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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하시(왼쪽)와 타마요세(오른쪽)
▲ 오키나와에서 첫만남 타카하시(왼쪽)와 타마요세(오른쪽)
ⓒ 김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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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에 도착했을 때 '막걸리'와 나는 자세한 여행 계획이 없었습니다. 미군기지를 돌아보자, 이에지마 섬에 가자, 오키나와 정기관광버스를 타서 남부지역과 중부지역을 돌아보자, 환경단체 사람을 만나자, 치바나쇼이치상을 만나자,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현지인과 가까워지자, 오키나와 소바를 먹어보자 등등 단편적이었죠. 장소와 장소는 연결이 되지 않았고, 어디서 머무를지도 정하지 못했습니다. 국제거리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가격 따위를 인터넷상으로 비교해본 게 전부였습니다.

'막걸리'는 며칠 동안은 타카하시상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헉, 둘은 처음 본 사이였습니다. 타카하시상은 한국말도 곧잘 했고, 평택 대추리도 여러 번 방문했으며, 한국과의 교류에 관심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그만큼 한국 사람에게 애정이 많았습니다. 여행자의 허기짐도 누구보다 알고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우린 첫 날부터 타카하시상에게 신세를 지기 시작했습니다. 타카하시상은 장애인관련 복지단체에서 일을 하면서 미군기지관련 시민사회단체일도 주도적으로 맡고 있습니다. 일본은 시민사회단체 전업 활동가를 찾기 힘든데, 이를테면 투잡을 하는 셈이었습니다.

오키나와에는 미군기지 관련 시민단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고 했습니다. 대부분 대표 명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회원을 모집해서 활동비를 받는 상근활동가를 뽑으면 되지 않을까라고 물었는데, 그 정도의 관심이라면 여기선 행동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일반인들의 시민단체 활동에 관심이 없다는 얘기였고,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의 시민사회단체 상근자를 부러워하더군요.

무작정 가도 괜찮다면서요?

타카하시상은 우리에게 무작정 오라고 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덕분에 타카하시상의 도움으로 열흘 동안 거의 공짜로 숙박과 식비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소개시켜준 아키라상 덕분이었습니다. 타카하시상은 이에지마 섬에 갈 때도 민박집을 잡아줬고, 환경단체 전시회가 있을 때도 소개를 시켜줬습니다. 그가 연결해주지 않았다면 평생 만나보지도 못했을 소중한 인연이었습니다.

타카하시상과 아키라상은 오랜 친구였습니다. 아키라상은 우리에게 거실을 통째로 내주고, 자신은 뒷방에 머물렀습니다. 오키나와의 더위를 생각한다면,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마루에서 잘 때는 베란다 문을 열기 때문에 전혀 덥지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새벽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기온이 내려가서 추울 정도였습니다. 새벽마다 신경질적으로 울어대는 매미소리에 깨서, 베란다 문을 닫곤 했습니다.

아키라상은 아침밥도 저녁밥도 손수 요리해줬습니다. 마트에서 사온 도시락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인들은 마트에서 판매하는 도시락을 많이 먹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저희에게 대접을 해준다고 도시락을 내올 정도였습니다. 각종 튀김과 고기, 살찌는 인스턴트로 채워진 도시락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키라상은 열흘 내내 메뉴를 바꿔가며 음식을 해줬습니다. 혼자서 음식 만드는 게 익숙해 보였지만, 더위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여행자로, 손님으로 아키라상의 집에 머문다는 생각에 그가 해주는 걸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가 땀을 뻘뻘흘리며 스파게티를 만들거나 카레를 만들고 미소국을 만들어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요령껏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고, 그릇장에서 컵과 젓가락과 개인접시를 챙기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예의와 눈치가 필요한 순간

그래서 그런지 어느날부턴가 아키라상은 우리에게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민 정민, 이리와', '정민 정민, 이거 가져가'를 시작으로 그릇을 가져가라, 음식을 떠라, 물을 가져와라 등등 짧은 한국어로, 그는 우릴 부렸습니다. 그것도, 꼭 나에게만 주문했습니다. 처음엔 어색했습니다. '정민', '정민' 부르는 것도 불쾌했습니다. 말이 너무 짧은 탓입니다. 오키나와는 한국 못지않게, 가부장적인 사회였습니다.

