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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엔 인사치레라도 한답시고 맹자에게 건넨 인사말. "어이쿠, 우리 노인장께서 먼 길 오셨는데, 무얼 그리 바리바리 싸들고 오셨을까나(叟不遠千里而來亦將有以利吾國乎)?" 그 짧은 깐죽거림 뒤의 긴, 처참하고도 허망한 완패.

완패에 절치부심하던 양혜왕. 솔직함으로 무장하고 다시 한 번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보지만 앞에서 살펴 본대로 역시 역부족. 연이은 참패에 아마 보아도 보이지 않고, 아마 들어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며, 아마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몰랐을 것이 다.

맥이 풀린 양혜왕의 입에서 달리 나올 말은 없다. 고분고분해진 말투로 "저(寡人)는 마음을 비우고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寡人願安承敎)." 양혜왕 이제 아주 딴 사람이 된 듯.

한 나라의 제후(諸侯)를 이렇게 사납게 그리고 끝까지 몰아붙였던 사람도 아마 없었을 것이고 그러고도 목이 온전하였던 사람도 없었을 것이며 끝내 그 입에서 '삼가 편안히 가르침을 받들 것'이라는 선언을 받아냈던 사람도 아마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맹자의 힘, 혹은 신념.

더 기가 막히는 일은 이렇게 마음을 비우고 편안하게 가르침을 받겠다는 사람을 세워놓고 다시 닦달해 대는 맹자라는 사람, 참 못 말릴 양반. 도대체 어떻게 무얼 그리 닦달해대는지 그 모양새를 좀 살펴보자.

맹) 몽둥이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칼로 죽이는 것이 다릅니까?
양) 아닙니다.
맹) 그럼 칼로 죽이는 것과 정치로 죽이는 것이 다릅니까?
양) 같습니다.

이것이 고대(古代) 모(某) 제후와 모(某) 유세객의 대화로 보이는가? 검찰 혹은 경찰이 피의자를 앉혀놓고 퍼붓는 심문(審問)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대화. 연거푸 빤한 질문을 쏟아내는 품세로 보아하니 맹자, 이 양반 뭔가 또 다시 함정을 파고 있는 모양이다.

맹) 백성들은 지금 굶어 죽어나가고 있는 마당에 당신의 마구간에는 살찐 말들이 있고 주방에는 기름진 고기가 넘쳐나고 있지요(庖有肥肉 廐有肥馬 民有飢色 野有餓莩)?

아차, 싶었겠지만 이미 늦었다. 쉽게 말하자면 정치로 사람(백성들)을 죽이는 것이란 한쪽에서는 살찐 말과 기름진 고기가 넘치는데 한쪽에서는 굶어죽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런데 이미 앞에서 자신의 입으로 칼로 죽이는 것과 정치로 죽이는 것은 같다고 인정해버렸으니 양혜왕, 자신이 직접 칼을 들고 백성들을 찔러 죽이고 있다고 인정한 셈, 제대로 된 외통수.

이 자백을 놓칠 맹자가 아니다. 바로 굳히기로 들어간다. "이런 짓은 짐승들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짓(此率獸而食人也)." 지나친 비약? 아니면 표현이 너무 지나친가? 그러나 슬픈 일이지만 분명한 현실.

厚斂於民以養禽獸而使民飢以死,則無異於驅獸以食人矣.
주석에 보면 위와 같은 문장이 나온다. 써 이(以)가 무려 세 번이나 등장하는 문장이다. 예전에 독학으로 예기(禮記)를 읽을 때 써 이(以)를 말 이을 이(而)로 번역한 부분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전문가라는 사람도 별 것 아니로군.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써 이(以) 역시 말 이을 이(而)로 매우 자주 빈번하게 사용된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위 문장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첫 번째  써 이(以)은 '~으로써' 기구격으로 사용되었고 굶주려서 그래서 시간이 경과해서 죽는 것이니 두 번째는 말 이을 이(而)로 사용되었고 세 번째는 기구격.

사람이 먹고 살아야 될 곡식을 말이나 소 돼지들에게 먹이고 있으니 이것은 말하자면 사람의 몫을 짐승들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말이고 이로 인해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으니 심하게 말하면 이것은 짐승들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게끔 하는 것.

칼로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나 짐승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맹자가 묻는다. 이래도 내 말이 지나친가?

한쪽에서는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데 한쪽에서는 과로사(過勞死)가 생긴다. 한쪽에서는 비만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고 한쪽에서는 한 끼 식사비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한쪽으로의 쏠림은 인간사회를 포함한 자연계에서 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렇다고, 어쩔 수 없다고, 자연스런 일이라고 해서, 애써 그런 모순에 눈감아 버리면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동물과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슬프지만 맹자의 분노는 현재 진행형이다.

맹자께서는 이 대목에서 정말 '욱(^^)' 하셨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다음 문장에서 숨을 고른 기색이 역역하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조금 낮추고 조용히 타이른다. "짐승들이 서로 잡아먹어도 사람들이 그것을 미워하는데 (하물며) 백성의 부모 된 사람(왕)으로서 정치를 행하여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을 면하게 하지 못한다면, 백성의 부모 됨이 어디 있는가(獸相食, 且人惡之. 爲民父母, 行政不免於率獸而食人. 惡在其爲民父母也)?"

자신의 논리만으로도 성이 차지 않은 듯, 다음은 권위의 인용, 공자(孔子)를 불러낸다. 처음에 지적했듯이 맹자 논변(論辨)의 전형적인 형식이다. 우선 자신의 논리(論理)를 말하고 공자(孔子)나 시경(詩經) 혹은 서경(書經)의 내용을 인용하여 자신의 말에 권위를 싣는 방식이다.

용(俑)이란 고대의 순장 풍습을 대체하는 물건이었다. 사람 모양으로 만들어서 무덤 속에 넣는 순장(殉葬)하는 물건을 말한다. 공자는 이런 용(俑)을 쓰는 것조차 끔찍이 싫어했던 모양이다. 실제 고대 기록에서 사람을 장례나 제사에 사용했던 흔적이나 기록은 흔하다.

사람을 닮은 물건에서 언제 다시 진짜 살아있는 사람을 쓰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순장(殉葬)이라는 발상 자체가 미웠던 것일까? 어쨌든 직설화법보다는 간접화법을, 중심보다는 모퉁이만 슬쩍 들어올리는 완곡한 화법을 구사하시던 공자님의 입에서 욕, 그것도 저주를 담은 욕설이 나왔다.

후손이 없으리라(無後). 후손이 없다는 것은 한 집안이 망하는 일. 공자는 처음 용(俑)을 만들거나 사용한 사람에게 멸문(滅門)이라는 끔찍한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이다. 같은 욕이지만 욕에도 품격이 있음(^^)을 이제야 알겠다.

용(俑)을 만든 당사자를 치는 것이 아니라 에둘러 그의 후손의 절멸(絶滅)을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 공부자(孔夫子)시여. 공자께서는 욕조차 고원(高遠)하시다.

공자께서 처음에 용을 만든 자는 아마 후손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형상하여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공자께서도 이렇게 생명을 아끼셨는데) 어찌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굶어서 죽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仲尼曰, 始作俑者, 其無後乎. 爲其象人而用之也. 如之何其使斯民飢而死也)?


태그:#맹자, #양혜왕, #공자, #용, #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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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아들이며 누구들의 아빠. 학생이면서 가르치는 사람. 걷다가 생각하고 다시 걷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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