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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한다는 것>
▲ 표지 <기록한다는 것>
ⓒ 너머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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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초등학교에서 반장이 떠드는 아이 이름을 칠판에 적어 놓을까. 예전엔 그런 일이 흔했다. 어떤 반장은 칠판에 적고, 어떤 반장은 공책에 적어 담임선생님께 알려주었다. 이름 적혔다고 담임선생님이 늘 야단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반장에게 이름 적히는 게 싫어서 반장 눈치도 보고, 과자 몇 쪽 쥐어주며 자기 이름 지워 달라 매달리는 애들도 생겼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떠든 아이 효과'라 부른다.

왕이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며 사냥을 했다. 그러다가 말이 꺼꾸러져 왕이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는 않았다. 좌우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태종실록> 권7 4년 2월 8일)

조선 태종이 사냥하던 중 말에서 떨어진 자신의 행적을 사관에게 알리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가 어떤 왕이었던가. 새 왕조를 세우기 위해 정몽주를 제거했던 인물, 왕조를 세운 뒤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좌를 차지했던 인물, 개국공신 정도전을 왕권 강화의 장애물이라 여겨 제거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태종도 말에서 굴러 떨어진 자신의 행적이 기록되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종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라는 명령까지 고스란히 기록해서 실록에 남겼다. 

반장에게 자신의 이름이 적히길 바라지 않는 초등학교 아이들의 마음과 말에서 굴러 떨어진 모습이 사관에게 기록되길 바라지 않는 태종의 마음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행동이 기록되어 남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이다.

기록이 두려운 사람들

개인의 삶은 기록을 통해 역사가 된다. 왕조실록이나 공문서처럼 공적으로 남긴 기록 뿐 아니라 개인의 일기나 편지도 역사가 될 수 있다. 사적인 기록과는 달리 공적인 기록을 남기는 과정이 간단치 않다. 정당하지 못한 자신의 행적이 알려지길 원하지 않는 권력자는 기록을 없애버리려 하거나 왜곡시키려 한다.

이에 굴하지 않고 기록을 지키려는 이들이 때로는 모진 수난을 당했다. 사마천은 <사기>라는 역사서를 완성하기 위해 명예로운 자결보다 치욕스런 궁형을 선택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기록했던 김일손 등 사림세력은 처형당했다.

기록을 남기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기억하기 위함이다. 그러다보니 기록된 내용을 없애고 왜곡하거나 숨기려는 이들도 존재한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 세력은 전리품처럼 자기들끼리 훈장을 마음대로 나누어 가졌다. 어떤 시민이 이때 훈장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해달라고 청구한 적이 있다. 당시 행정자치부 담당 과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훈장을 받은 사람의 명단은 개인 정보이므로 공개할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기록물 약탈 

그런데 더 심각했던 것은 한국전쟁 때가 아닌가 합니다. 국제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미군은 점령지역에서 종이란 종이는 모두 자루에 넣어 미국으로 실어 갔습니다. 전투부대 뒤에 항상 '역사부대'가 따라다니며 말 그대로 쓸어 담아 갔다고 할까요. 군부대, 군청, 도청은 물론 각급학교의 자료까지 훑어갔습니다. …(중략)… 그래서 지금도 근현대사를 연구하려면 '미국 국립기록청(NARA)'로 가야하는 형편입니다. (책 속에서)

임진왜란이나 일제 식민지 지배 시기 일본의 문화재 약탈이나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군의 외규장각 문화재 약탈에 대한 이야기는 꽤 알려졌지만,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기록물 약탈 이야기는 낯설다.

전투부대와는 별도로 '역사부대'를 투입해 한국의 기록물을 샅샅이 훑어갔다면 한국전쟁은 미군의 '기록물 약탈 전쟁'이란 의미부여도 가능하겠다 싶다. 임진왜란을 일본의 문화재 약탈 전쟁으로 규정했던 것처럼.

공개되어야 가치 있는 기록

인류가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이래 기록을 통해 역사가 만들어졌다. 기록은 잘못된 일을 성찰하고 삶을 깊이 있게 해주며 잘한 일은 흐뭇하게 떠올리게 하고 삶에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한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록을 통해 역사를 만들어간다.

예전과는 달리 요즘은 다양한 기록물이 만들어진다. 각종 신문이나 주간지를 발행하는 언론 매체를 통해, 관공서에서 만들어지는 공문서를 통해 수많은 기록물이 쏟아져 나온다. 컴퓨터 자판을 통해 메모리에 기억되는 수많은 기록물도 있다. 이 기록물들 또한 현재 역사를 재구성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기록물은 후대 역사가들의 평가를 통해서만 가치가 드러나는 건 아니다.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기록물 공개는 가치 있는 일이다. 기록물 정보를 독점하고 공개되지 않을 경우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기 때문이다. 무릇 기록물 정보는 공개될 때 참 가치가 있는 법,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공공기관의 정보 공개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1998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기록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기록을 둘러싼 다양한 갈등을 보여준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기록은 역사가 되어 성큼 우리 곁으로 다가선다.

덧붙이는 글 | 오항녕/너머학교/2010.7/10,000원



기록한다는 것 - 오항녕 선생님의 역사 이야기

오항녕 지음, 김진화 그림, 너머학교(2010)


태그:#기록,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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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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