우릴위해 직접 일본어와 한국어로 메모를 해줬습니다
▲ 아키라상의 메모 우릴위해 직접 일본어와 한국어로 메모를 해줬습니다
ⓒ 김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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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속상한 건, '막걸리'가 도통 도와줄 생각을 안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 그와 단둘이 있을 때 볼멘소리로, "이제부턴 니가 해!"라고 최후통첩을 날렸습니다. '막걸리'는 전혀 눈치 못 챘다는 반응을 보이며, 다음부터는 자신이 심부름을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어찌됐든 다음부터는 '막걸리'가 직접 나섰습니다. 아키라상이 날 불러도 '막걸리'가 일어나 집안일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눈치를 챘는지, 아키라상은 나 대신 '막걸리'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음식을 돕는 것뿐만 아니라 아키라상의 집에서 지내는 횟수가 하루 이틀 늘어날수록,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애써 만들어준 음식을 남기는 건 실례였고, 욕실을 쓸 때도 머리카락 하나 흔적이 남지 않도록 마무리를 해줘야 했습니다. 비누와 샴푸는 적당히 쓰게 되고, 목욕도 빨리 끝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괜히 신경이 쓰였습니다.

내 속옷은 왜!

오키나와에 도착한 첫날, 후텐마기지며 오키나와국제대학이며 의욕만 너무 앞선 나머지 한두 시간을 땡볕에 걷고 또 걸은 날이었습니다. 입었던 옷을 전부 빨아야 할 정도로 고생을 했는데, 세탁기를 첫날부터 사용하는 게 미안해 일단 빨래통에 옷들을 전부 담고 다음날 세탁기를 한꺼번에 돌릴 생각이었습니다. 하루 한 번보다 이틀에 한 번이 아키라상을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아키라상은 뭐든 맘대로 쓰라고 강조할 정도로 적극 권장했는데도 말입니다.

다음날 집에 돌아와보니 빨래가 베란다 빨랫줄에 널려있었다. 이런, '막걸리'와 내 속옷까지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난감할 때가.

아키라상의 과도한 상냥함에 놀랐지만, 다음날부터는 빨래통에 빨래도 넣지 않게 됐습니다. 속옷은 아예 밤에 샤워하면서 손빨래를 했습니다. 아키라상이 부담을 준 것도 아니고, 사용하지 못하게 막은 것도 아닌데, 집안에서는 걸을 때도 조심조심 걷게 되고, 대답을 할 때도 상냥하게 받아줘야 할 것 같고, 심지어 한국어 공부를 하는 그에게 뭐라도 하나 더 가르쳐줘야 할 것 같은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여행자는 예의가 있어야 쫓겨나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집나가면, 고생이라고 하는 거겠지요.

당신의 염치를 덜어줄 선물

이렇게 염치없는 여행자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 선물입니다. 현지 사람들과의 교감을 나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세를 갚는 데는 최고입니다. 선물은 여행을 떠나기 전 꼭 준비해야한다고 말해두고 싶습니다. 물론, 잘 골라야 합니다.

우선 부피가 작아 가방에 자리를 덜 차지해야 합니다. 무거우면 안되겠지요. 깨지거나 폭파하거나 하는 위험한 종류는 물론이거니와 물이 새거나 국물이 흐르거나, 더위에 쉬어 버리거나 하는 음식물도 물론 안되겠지요.

아키라상에서 준 돌하르방
 아키라상에서 준 돌하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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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은 성의가 느껴지지 않으면 소용없고,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건 가치가 없기 때문에 피해야 합니다. 가장 제주적인 것이면서 가볍고 개별포장이 되는 걸 사야 합니다. 가격은 저렴해야 하고, 선물마다 의미를 담고 있어야 좋습니다.

'막걸리'와 고민하다 가까운 제주토산품점을 찾았습니다. 낱개로 살 수 있는 돌하르방 열쇠고리와 어린아이 주먹만한 돌하르방 모형, 특별하게 도움을 주신 분에게 줄 감귤비타민을 샀습니다. 이걸 하나하나씩 포장했습니다. 여기에 제주 지도와 세계자연유산관련 자료, 제주지역 해군기지 투쟁관련 DVD, 제주현안을 다룬 책들까지 챙겼습니다. 제주에 대한 호기심을 풀어줄 열쇠가 될 테니까요. 아, 빠질 수 없는 것, 소주도 챙겼습니다. 플라스틱으로 된 작은 한라산소주는 현지인들과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해줬습니다.

이외에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걸 현지인에게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가령 제주지역 새들이 그려진 손수건과 이중섭미술관에서 산 손수건, '막걸리' 어머니가 직접 감물을 들이고 바느질한 갈옷은 아주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식량으로 챙겨간 라면과 초고추장, 오징어젓갈도 대단히 쓸모가 있었습니다.

