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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꽃은 보면 볼수록 왜 그리도 뭔가 슬픔 같은 것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나만 그런 것일까.
 도라지꽃은 보면 볼수록 왜 그리도 뭔가 슬픔 같은 것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나만 그런 것일까.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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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보라색 계통인데도 어쩐지 보라색 같지가 않은 도라지꽃을 보고 있노라면 내 어린 시절의 석탄댁이 생각난다. 그녀는 뭐랄까, 전형적인 농촌 사람이기보다는 노천명의 어떤 시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사슴'의 느낌이 있었다. 눈 뜨면 보이는 것이 흙이요 온종일 손에 만지는 것 역시 흙인 농촌에 살면서도 내 땅이라 할 만한 흙은 한줌도 갖지 못했던 여인이었다.

어디를 가건 항상 남의 땅을 밟아야 했던, 자기 땅에는 한 번도 발을 들여보지 못한 그 여인에게도 분명 남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남편의 얼굴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산에서 소나무 몇 개 베어다가 기둥을 세우고 짚 몇 단 얻어다가 지붕을 덮으면 집이 되는 시절의 농촌에서 그런 집마저도 없이 남의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다섯인가 여섯 식구가 구들구들 살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나마도 정지방이라 해서 지금 생각하면 일곱 자에 일곱 자, 그러니까 대략 2미터 10센티 정도의 정사각형 방이었다. 평수로 치자면 한 평 반은 넘고 두 평은 채 안 된다. 그런 방에서 다서여섯 식구가 어떻게 살았는가는 지금 생각하면 경이롭기만 하다.

그 정지방은 사실 내 방이었다. 절간에 계시는 외할머니가 외손주들을 보러 오셨다가 한잠씩 주무시는 방이기도 했다. 그런 방을 아버지가 왜 석탄댁 가족에게 내주었는가는 지금도 의문이다. 어쨌든 그녀의 가족은 그렇게 내 방을 점령하는 방식으로 우리 집에 세를 들어 일 년쯤 살다가 나갔다.

그녀는 산도라지 캐는 일과 남의 집 품팔이를 교대로 했다. 어떤 일이 본업이고 어떤 게 부업이었는가는 지금도 모르겠다. 하여튼 그녀는 날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일당 개념이 희박했던 시절에 그녀가 남의 일을 하고 받아오는 것은 그날 어떤 일을 했는가에 따라 결정되었다. 감자 캐는 일을 하면 감자를 받아오고 보리밭 메는 일을 하면 보리쌀을 받아왔다.

산도라지를 캐는 날이 아마 그녀의 수중에 돈이 들어오는 날이었을 것이다. 가끔은 마을의 누군가에게 주고 곡식을 받기도 했지만 대개 장으로 가서 팔고 돈을 받아왔다. 그 돈으로 아이들의 양말도 사고 옷도 사고 공책 같은 것들도 사 주었을 것이다.

봄에 진달래나 원추리꽃을 꺾는다고 산에 가면 더러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아니다. 만났다기보다는 발견했다는 표현이 아마 옳을 것이다. 아이들은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이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우거진 수풀 속을 무엇인가에 쫓기듯이 재게재게 걷고 있었다. 왼쪽 어깨에는 작은 망태가 마치 바람벽의 못에 걸어놓은 것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오른손에는 끝이 뾰족한 삼각형 모양의 창이 들려 있었다. 걷다가 도라지를 발견하면 잠깐 허리를 숙여 도라지를 캐고 다시 일어서서 또 걸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슬픈 사슴'처럼 말이 거의 없었다. 언제나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움직임이 부산스럽다거나 자발스럽지도 않았다.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은 여인이었다. 그녀의 아이들 역시 말이 없었다. 나이 어린 아이들이 작은 방에 고물고물 있고 보면 더러 싸우기도 하고 우는 소리가 나기도 할 텐데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아이들 가운데 큰애 이름이 대호였던가, 그렇게 기억된다. 그렇게 있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있다가 일 년쯤 뒤에 이사를 간 그들 가족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해 나는 그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다만 없어졌던 내 방이 다시 생겼다는 것을 기뻐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십여 년쯤 뒤에 우연히 그들 가족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댁의 큰아들 대호가 이리(현재의 익산)의 무슨 고등학교에서 배구선수를 하는데 전국체전 전북 대표로 뛰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이 어떤 경로를 거쳐 내 귀에까지 들어왔는가는 지금 명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때부터 나는 도라지꽃이 피는 계절이면 그들 가족을 가끔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산에서 씨앗 몇 알 받아다가 뿌린 것이 지금은 마당 한쪽을 차지한 도라지밭이 되었다.
 산에서 씨앗 몇 알 받아다가 뿌린 것이 지금은 마당 한쪽을 차지한 도라지밭이 되었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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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해마다 그들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도라지꽃이야 매년 그때가 되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피었겠지만 내 마음은 매년 같지가 않았다. 어떤 해에는 도라지꽃이 눈에 보이고 어떤 해에는 전혀 의식조차 못한 채로 지나갔다. 종합을 내보자면 아마 도라지꽃을 발견하고 그들 가족을 떠올린 햇수보다 그렇지 않은 햇수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도라지꽃이 피는 계절이면 으레 석탄댁과 그 아이들이 생각났던 것처럼 여겨진다.

이것은 무슨 착각이라거나 혼선이라기보다는 아마 도라지꽃과 석탄댁의 중첩된 이미지가 내게 안겨준 어떤 충격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이렇다 할 무슨 향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화려하거나 요란하지도 않은 꽃 도라지꽃과 있으면서도 없는 듯이 항상 거기 어디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석탄댁, 그리고 울며불며 시끄럽게 떠들어야 할 어린 나이에도 늘 조용했던 그 아이들에 관한 기억이 충격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사실 형용모순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전쟁터에서 죽은 백 명의 군인보다는 아무 이유도 없이 죽은 한 소녀의 시체에 관한 기억이 더욱 끔찍하게 오래 남는 이치와 같다고나 할까.

