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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박성희 개인전에서 50대 관람객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대성통곡했다는 작품
▲ 배꽃당신 "애비야 이쁘냐?" 2009년 박성희 개인전에서 50대 관람객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대성통곡했다는 작품
ⓒ 박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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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작품은 작가의 삶이 버무려져있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들으면 운명에 격렬하게 저항하는 베토벤의 비장한 삶이, 고흐의 그림을 보면 자기 귀를 도려내면서까지 그림을 위해 자기를 강박한 처절함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들여다보면 실질적인 아내 역할을 했던 '로즈'와 예술의 동료 '까미유 끌로델' 사이에서 번민하는 로댕의 고뇌가 묻어난다.

닥종이 조형작가 박성희의 닥종이 인형에도 그의 삶이 버무려져있다. 그것은 처연함과 허허로움 그리고 수십 년 낡은 사진첩을 펼쳐보다가 당장이라도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것 같은 본능적인 사랑이다.

지난 7월 지역의 행사 취재를 따라 나섰다가 박성희 작가가 운영하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사 입구 식당 '마당'의 전시실에서 그의 닥종이 인형 작품을 처음으로 만났다. 인형이라기보다는 내 삶에 가장 소중했던 기억인 나의 할머니가 앉아있었다.

눈동자 없이 움푹 꺼진 두 눈과, 깊게 패인 주름, 그리고 다 빠져버린 이 때문에 오므라져 주름진 입술, 농사일에 마디가 굵어진 투박한 손, 하얗게 서리 내린 머리카락과 미어져 해져버린 베옷에 이르기까지, 아들을 앞세우고 한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 할머니가 환생해 정말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여름이 가기 전에 작가를 한번 만나보리라 마음먹고 어렵사리 청을 넣어 허락을 받아냈다.

인터뷰를 위해 작업실을 찾은 날 그는 다음 달 일본에서 있을 전시회의 도록을 만들기 위해 콤팩트 카메라로 채도 낮은 종이를 찍고 있었다. 도록은 벌써 나와 있는데 바탕색이 맘에 들지 않아 작업을 새로 한다는 것이다. "예상 했던 대로 역시 만만치 않은 완벽주의자로구나…" 가져갔던 카메라로 그 작업을 대신해주며 인터뷰를 위한 사전 탐색전을 끝내고 나지막한 그의 작업실에서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말 나눔을 시작했다.

닥종이와의 운명적인 접신(接神)

닥종이 조형작가 박성희
▲ 박성희 닥종이 조형작가 박성희
ⓒ 송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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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검은돌마을(흑석동)마을에서 태어난 박성희 작가(47)가 종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2년 서예를 배우면서 부터다. 2003년에 용문사 입구로 이사와 식당을 경영하면서도 틈틈이 붓글씨를 썼던 그는 어느 날 굴러다니는 파지 뭉치를 어떻게 할까 궁리하던 가운데 파지를 끓여서 종이죽을 만든 다음 마른종이 소쿠리하나를 만들어 동네 사람에게 선물했다. 그런데 받은 사람이 너무 좋아하는 것을 보고 파지의 씀씀이를 알아냈다.

"파지로 인형을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 스치는 순간 그는 닥종이와 접신(接神)하는 운명이 되었다. 그가 맨 처음 만든 닥종이인형의 모델은 동네 이장님이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이장님은 온 동네일에 너스레를 떨고 반죽이 좋으면서도 속이 허허로운 분이었다. 인형 만드는 법은 인터넷을 보고 알아냈다. 완성된 인형을 이장님에게 보여주니 너무 좋아했다. 자신이 생겼다.

다음해(2004)에 전주와 원주 미술대전에 출품해서 입상하고 2006년에는 제1회 크라운·해태제과 닥종이인형공모전에서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그 해 그는 이탈리아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동료들과 단체전을 가진 뒤 지독한 성장통을 겪게 된다. 공예와 예술의 경계에서 서 있던 그는 이때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작품성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부질없는 인생 한줄기 연기에 날려볼까?
▲ 덧 없는 인생(浮生) 부질없는 인생 한줄기 연기에 날려볼까?
ⓒ 박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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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에 혼(魂)을 불어넣는 일이 가능할까?

"내 작품이 다른 사람들 작품과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죠. 보통 닥종이 인형하면 생각나는 이미지는 오동통한 볼의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착한 엄마와 아빠 인형이었고 실제 작품들도 그런 이미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물론 제 작품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내가 다짐한 것은 100% 닥종이만 쓴다. 작품에 혼을 불어 넣겠다는 것이었는데 첫 번째 결심은 의지대로 할 수 있었지만 두 번째는 쉽지 않았어요." 

작품에 혼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마치 조물주가 흙으로 만든 자기의 형상에 생기를 불어 넣어 사람을 창조했듯이 종이인형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이다. 그때부터 그의 모델은 노인들에게 집중된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으며 한평생을 살아온 노인들의 표정에서 삶의 궤적을 찾아 작품으로 이입시켜 인형에 혼을 불어넣기로 작정했다.

깊게 패인 주름, 검게 그을린 얼굴, 저승사자라는 검버섯, 빠진 이로 합죽이가 되어버린 입과 주름진 입술, 두 줄기로 튀어나온 새로 멱주름, 새하얀 머리칼, 투박한 손과 발, 남루하고 해진 옷가지, 심지어 고무신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라도 노인의 표정과 의상에 관련된 것들이라면 모든 것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그의 작품에는 대부분 눈동자가 없다. 비록 눈동자가 없지만 세월을 따라 깊이깊이 몸 속으로 들어가 버린 움푹 패어진 인형들의 두 눈에서는 처연함이 뚝뚝 떨어진다. 평범하게 사는 이웃 어른들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형상이 머릿속에 각인되면 작업에 들어갔다.