선물은 내가 사는 지역의 홍보도 됩니다. 제주에도 눈이 오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제주지역 소주인 한라산소주에는 눈쌓인 한라산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아 네, 바람이 세서 비가 가로로 내리기도 하고, 눈이 많이 쌓이면 스키도 탄답니다~~라고 과장을 덧붙이려다 참았습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신이 사는 지역을 선물할 수 있는 걸 가져가세요. 터무니없이 신세를 진 게 아니라면, 그 분들은 배고픈 여행자를 위해 웃어줄 겁니다.

결국, 남는 건 뭐? 역시, 사람

일본은 전체적으로 물가가 높습니다. 그 중에서도 숙박비와 식비는 부담스러울 만큼 비쌉니다. 아키라상은 거실을 아무 조건 없이 열흘동안 내준 고마운 분입니다. 그는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지만 아직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러있어서 우리는 한자로, 영어로 대화를 하곤 했습니다. 일한사전과 전자사전, 종이와 펜으로 의사소통을 이어갔습니다. 아키라상은 그날 그날 일본어 차트를 만들어주곤 했는데, 가령 "모토부항으로 어떻게 가야 하나요"를 일본어와 한국어 발음으로 적어줬습니다. 우릴 위해서였습니다.

그와는 저녁을 먹으면서 굉장히 많은 얘길 했는데,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 본토를 '일본'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는 놀라운 설명도 해줬습니다. 마치 다른 나라를 대하듯 말입니다. 아마 오키나와는 독자적인 류큐왕국이었고, 전후의 미군 통치를 받았기 때문일 겁니다.

오키나와는 1972년에 일본으로 반환됐습니다. 수를 빼보니, 40년도 안 됐습니다. 일본과 미군에 대한 반감이 아직도 많은 것 같았습니다. 아키라상은 미군 통치 때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오키나와에 있는 집에 가기 위해서 필요했던 여권까지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오키나와가 일본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일본 본토에서 오키나와에 가기위해서 필요했던 여권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 아키라상의 여권 일본 본토에서 오키나와에 가기위해서 필요했던 여권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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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얘기를 많이 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개인사까지 듣게 됐습니다. 대학생 때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다녀왔다는 얘길 마치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습니다. 나중에는 장난이라고 번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묘사한 '신주쿠 소란사건'은 리얼했습니다.

거짓말이든 진심이든, 그는 엄청난 과거를 숨기며 살아가는 듯, 미스터리한 뉘앙스를 풍겼습니다. 그러다가도 술에 취하면 태권도를 보여준다며 일어나 발차기를 연발했고, '아리랑' 연주에 어깨를 덩실덩실 움직여주는 댄스 실력을 과시하기도 한, 유쾌 발랄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키라상은 지역신문에 등단한 소설가였고,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타고난 예술가였습니다. 보기와 다르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겠죠!

오키나와에서 만난 인연
 오키나와에서 만난 인연
ⓒ 김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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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지원군을 만나다

마지막날 우리는 오오무라상에게 제주에서 가져간 갈옷을 주고야 말았습니다. '막걸리'의 어머님이 직접 손바느질로 만든 옷이었습니다. 그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그에게 3일 동안 신세를 졌습니다. 그는 회사에 월차를 내고 달려와 통역을 해줬습니다. 한국에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는데 한국말을 완벽하게 했습니다. 우리처럼 운전면허도 없고, 심지어 핸드폰도 없다는 점도 우리와 비슷했습니다.

나중에는 '아저씨'라는 호칭이 불쑥 튀어나올 정도였습니다. 그에게는 갈옷 뿐만아니라 돌하르방이며 환경관련 책이며, 제주해군기지 관련 DVD며, 심지어 내가 들고 다닌 손수건까지 다 퍼줬습니다. 더 이상 줄게 없어 주지 못했습니다.

오오무라 아저씨는 공항까지 마중 나오셨는데, 정년 퇴직 후 한국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싶다고 할 정도로 한국에 남다른 애정을 간직한 분이었습니다. 한국과의 인연이, 제주와의 끈이 계속 이어지길 바랍니다.

