의 울적함을 떨쳐버리려고 한다"고 자신의 심정을 밝히고 있다.

 

사실 고산 윤선도는 지금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에 해당되는 연화방(蓮花坊)이란 곳에서 부친 윤유심의 선언(善言), 선도(善道), 선계(善繼)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26세에 진사시험에 장원으로 합격을 하였지만, 그 다음해 12월 모친에 이어 자신의 생부마저 잃어 불행이 겹치게 된다. 

 

상복을 벗은 해인 30세 때 그는 당대의 권신인 이이첨, 유희분 등의 권력남용을 비판하는 병진상소(丙辰上疏)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에 유배를 갔다. 이후 남인에 속하였던 고산은 끊임없이 당대 집권세력인 서인과 정치 투쟁을 펼치면서 역경과 고난의 삶을 살게 된다. 

 

인조반정 이후 8년 동안의 긴 유배생활에서 풀려났다. 고산은 42세 때인 1628년(인조 6년)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급제하였는데 그 때 시관인 장유(張維)가 그의 답안지를 보고 '동국의 제일책(第一策)'이라고 한 말은 유명하다. 고산은 이조판서 장유의 추천으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師傅)가 된다.

 

43세부터 고산의 관직운은 트여 공조좌랑, 형조정랑, 호조정랑, 46세엔 사복시검정, 한성부서윤 등을 거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가르쳤던 효종이 등극한 후 간곡한 부탁으로 벼슬길에 나섰으나 두터운 서인세력의 장벽에 갇혀 자신의 정치철학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죽기 직전인 80대 중반까지 노구를 이끌고 낙향과 출사를 반복하게 된다.

 

해남의 땅끝 선착장에서 <해광2호>를 타고 30분 정도 여행한 후 노화도의 선양선착장에 도착했다. 다시 싣고 온 버스로 갈아타고 노화도 이목리에서 보길대교를 건너 부황리에 있는 세연정으로 향했다. 보길대교가 있는 청별리에서 세연정까지는 약 1.5km 거리로 1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땅끝 선착장에서는 '땅끝'이라는 표석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파시처럼 바다에서 잡아온 고기들을 파는 할머니가 생선을 사라고 손짓을 했다. 배에 오르자 맨 먼저 왼편의 무인도 섬이 관광객들을 즐겁게 맞아주었다. 배가 떠나기 전에 그 섬을 배경으로 하여 사진촬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해의 바다 빛은 동해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동해가 푸르른 바다로 구성된 파스텔톤이라면, 남해의 바다 빛은 초록색이 감도는 에머랄드 빛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간혹 제주도 바다처럼 검은 용암이 바닥에 깔려있어서 검붉은 빛을 지니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에머랄드 빛을 유지하고 있어 보다 평화롭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일행 모두는 남도 바다에 놓여있는 작은 섬들을 방문한다는 기쁨에 다들 들떠있었다.

 

 

갑자기 선창이 소란스러워졌다. 전남문화탐방단 중 한 명인 제자가 다가와서 선창 반대편에 유명한 성우 양지운씨가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왔다고 전해주며, 가서 인사나 하라고 권유한다. 모두들 우루루 양지운씨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몰려갔다. 역시 연예인이나 공인은 자유롭게 여행하기가 어려운가 보다. 성우 양지운씨는 주말 영화 속의 로맨틱 가이의 목소리답게 포근하고 자상하게 일행을 맞아주었고, 즐거운 담소를 나눈 후 사진촬영에도 응해주었다.

 

세연정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 곳'이란 뜻으로 <고산연보>에는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 때 지은 정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자의 중앙에 세연정, 동쪽에 호광루, 서쪽에 동하각, 남쪽에 낙기란이란 편액을 걸었으며, 서쪽에는 칠암헌이라는 편액을 따로 적어 걸었다고 하나, 지금은 중앙에 세연정이란 현판만 걸려있다.

 

세연정 주변의 잘 생긴 바위 일곱을 지칭하여 칠암이라 불렀는데, 그중 하나인 사투암은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쏘는데 발 받침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바위로 연못 쪽이 들려진 모습이다. 들려진 부분에 발을 딛고 옥소대 쪽 과녁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일행 40명과 함께 산중턱에 위치한 옥소대에 오르니 세연정 주변이 탁트인 광활한 공간에서 중심처럼 아득하게 보였다.

 

윤선도 원림을 떠나 고산이 1670년 사망할 때까지 5년간 기거하며 책을 읽었다는 격자봉 아래에 위치한 낙서재와 곡수당을 찾았다. 곡수당은 고산의 휴식공간으로 작은 개울을 중심으로 초당, 석정, 석가산, 평대, 연지, 화계, 월하단 등이 좌우로 조성되어 있다. 그 옆 서재에는 고산의 아들과 제자들이 기거하였다.

