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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으로 오게 될 줄은 몰랐고, 게다가 평양에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랬던 사람이 인천에 정착해 만든 회사에서는 자판기 수익금을 모아 북측 동포들을 돕고, 또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 돕는 게 인륜'이라고 주위를 설득하고 있다.

군대에서 맺은 인연

치과기공사인 김오봉씨는 겨례하나평양치과사업본부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년 전 쯤 겨레하나평양치과병원 건립을 위해 평양을 다녀온 후 후원활동을 펼치고 있다.
▲ 김오봉 치과기공사 치과기공사인 김오봉씨는 겨례하나평양치과사업본부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년 전 쯤 겨레하나평양치과병원 건립을 위해 평양을 다녀온 후 후원활동을 펼치고 있다.
ⓒ 김갑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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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치과기공사 김오봉(43)씨다. 어쩌다 군대에서 사람을 잘(?) 만나 인천에 오게 됐고, 인천에서 어쩌다 치과의사를 잘못(?) 만나 엉겁결에 평양까지 다녀온 그지만 그는 겨레하나평양치과사업본부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북측 동포 돕는 일을 함께하고 있다.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른다. 물론 못 본지 오래다. 그러나 얼굴만큼은 여전히 선명하다. 기념사진을 가지고 있어 생각날 때면 볼 수 있기 때문이지만, 그보단 2년 전 같이 2시간 반 정도 얘기를 나눴을 뿐인데 기술자는 기술자를 알아본다고… 서로 자란 환경이 너무도 달랐고, 배운 과정도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그 때 만난 북쪽 보철사(=북에서는 치과기공사를 보철사로 부른다) 선생과 짧은 시간이었지만 얘기가 통했다. 아니 기술이 통했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얼굴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겨레하나평양치과사업본부는 정부와 인천시, 여러 사회단체의 도움을 얻어 겨레하나평양치과병원을 건립을 주관한 뒤 이 병원을 지원하고 있는 단체다. 평양에 있는 겨레하나평양치과병원은 인천과 평양의 '민관 교류협력'의 상징이다.

겨레하나평양치과병원은 2008년 7월 평양 제1인민병원 구강병동(=남측 치과병동)에 2층 건물 30개 실 연면적 900㎡ 규모로 지어졌으며, 21명의 의료진이 평양시민 연인원 3만명에게 치아 교정, 보철, 충치예방 등의 진료를 하고 있다. 하지만 남북관계 경색 뒤 남측으로부터 지원은 끊긴 상태다.

남쪽 기공사와 북쪽 보철사의 만남

김오봉 기공사는 겨레하나평양치과병원이 들어설 때 기술자로 같이 참여했다. 당시 건립사업에 통일부, 인천시, <부평신문> 등 지역 언론, 인천시치과의사회, 가천의대 치위생과가 후원했는데, 김씨가 속한 인천시치과기공사회도 참여하면서 힘을 보탰다.

"치과 기공사 중 평양을 다녀온 사람은 내가 처음이지 않을까? 군에 있을 때부터 기공사로 일하다가 그 분(=함께 군 생활을 한 치과의사)이 인천에 개원한다고 해서 도왔고, 나중엔 기공소를 차려 치과의사를 두루두루 만났다. 그러다 인천치과의사회도,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인천)도 알게 됐는데, 내가 속한 기공사협회가 좋은 일에 나선다기에 참여하게 됐다. 원래는 당시 (기공사협회) 회장님이 가시는 거였으나 일정이 맞지 않아 내가 갔다."

김씨는 평양 순안공항에 내렸을 때부터 마음이 영 불편하더니, 평양에 도착한 뒤 북측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관광을 하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고 했다. 머릿속에는 남측의 장비를 지원받아 새롭게 리모델링 공사를 마친 겨레하나평양치과병원에서 자신이 할 일을 그리고 있었는데, 시간은 정작 몇 시간 안됐다고 했다.