모델은 자기 자신이었다. 거울을 보고 자신의 표정을 작품 속의 이미지와 오버랩 시켜 나갔다. 몇 끼씩 밥을 거르면서도 한 잔의 커피에 의존하며 한 가닥 철사에 수 천 겹의 닥종이를 붙이고 또 붙이며 밤샘작업을 해나갔다. 머리카락을 만들 때는 닥종이로 떡칠해 붙이는 것이 아니라 닥나무 껍질을 한 올씩 가발 만들 듯이 심어서 완성했다.

닥종이 인형은 닥종이만을 붙여서 되는 것은 아니다. 염색도 필수 과정이다. 오동통한 어린이 인형이야 원색으로 채색된 종이를 사서 쓰면 그만이지만 구겨지고 색 바랜 낡은 사진첩 속의 인물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만의 염색기법이 필요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채도 낮은 색을 즐겨 쓰는 그만의 염색기법이 탄생 했다.

그 염색 기법 덕분에 구김살 진 베옷의 자연스러움까지 리얼하게 표현 할 수 있게 됐다. 박성희 작품의 색감은 마치 몇 년을 항아리에서 곰삭은 젓갈 같다는 느낌이 든다. 밥으로 치면 방짜그릇에 화려한색의 갖은 나물을 얹고 새빨간 고추장을 넣어 비빈 비빔밥이 아니라 바가지에 담은 보리밥에 시어 꼬부라진 희끄무레한 열무김치와 강된장을 넣어 비비적거린 비빔밥이랄까?

일본 한국문화원 박성희 닥종이 부생전의 메인 작품
▲ 망모봉송(亡母奉送) 일본 한국문화원 박성희 닥종이 부생전의 메인 작품
ⓒ 박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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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없기에 진정한 창작의 자유를 누리다

그렇게 3년여의 성장통을 겪은 끝에 그는 작년 5월에 인사동 경인미술관 제2전시실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그 전시회는 닥종이 인형계에 커다란 충격을 몰고 왔다. 전시장에서는 두 개 밖에 남지 않은 이를 드러내며 족두리를 쓰고 즐거워하는 할머니인형(어머니-배꽃당신)을 보고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50대 관람객이 대성통곡하는 소동까지 겪게 된다.

동적인 공연을 보고 눈물 짖는 일은 흔하지만 서 있는 인형을 보고 사람이 통곡했다는 것은 작품에 작가의 감정이입이 어느 정도인지 어림할 수 있었기에 전시장을 찾는 사람마다 감탄의 연속이었다. 작품에 혼을 불어넣겠다던 그의 결기가 열매를 맺는 순간이었다. 작품 구입문의도 빗발쳤다. 한 유명 탤런트도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몇 번이나 작품 구입을 부탁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하나하나가 순산한 것이 없이 지독한 난산의 산고를 거친 자식 같은 작품들이기 때문에 애착이 가는 것이 사실이지요. 한 작품을 하다보면 체중이 3~4Kg 씩 줄어드는데 예닐곱 근씩이나 내 살을 때어 간 작품을 팔고 싶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작품을 한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보고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죠. 비단(絹) 500년, 종이(紙) 천년, 옻(漆) 2천년이라는데 그렇다면 천년 뒤에까지 제 작품이 남아 있지 않겠어요?"

다른 욕심은 몰라도 작품 욕심만큼은 깊이를 헤아릴 수없는 그의 말이다. 

"사람들은 저를 닥종이계의 서태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나보다 더 지독스러운 사람이 나와서 나를 넘어설 것이고, 정말 그렇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제자를 두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예술이라는 것이 타고 난 소질과 더불어 얼마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나가느냐 하는 끈기가 거장이 되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의 앞날을 책임져야 하는 스승이 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죠. 제자라기보다는 서로 부대끼면서 머리를 맞대고 연구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같이 갈 생각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내게도 스승이 있다면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힘들텐데 그런 면에서 보면 차라리 스승이 없는 내가 진정한 창작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겁나게 맛나 부러
▲ 소박한 밥상 겁나게 맛나 부러
ⓒ 박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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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진 곳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이들의 삶을 매만지며 살 것

그는 시인이다. 그가 만든 작품처럼 그의 시어들도 간결하고 소박하다. 그는 그의 시로 자신의 도록을 완성한다. 개인전시회가 성공리에 끝난 덕에 매니저도 생겨 작품 활동에만 전념 할 수 있게 된 박성희 작가는 "내년부터는 노인 캐릭터와 더불어 사회의 그늘진 구석에 소외돼 있으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을 매만지면서 살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박성희 작가는 오는 9월 8일부터 일주일 동안 일본 한국문화원에서 전시회(박성희 닥종이 부생전)를 열 예정이다. 그가 3년 동안 공들여 매만진 작품은 26점, 이번 일본전시회를 앞두고 박 작가는 마치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간 간 아들에게서 온 편지를 읽고 있는 듯한 할머니 인형을 메인 작품으로, 한때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킨(金)짱, 긴(銀)짱' 할머니 인형과 기모노를 입은 할머니 인형 등을 새로운 작품으로 준비했다.

박성희 작가의 닥종이 인형 일본전시회를 통해 일본열도에서 새로운 분야의 한류문화가 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위로부터 망각/마른 삶/세월/기다림
▲ 그 밖에 전시작품들 위로부터 망각/마른 삶/세월/기다림
ⓒ 박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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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구리넷(www.gurinet.org)에도 보냈습니다.



태그:#박성희, #닥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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