 

'학문을 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낙서재는 고산이 1670년 죽기 직전까지 5년간 살았던 집으로 경내에는 낙석재 이외에도 조상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찾아온 손님을 맞이했다는 무민당, 동서쪽에 위치하여 잠깐 휴식을 취하기 위한 조그마한 움집인 동와, 서와가 있었으며, 소은병이라는 바위가 뒷 정원에 있어 그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다고 한다.

 

15년 전에 낙서재를 찾았을 때는 동사무소 직원으로부터 360억원의 예산을 확보하여 윤선도유적지에 대한 대형 공사가 진행중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사이 원형에 가깝게 윤선도 유적지가 조성되어 앞으로 수많은 관광객들이 들이닥칠 것으로 생각되었다.

 

일행을 가장 긴장시킨 곳은 바로 동천석실이다. 낙석재에서 바라다보면 산중턱에 있어 매우 높은 곳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막상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성인걸음으로 불과 10분 정도면 동천석실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실제 고산 윤선도 원림을 찾아온 관광객 중에서 동천석실을 등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강진의 다산 정약용 유배지와 비교하여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산 유배지는 오르는데 30분 이상이 소요된다. 하지만 동천석실은 불과 10분 거리에 있어 오르지 않으면 손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동천석실에서는 보길도에 있는 윤선도 유적지 모든 곳이 한 눈에 들어온다. 태산에 올라서 맹자가 호연지기를 느꼈듯이, 고산은 동천석실에 올라 정치적 권력투쟁의 무상함을 느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산 유적지 동천석실을 내려와 통리와 중리를 지나 백도리로 향했다. 사실 통리해수욕장과 중리해수욕장은 한여름에는 관광객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해변이다. 또 중리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도치미전망대'도 남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멋진 곳이다.

 

백도리 해안에는 조선조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우암 송시열이 쓴 암각시문이 있어 눈길을 끈다. 우암은 장희빈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것이 시기상조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83세의 고령에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나 풍랑 때문에 잠시 보길도로 피하게 되었다. 우암은 이곳 백도리 해안에 있는 바위 위에 자신의 참담한 심정과 임금에 대한 원망을 담은 한시를 바위에 새겼다.

 

  여든 셋 늙은 몸이 푸른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구나.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세 번이나 쫓겨난 이도 또한 힘들었을 것이다.

  대궐에 계신 님 속절없이 우러르며 다만 남녘 바다의 순풍만 믿을 수밖에

  담비 갖옷 내리신 옛 은혜 있으니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 

 

우암은 국문을 받기 위해 제주도를 떠나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당시 장희빈이 원자를 생산하자 그녀를 엄호하던 남인세력들이 서인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을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사약을 내렸던 것이다. 물론 장희빈 중심의 남인세력들이 권력을 휘두르던 권력남용도 불과 6년에 지나지 않아 그녀의 오빠 장희재가 사형을 받고 곧 이어 장희빈도 자결명령을 받음으로써 남인집권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어느덧 늦가을의 해는 바다에 걸려 붉은 해무리만 남기게 되었다. 일행을 재촉하여 마지막 일정인 예송리 상록수림과 갯돌 해변을 방문했다. 역시 예송리 갯돌해수욕장의 일몰의 아름다움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낙조가 주는 아련한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며, 보길도와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보길도 예송리에는 천연기념물 제 40호인  상록수림으로 둘러싸인 예송리 해수욕장과 천연기념물 338호인 감탕나무가 있다. 특히 예송리 해변은 갯돌바위로 유명한 갯돌해수욕장이 있는데, 이곳은 백령도의 몽돌해수욕장, 거제도의 학동 몽돌 해수욕장과 더불어 '한국의 3대 몽돌해수욕장'에 속한다. 다음 날 가게 될 김환기의 고향인 신안군 안좌도로 향하는 들뜬 마음을 안고 해남 땅끝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덧붙이는 글 | 슬로시티운동의 일환으로 남도의 섬을 탐방하기로 했다. 우리나라에는 3200여 개의 섬이 있지만,  세계적인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가지고 있고 특산물도 많지만 특화되지 않고 홍보부족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아 안타깝다. 남도 섬의 아름다움과 문화적 가치를 널리 알리고 싶다. 


태그:#보길도문화탐방, #세연정, #동천석실, #예송리 갯돌해수욕장, #우암 송시열 암각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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