"관문 격이라 할 수 있는 공항의 모습에 적잖이 놀라고 실망했다. 그때가 가을 무렵이었는데, 나도 70년대 우리 풍경이 머릿속에 있는 건 아니지만 꼭 평양으로 가는 내내 70년대 모습을 떠올렸다. 시내는 그나마 나았지만, 속으로 어려운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광을 하는 내내 '여긴 어려운 곳인데 내가 이렇게 한적하게 관광을 해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고, 치과병원에 도착했을 때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남측에서 지원한 장비가 디지털 전동 장비다 보니, 김씨는 그에 맞춰 보철장비를 챙겨갔다. 그러나 그가 준비한 장비는 소용이 없었다. 장비를 가동하기 위한 전력이 마땅치 않았던 것. 그래도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했다.

김씨는 그렇게 북측의 보철사를 처음 만나 두어 시간가량 치아보철기술에 대한 깊은 얘기를 나눴다. 김씨는 "북에도 우리 국정원 같은 게 있어 우리 두 사람을 따라다녔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 치아와 보철에 대한 얘기만 하니깐, 나중에 신경 안 쓰더라. 그런데 정말 치아보철만 얘기하는 데도 시간이 모자랐다"고 말했다.

약속한지 벌써 2년이 다 돼 가는데...

남쪽의 베테랑 치과기공사 김씨와 얼굴도 나이도 모르지만 김씨에게 실력 있는 기공사로 기억된 북쪽의 보철사는 그렇게 만났다. 그리고 다시 만날 때는 장비와 여건이 조성되지 않아 전하지 못한 남쪽의 기공술을 꼭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약속한지 벌써 2년이 다 돼가지만 남북관계 경색 뒤 북으로 지원하는 치과관련 장비와 재료 등은 전혀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평양을 처음 접했을 때 가슴이 저렸다. 왜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마음 안다고, 내가 어릴 때 가난해봐서 마음이 저렸다. 평양에 다녀왔다고 하니 사람들이 적잖이 놀랬다. 그리고 돕자고 했을 때, 남북에 여전히 높은 벽이 있음을 느꼈다. 그런데 한번 다녀와 보시라. 그러면 (왜 도와줘야 하는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 또 그렇게 교류협력이 많아지면 남과 북의 이질감도 줄어들게 돼있다. 지난 번 아이티 대지진 났을 때 돕는 손길, 나도 우리 회사도 아이티를 지원했다. 그런데 북을 돕자면, '거긴 아니'라고들 한다. 설득 끝에 지금은 회사 자판기 수익금을 치과병원 후원금으로 낸다. 물론 원재료비는 내가 내는 데(웃음)…그만큼 우리 사회에 아직 벽이 있다."

김씨는 북쪽 보철사와의 약속을 지킬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게 언제 열릴지는 아직 확실치 않지만 남북이 평화와 통일을 원한다면 열릴 것이라고 믿고 있다. 복잡한 정치 내막이야 모르지만 기술자끼리 통했던 마음을 알기에 그 날이 멀리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김씨는 "사기로 보철치아를 만드는 게 북측 보철사의 소원이라고 했다. 사실 사기로 만드는 보철치아는 북에 먼저 도입됐다. 우리나라에서도 70년대에 들어오긴 했지만 부유층 외에는 사용할 수 없었을 만큼 귀했고, 지금도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재료다. 내가 만난 그 기술자는 아직 익히지 못했는지 다음에 만나면 꼭 그렇게 하자고 했다"며 "좀 더 여유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 돕는 게 인륜이다. 평양에 갔을 때 그런 생각이었다. 나이 들어 기공사를 그만두면 가난한 이들의 보철을 돕고 싶은데, 이 역시 같은 맘이다. 여러분도 저와 같다면 겨레하나평양치과병원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겨레하나, #남북관계,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겨레하나평양치과병원,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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