환경전시회에서 본 오키나와의 환경문제
 환경전시회에서 본 오키나와의 환경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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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째 환경운동, 오키나와를 지키다

요시야스 선생님은 40년째 오키나와에서 환경운동을 하고 계신 분입니다. NPO '오쿠마가와 유역보전기금' 대표이자, '류큐제도의 세계자연유산추진연합회', '오키나와 생물다양성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입니다. 공무원 퇴직 후, 환경운동의 길을 걸으며 제2의 인생을 살고 계셨습니다. 요시야스 선생님은 오키나와 환경 단체들이 연합 전시회 때 만났습니다. 환경에 관심이 많은 '막걸리'는 요시야스 선생님 곁을 떠나지 않고 오키나와의 환경문제를 배웠습니다.

전 세계 어딜 가나 정부는 개발정책을 내세우나 봅니다. 오키나와 역시 숲을 깎아 도로를 내고 하천을 만들고, 해안가를 매립해 건물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얀바루'의 숲은 오키나와 전체면적의 10%, 일본 전체면적의 0.1%에 불과한 곳인데, 제주로 치면 '곶자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곶자왈'은 제주의 허파라고 불리는데, 얀바루도 그랬습니다. 뿐만아니라 다양한 생물들이 살고 있어 학술적으로도 가치있는 보물숲입니다. 이런 얀바루의 숲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환경단체들이 협력하고 있었습니다.

얀바루의 숲에는 '노구치게라'(딱딱구리)와 '얀바루쿠이나'(뜸부기)라는 '국가지정 특별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물이 살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노구치게라'는 400마리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것도 300마리 정도는 미 해병대 북부훈련장에서 서식하고 있다고합니다. 그러니 보호하려고 해도 손을 쓸 수 없다는군요. '얀바루쿠이나'는 처음 발견된 1982년에는 1800마리가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800마리로 줄었다고 하는군요. 30년만에 말입니다.

요시야스 선생님은 얀바루의 숲을 비롯한 오키나와의 아름다운 자연자원을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하기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제주에 세계자연유산이 있다는 걸 놀라워하면서도 부러워했습니다. 왜 자연유산으로 등재가 안되냐고 물으니, 미군기지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제주에서도 해군기지가 생기면 등재가 취소될 수 있다는 논란이 있었는데, 실제로 오키나와는 군사기지 때문에 세계자연유산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요시야스 선생님은 너무나 안타까워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만난 인연
 오키나와에서 만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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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젊음, 오키나와의 미래

유우리상은 젊고 유능한 여성입니다. 일본 본토의 외국어대학에서 한국어, 아니, 조선어를 공부했다고 했습니다. 한국에는 두 차례정도 통역을 위해 왔다갔다고 했습니다. 그녀와 나는 같은 성별조건으로, 말이 잘 통했습니다. "남자친구 없어요, 일본남자들은 보수적이에요, 안 사귈 거예요, 귀찮아요…"라며 투덜대면서도, '막걸리'가 설거지 하는 모습에 깜짝 놀라며, 한국남자에 대한 '로망'을 가질 정도로 순수했습니다.

제주에 오면, 남자를 꼭 소개해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집안일 잘하고 돈 많고 잘 생긴 놈으로다가 말이죠. 아! 팔뚝질하는 시민단체운동가가 좋다고 했습니다(참고하시고 관심있으시면 연락주세요).

그녀에게는 청년층 일자리에 대한 얘길 많이 들었습니다. 안정된 일자리인 공무원이 되려고 공부하는 대학생이 많다고 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더군요. 특히 오키나와의 20대들은 일자리를 위해 일본 본토 주요 도시로 나간다고 했습니다.

오키나와에서는 미군기지가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데, 일자리 제공에는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1차산업의 비중도 크지 않았습니다. 그럼 뭘하면서 먹고사냐고 물어보니, 제주와 비슷하게 관광으로 먹고 산다고 하는군요. 그러니 젊은 사람들은 일본 본토로 일자리를 얻기 위해 나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런 틈에서 유우리상이 대단한 건, 일본 본토에서 오키나와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아직 20대 중반도 안 된 그녀는 오키나와를 위해 일할 준비가 돼있었습니다. 시민단체일도 좋아하고, 한국어 공부도 좋아하고, 정치에도 살짝 꿈이 있는 듯했습니다. 어딜가나 이렇게 멋진 여성분들이 있어 세상이 돌아가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역시 여행에서는 사람만 기억에 남습니다. 오키나와하면 반사적으로 이분들이 떠오를 겁니다. 관광지보다, 사람들이 먼저 떠오르는 여행을 했다면, 성공한 거겠지요? 글쎄, 그분들이 절 기억해 줄지는 장담못하겠지만 말입니다. 


태그:#오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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