"엄마, 혹시 석탄댁 알아, 기억나?"

도라지꽃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른 어제 오후에 불현듯 그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그때 바지를 두 개나 입고 그 위에 또 팬티를 입으려 하고 계셨다. 팬티를 바지 위에 억지로 입는다기보다는 아예 끼어 넣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어머니를 물끄러미 한참이나 쳐다보며 눈물을 삼키고 있던 내 입에서 불현듯 그런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놀랍게도 대뜸 반말을 하고 계셨다.

"아이, 알지 그럼, 모를까."

방금 전까지도 아들을 오빠로 알고 그랬어요, 저랬어요, 하시던 어머니가 석탄댁을 떠올리는 순간 아들을 오빠가 아닌 아들로 제대로 보게 된 것이었다. 아 그래, 치매란 원래 먼 기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지 아마? 그래, 그렇겠다. 오늘은 석탄댁을 소재로 어머니와 한 차례 공연을 해야겠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서로 항상 낯설고 신기해 한다. 어머니는 볼 때마다 "아따 뭔 개가 이리도 이쁘냐"하시고, 개는 또 저나름의 어떤 서정이 있는 것인지 꼬리도 흔들어주지 않고 자꾸 숨으려 하지만, 그러면서도 못 잊겠다는 듯 얼굴을 내밀곤 한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서로 항상 낯설고 신기해 한다. 어머니는 볼 때마다 "아따 뭔 개가 이리도 이쁘냐"하시고, 개는 또 저나름의 어떤 서정이 있는 것인지 꼬리도 흔들어주지 않고 자꾸 숨으려 하지만, 그러면서도 못 잊겠다는 듯 얼굴을 내밀곤 한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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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쓸데없이 걸쳐놓은 바지 위의 팬티를 벗겨내고, 바지도 하나는 벗겨내고 칠부바지 하나만 입힌 채로 마당의 방죽가 원두막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그새 또 석탄댁은 잊어버리고 "아 팬티를 입어야는디, 입어야는디"하고 자꾸 뒤를 돌아보고 있었지만, 원두막에 도착해서 개를 발견하고는 이내 "뭔 개가 참, 이쁘기도 하다, 이쁘기도 하다"하고 몇 번이나 감탄을 있었다. 그러다가는 아들이 옆에서 석탄댁 얘기를 꺼내자마자 또 금방 개는 잊어버리고 그 이야기에 몰입하시는 거였다. 

"징허게도 가난했어. 남의 집 험한 일은 다 하고 다녔고."
"왜 그렇게 움막 한 채도 없이 가난했던 거여?"
"아 가난헝게 가난했제."

어머니는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짜증이 묻어나는 그 높은 언성에서 어머니 특유의 연민이 묻어나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개를 쳐다보는 어머니의 눈에 이슬이 방울거렸다. 건들면 그대로 툭, 떨어질 것 같았다. 잠깐 숨을 돌렸다가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가난하니까 가난했다는 게 뭐여, 그런 소리 말고. 제대로 좀 얘기해봐요."
"남의 논에 버려진 이삭도 꼭 허락을 받고 들어갔던 사람이여. 말은 없어도 정은 또 얼매나 많았다고."
"그러니깐 너무 정직해서, 그리고 또 정이 많아서, 그래서 가난했다는 얘기가 되는 거네?"
"폐병인가 머신가, 그 집 서방이, 십 년도 넘게 누워서 피만 토해내고, 징허게도 똑똑헌 남자였는디, 송산양반이랑 같이, 두 사람뿐이었어. 남자는."
"남자가 두 사람뿐이었다고? 그건 또 뭔 소리여?"
"아 똑똑했당게."
"아아, 똑똑한 남자가 그 두 사람뿐이었다고? 우리 마을 매산에서?"

석탄양반이 똑똑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정보였다. 송산양반이 똑똑했다는 이야기는 예전에 가끔 들어서 알고 있었다. 사변 직후 고창 모양성 인근에서 군경에 의해 총살을 당했다는 남자였다. 마을 사람들도 모두 알고, 그댁의 가족들도 대부분 알고 있었지만 살해당한 송산양반의 모친만은 사실을 모른 채로 이십 년도 넘게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한 비밀로 되어 있었다.

"그럼 석탄양반도 빨치산인가, 좌익인가, 하여튼 그거 했던 양반인가?"
"아이 몰러, 내가 으찌케 알어."
"똑똑했다면서?"
"똑똑했어."
"그럼 죽은 거여?"
"폐병인가 믓인가."
"하여튼 우리집 정지방에 살 때는 안 죽었었지? 살았었지?"

어머니는 감나무에서 깍깍거리는 까치를 찾아보고 있는 눈치였다. 아들이 옆에서 뭐라고 하건 이제 더 이상 안 듣겠다는 것인지, 실제로 안 들리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어머니의 관심은 이제 석탄댁이 아니라 까치에 쏠려 있는 것이었다.

문득 김용택 시인이 생각났다. 그가 그토록 초등학교 2학년 담임만을 고집했던 이유는 그 또래의 아이들이 무엇을 보건 듣건 금방금방 잊어버리고 다른 것으로 향하는 그 넘치는 에너지 때문이었다지 아마?

시인의 서정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어쨌든 나는 석탄댁과 그 아이들이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보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이 무더운 계절에 그들을 생각하며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해준 도라지꽃에게 하나의 꽃말을 붙여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정직해서 가난했던, 떳떳했던 그리움이라고.


태그:#도라지꽃, #어머니의 기억, #치매, #가난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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